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23
교랑의경 323화
강주 정씨 가문의 사당에는 적막감만 맴돌았다. 종복은 놀란 얼굴로 한쪽에 가만히 서서 무릎을 꿇고 앉아 족보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정교랑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종복은 저 여인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정씨 가문에서 낳은, 태생이 바보인, 어렸을 때부터 집 밖으로 쫓겨나 도관에서 자란 여인. 바보가 어떻게 생겼는지 일찍이 본 일이 있었지만, 자신의 눈앞에 앉은 여인처럼 생긴 바보는 절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며칠 전에 저택 밖에서 정씨 가문의 바보가 실은 바보가 아니었다는 말을 흘려들은 적이 있지만, 종복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정 대노야의 최측근 시종인 만큼, 종복은 그 바보의 생애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으로 직접 저 바보의 행동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저 여인이 바보라고 믿기 어려웠다.
좀 전에 대노야에게 저 여인에게 족보를 읽어 주라는 당부를 들은 게 무색할 정도로, 저 여인은 분명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바보라면 글을 몰라야지. 글을 읽을 줄 아는데, 어떻게 바보라고 할 수 있겠나?
“이게 다인가?”
바닥에 앉아 있던 정교랑이 갑자기 물었다. 종복이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예. 여기 있는 게 다입니다.”
말을 끝낸 종복이 여인을 쳐다보자, 평온해 보이던 여인의 얼굴에 서서히 막막한 기색이 드러났다. 그런 여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종복은 저도 모르게 슬퍼지면서 왠지 모르게 좀 전에 했던 말을 후회하게 되었다.
정교랑이 마른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없네. 하나도 없어, 하나도.”
사실 정사낭을 시켜 족보를 쓰게 했을 때, 이미 이런 결과를 예상했었다. 그런데도 족보를 직접 보고자 한 이유는 정사낭이 기억해 낸 것이 가까운 직계 조상과 형제자매들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나뭇가지처럼 사방으로 뻗은 방대한 정씨 가문의 족보 전체를 보다 보면,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름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그녀에게 있었다.
사람이 마음속으로 ‘혹시’라는 희망을 품는 건, 사실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씨.”
몇 걸음 가까이 다가온 반근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정교랑을 불렀다. 종복의 귀에는 이 부드럽고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처량하게 들렸다.
“아씨, 뭘 찾으시는 건지요?”
종복이 물었다. 정교랑은 별다른 대꾸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족보를 천천히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다 봤으니, 가져가게.”
종복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사당을 나가는 정교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목이 가득한 사당은 저택 안의 다른 거처보다 훨씬 서늘하고 어두웠다. 그런 고목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여인의 여윈 뒷모습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아씨, 어디로 가시려고요?”
사당을 나온 뒤로 쭉 말을 하지 않던 반근은 정교랑이 정 대노야의 거처가 아닌 다른 곳으로 방향을 돌리자 정교랑을 불렀다.
“그 사람 찾으러.”
정교랑이 말했다.
그 사람을 찾아야 해. 오직 그 이름만이 내 기억에 남아 있고, 실제로도 존재하는 사람이야.
반근은 알겠다 대답하고 정교랑을 따라 집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 대노야 부부는 여전히 대청 안에서 정교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족보를 찾아보는 거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이야.”
정 대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정 대노야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계속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정 대부인의 말을 듣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꿍꿍이를 꾸밀 수 있는 사람이 바보겠소?”
정 대노야의 물음에 정 대부인은 멈칫했다.
그렇네. 바보가 무슨 꿍꿍이가 있겠어. 멍하니 앉아 있거나 듣기만 할 텐데.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잘못 알고 있었을 수도 있소. 아주 심한 바보는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오.”
“당신은 저 아이가 어렸을 때 어땠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대여섯 살 때도 걸음을 못 뗐던 아이인데, 뭘 잘못 알고 있다는 거예요?”
정 대부인이 기가 찬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 바보인 건 틀림없어. 다른 사람들은 모를지언정, 이 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제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아니면, 차차 나아진 거일지도 모르지.”
정 대노야가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정 대부인이 무슨 말을 더 하려던 찰나, 정 이노야 부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정 대부인이 턱으로 밖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노야한테 한 번 물어봐요. 병주에 있을 때 그 바보가 어땠는지.”
“병주에서요?”
정 이노야가 자리에 앉아 정 대노야의 말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회상했다.
“뭐, 다를 바가 있었겠습니까.”
“도관에 가본 적은 있고?”
정 대노야가 물었다.
당연히 안 갔지. 그걸 말이라고.
정 이노야는 정 대노야의 말이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보러 갈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병이 나았으면, 진작 집으로 찾아왔겠죠.”
정 이노야는 쓸데없는 말이라는 듯 대꾸했다. 정 대노야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무리 봐도 바보 같지 않던데, 정말로 나은 게 아닐까? 가만, 태생부터 바보인 사람도 나아질 수 있나?
“제 생각에는 다 나은 것 같아요.”
정 이부인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때에 비하면 많이 자라기도 했고, 주씨 가문이 데려다가 아주 잘 가르친 것 같던데요.”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정 대부인이 냉소를 보이며 물었다.
“그래서?”
고개를 든 정 이부인이 지지 않겠다는 듯 정 대부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제 말은, 교랑은 다 나아서 바보가 아니라고요. 그러니 그 아이의 혼사는, 저희가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드디어 가식 떨던 모습을 버리고 본모습을 드러내는군.
