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31
교랑의경 331화
당연히 아니지.
“이건 다 내 돈이에요. 마음 놓고 써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렇게 어린 소녀가 어디서 그런 큰돈이 났담?
정계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아씨, 정말로 홧김에 이러시는 건 아니고요?”
정계가 이를 악물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정교랑이 정계를 흘깃 쳐다보고는 책을 펼쳤다.
“난 절대로 홧김에 일을 저지르거나 억지를 부리지 않아요.”
“하지만, 그 돈, 그 돈은 아씨께서 잘 보관해 두셨다가 다른 곳에 쓰시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이러시면 그 돈을 허투루 낭비하게 되는 꼴인데요.”
그 말을 들은 정교랑이 웃음을 터트렸다.
“돈은 펑펑 쓰라고 있는 거 아니에요? 돈을 뒀다 뭐 하죠?”
정계는 정교랑의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만 물어봐요. 난 정말 진지하게 한 말이니까, 어서 가서 집이나 지어요. 어떻게 짓고, 누구에게 집을 나눠줄지는 당신들끼리 알아서 하고요.”
정교랑이 잠시 멈칫하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참,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정평을 불러서 풍수를 봐 달라고 하면 더 좋겠네요.”
정평? 설마 이 모든 게 그 정평이라는 자와 상관이 있는 건가? 정평 때문에 저 낭자가······.
정교랑을 쳐다본 정계의 머릿속에 이 같은 생각이 스쳤다.
아휴, 됐다. 그만 생각하자.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대로 받지 뭐. 저 낭자가 나중에 딴소리를 하더라도, 우리는 원래 살던 곳에서 살면 그만이니 손해 볼 것도 없어. 기껏해야 몸이나 좀 굴리는 것뿐이지. 놀고 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데려다가 몸에 열도 좀 내면 좋지 뭐.
어디 한번 해 보자!
“좋습니다. 그럼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정계가 심호흡을 깊게 한 뒤,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아씨께 감사드립니다.”
정교랑은 대답 대신 목례를 했다.
정계가 밖으로 나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긴장한 얼굴로 몰려들었다.
“어, 어떻게 됐습니까?”
누군가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다른 이들은 잔뜩 긴장해서 말을 하지도 못했다. 혹여나 눈이라도 깜빡이면 이 달콤한 꿈에서 깨어날까 봐 두려워, 사람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정계를 쳐다보았다.
설령 이 모든 게 꿈이라 해도, 이런 꿈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꾸는 게 낫지.
“진짜일세.”
정계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감탄도 뱉지 못하며 서로의 귀를 의심했다.
사람들의 표정을 본 정계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자신도 정교랑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지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민망함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진짜라니까!”
정계가 환한 웃음을 보이며 목청을 높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진짜야!”
정계가 연달아 진짜라고 외치자,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뛸 듯이 기뻐하며 환호했다. 몇몇은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기도 했다.
“다들 힘을 내서, 새해가 되기 전에 새집으로 들어갑시다!”
정계가 손뼉을 치며 말하자, 사람들이 맞장구를 치며 외쳤다.
“거리에 나가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을 죄다 불러 모읍시다!”
“어르신,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 시켜만 주십시오!”
“일단 장부 관리할 사람을 두 명 구해야 해. 자, 계획부터 짜야 하니, 앉아서 제대로 이야기하세. 분담해야 할 일들도 정리하고.”
시끌벅적한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조 집사와 반근은 시선을 거두었다. 아씨가 거침없이 사람을 죽이는 건 봤어도, 이번처럼 거침없이 돈을 뿌리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 낭자는 도통 종잡을 수가 없는 이상한 사람이야.
조 집사가 혀를 차며 생각했다.
하지만 저 낭자한테 돈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겠지. 저 낭자가 손에 쥔 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진귀한 보물이야.
막대한 재물, 부귀와 영화, 뛰어난 재능, 원대한 이상. 이 모든 건 결국 하나뿐인 목숨에 기대어 있기 마련이었다.
* * *
안에서 들려오는 우당탕 소리가 마당까지 울려 퍼졌다. 마당의 여종과 몸종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여종 하나가 조심스럽게 안을 살펴보니, 대청에 있던 탁자와 병풍, 꽃병 등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바보인 척을 하면서 나를 죽이려고 들어?”
정 대노야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머리카락 몇 올이 밖으로 삐져나왔고, 입고 있던 일상복의 옷매무새도 흐트러진 채였다.
“내가 저를 못 죽일 줄 알아? 바보니까 멋대로 굴어도 상관없을 줄 아는 게지? 애초에 요강에 빠져 죽을 뻔한 사람인 걸 잊으면 쓰나!”
정 대노야가 넓은 소매를 휘적거렸다.
“바보 시늉을 하며 감히 나를 죽이려고 하다니. 나라고 그 앨 못 죽일 것 같아?”
소식을 들은 정 대부인은 새로 지은 경당(經堂)에서 거처로 곧장 돌아갔다. 눈앞의 어지러운 광경을 본 정 대부인이 화들짝 놀랐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정 대부인은 여종과 몸종을 불러 안을 치우라 명하고는 정 대노야의 팔을 붙잡아 의자에 앉혔다. 씩씩대던 정 대노야가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머리끝까지 치민 화가 사그라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걔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정 대노야가 손으로 밖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인들을 데리고 남정으로 갔소. 다 쓰러져가는 남의 집을 주워다가 거기서 살겠다나! 게다가 남정 사람들에게 집까지 지어 주겠다지 뭐요! 내가 두어 마디 뭐라고 했더니 어쨌는지 알아? 내 하인한테 화살을 쏴 다치게 하더니, 나한테도 화살로 겨눴어!”
정 대부인이 정 대노야의 팔을 잡으면서 말을 끊었다.
“잠깐만, 지금 뭐라고 했어요? 그쪽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주겠다고 했다고요?”
“맞소. 그렇게 말했다니까. 남정 사람들은 기뻐 어쩔 줄 모르더군. 걔 손에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그 사람들도 참 생각이 없지. 어떻게 바보의 말을 믿느냐고!”
정 대노야가 콧방귀를 뀌면서 비아냥댔다. 정 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집을 짓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어요. 그 애한테 집을 지을 만한 돈이 어딨다고.”
“돈이 있다 해도 남한테 집을 지어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정 대부인이 정 대노야의 어깨를 토닥이며 따뜻한 차 한잔을 건넸다.
“노야, 일단 화부터 삭이세요. 바보한테 무슨 화를 내요.”
정 대노야가 고개를 돌려 정 대부인을 쳐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화가 나지 않소?”
“진인께서 보우해 주시니, 심신이 안정되어 괜찮네요. 화낼 게 뭐 있어요.”
정 대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인이네 어쩌네 하는 게 다 뭐라고.”
정 대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대자 정 대부인이 얼른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정 대부인은 합장을 한 채 사죄의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리고, 손 관주와의 일을 정 대노야에게 전하며 침상 옆에 놓인 낮은 탁자를 가리켰다.
“경서는 저 위에 올려 두었으니까, 당신도 마음의 평온을 찾아봐요.”
“쯧, 이러니 여인네들이 어리석다고 하지!”
정 대노야가 혀를 차면서 정 대부인의 손을 내쳤다. 정 대노야의 말에도 정 대부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아무튼 나는 안심이 돼요. 그 애도 내쫓았고.”
“이게 어딜 봐서 내쫓은 거요?”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오른 정 대노야가 소리쳤다.
“우리 집에 있는 것만 아니면 됐죠.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하세요.”
“난 이 망신을 못 견디겠다고!”
정 대노야가 고함을 쳤다. 하지만 정 대부인은 그를 쳐다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노야, 그 아이가 태어났던 그 순간부터, 이미 온갖 망신은 다 당하지 않았나요?”