정 대부인은 속으로 비아냥거리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방 안에는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문밖 회랑 아래 꿇어앉아 있던 시녀와 여종들도 방 안의 긴장감에 숨쉬기 힘들 정도로 압도되었다.
“신중히? 차라리 그냥 혼사를 다시 결정하고 싶다고 하지 그래?”
“역시 형님께서는 고명하시네요. 저희의 뜻이 바로 그거예요.”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방 안에 쿵 하고 울렸다.
정 대부인의 거처에 있던 여종과 몸종들은 찻잔이 떨어지는 소리에 서둘러 사방으로 흩어졌다. 부인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여종들만 마당에 남아 입을 꾹 다문 채로 문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깔개 위로 떨어진 찻잔을 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사는 이미 결정이 난 일이오. 뱉은 말에 신용이 없어서 쓰나.”
가장 먼저 침묵을 깬 정 대노야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사실상, 가마가 대문을 넘기 전까지는 결정된 혼사라고 볼 수는 없죠.”
정 이부인이 정 대노야를 보며 싱긋 웃었다.
“대노야, 우리 교랑이 좋은 집에 시집가기를 원하지 않으세요?”
“아무리 그래도 말은 천금의 가치를 지닌다 했거늘. 이대로 무르자는 거요? 좋은 집안이 나타났다고 해서,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게 가당키나 하오?”
정 대노야가 언짢은 표정으로 정 이노야에게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아우야, 이건 네 결정이냐?”
정 이노야가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고 말했다.
“혼인은 인륜지대사니 아무래도 신중해야······.”
정 이노야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 대노야가 옆에 있던 팔걸이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정 대노야는 자단목으로 만든 흑색 탁자를 단번에 엎어버렸다.
대청 안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말에는 신뢰가 있어야 하는 법이고, 행동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생기기 마련이다. 어찌 그런 옹졸한 소인배 같은 마음을 먹을 수가 있는 게냐!”
정 대노야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정동,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겠다는 건지 알긴 하는 게야!”
정 이노야가 성인이 된 이후로, 정 대노야가 이토록 성을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 이노야는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곧바로 몸을 숙여 대노야에게 사죄하려고 했지만, 정 이부인이 한발 앞서 그를 제지했다.
“아주버님, 이이도 자신이 지금 뭘 하려는 건지는 잘 알고 있어요.”
단호한 표정의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 대신 대답했다.
“바깥일도 아니고 집안일이잖습니까. 이 사람은 자기 딸을 위해서 이런 결단을 내린 거예요. 자기 자식을 위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정 이노야가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리며 말했다.
“맞습니다, 형님. 저는 교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겁니다.”
그런 이노야 부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 대부인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딸을 위해서라고?”
정 대부인은 웃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실실 웃다가 돌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정말 딸을 위해서였다면, 뭐하러 오늘까지 기다렸죠? 뭘 위해서인지는 이노야가 더 잘 알고 있겠지만, 다른 사람 눈에도 훤히 보이네요.”
“형님,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대로 말씀하세요!”
그러던 정 이부인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는 우는 목소리로 외쳤다.
“계모 주제에 제가 어찌 감히요!”
정 이부인은 정 이노야의 소매를 잡아 늘어뜨리면서 더욱 서럽게 울었다.
“여보, 교랑의 혼사는 내가 결정할 게 못 되네요. 나 같은 제삼자가 어디 끼어들 자리나 있겠어요.”
정 이부인이 고개를 저으며 훌쩍였다.
“어찌 당신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이오. 당신은 교랑의 계모잖소. 어머니란 말이오.”
정 이노야가 부인을 위로하고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형님, 우리 교랑이 좋은 집안에 시집가길 바라는 아비의 마음이 어떻게 잘못됐다는 겁니까?”
“좋은 집안에 시집가길 바란다니? 그럼 우리 왕씨 가문은 좋은 집안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정 대부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공주부 진씨 가문과 비교하면, 당연히 좋은 집안이라 하기 힘들지요.”
정 이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말하고는 손수건으로 천천히 눈물을 훔쳤다.
역시! 어제 나간 건 옷감을 사러 나간 게 아니라, 딸을 팔러 나간 거였어!
정 대부인이 냉소를 지으며 정 이부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비록 진씨 가문에 못 미치긴 하지만, 우리 왕씨 가문 또한 아무나 넘볼 수 있는 집안이 아닐세. 이미 혼약은 끝났으니, 그 잘난 진씨 가문이 어떻게 이 혼사를 망치는지 두고 봐야겠군!”
정 대노야는 굳은 표정으로 정 이부인을 노려보더니 정 이노야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진씨 가문이라는 말만 듣고 이성을 잃은 것이냐? 진씨 가문이 좋은 집안인 걸 잘 알고들 있나 본데, 그리 좋은 집안이 굳이 왜 우리와 연을 맺겠느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게냐? 여인네들이 꼬드기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는, 어찌 이리도 경거망동하는 것이야!”
정 대노야가 큰소리로 호통쳤다. 정 대노야의 호통에 정 이노야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게, 듣고 보니 뭔가 이상하네.
“형님 생각도 그렇······.”
정 이노야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 이부인이 얼굴을 가린 채 대성통곡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이렇게는 못 살겠네. 맞아요, 제가 꼬드겼어요! 여보! 날 버려요! 날 내치라고요!”
정 이부인이 울부짖으며 가슴을 연거푸 내리쳤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난리를 피우는 것을 난생처음 본 정씨 형제와 정 대부인은 당황하여 입이 떡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