하긴, 그렇지.
정 대노야가 소매를 홱 내치고는 다른 방법을 궁리하기 위해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부인, 오늘은 얼굴색도, 기운도 많이 좋아지셨어요.”
여종이 정 대부인 옆에서 아첨을 떨었다. 정 대부인이 웃으면서 차를 한 모금 음미했다.
“이번에는 내가 탁자를 엎고 찻잔을 던지면서 화를 내지 않았다는 뜻이지?”
여종은 차마 그렇다고 대꾸하지는 못하고 고개를 저으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예전과는 달라.”
정 대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귀밑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진인이 보우하사,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내 심신은 평온할 것이다. 그러니 그 바보가 무얼 하든 더는 상관이 없어.”
새로운 하루의 아침이 밝았다. 새벽녘 안개가 걷히자, 정씨 가문의 저택 안으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문지기 두 명은 팔짱을 낀 채 한가로이 잡담을 나누며 빗자루를 들고 대문 앞을 청소하는 사환들을 구경했다.
어제의 소란은 밤과 함께 사라지고, 정씨 저택은 예전과 같은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평온은 얼마 가지 못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 때문이었다.
양손 가득 짐을 든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수레를 끌며 웃고 떠들면서 다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정씨 저택 앞 거리는 묘회(廟會: 절 앞에 모여 물건을 사고팔던 임시 시장)가 열리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북적거렸다.
다리를 건너면 보이는 정씨 저택에는 은혜를 베풀라는 편액이 높이 걸려 있었다. 그렇기에 정씨 저택 앞 거리에서 함부로 떠들거나 큰 소리를 내는 이는 없었다.
오늘 무슨 일이 났나?
“가서 한번 물어봐라. 막일하는 잡부들이 왜 다 이쪽으로 온 거지?”
문지기 사내가 미간을 찌푸린 채 외쳤다.
곧바로 사환 두 명이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지나가던 사람들을 붙잡아서 물어보았다. 얼마 후, 사환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문 앞으로 되돌아왔다.
“집 지으러 왔다는데요?”
집을 지으러 와?
사환의 말을 들은 문지기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정교랑과 정 대노야가 남정에서 난리를 피웠던 일은 이미 정씨 저택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당연히 헛소리겠거니 했는데, 그 바보가 남정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준다는 게 헛소리가 아니었어?
“부인, 부인.”
낮은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정 대부인은 태평경을 중얼중얼 읊고 있었다. 정 대부인은 밖에서 들려오는 여종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문밖을 지키고 있던 여종이 정 대부인을 부르며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오는 여종을 막으면서 조용히 나무랐다.
정 대부인은 평온한 마음으로 태평경의 한 구절을 다 읽은 뒤, 조심스럽게 경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대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왜 또 호들갑을 떨어?”
정 대부인이 의자에 앉아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담담하게 물었다.
“부인, 부인. 저쪽에 정말로 집을 짓는다 합니다. 일만 관! 그 바보 아씨가 일만 관을 내서 집을 짓는대요!”
여종이 다급하게 외쳤다.
일만 관!
정 대부인이 입에 머금었던 차를 풉 하고 내뿜었다.
“무슨 헛소리냐!”
정 대부인이 외쳤다.
“아니, 아닙니다. 헛소리가 아니라 진짜예요. 남정에서 분명히 일만 관이라고 했어요!”
여종의 표정에는 아직도 일만 관이라는 액수를 처음 들었을 때의 놀라움이 남아 있었다.
일만 관!
“걔가 돈이 어딨다고!”
정 대부인이 가슴 언저리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주씨 가문에서 준 걸까요?”
여종이 추측했다.
누가 준 돈이든 간에, 그 바보가 쥐고 있는 돈이라면 우리 돈이나 마찬가지지! 무려 일만 관이라니!
“큰일 났네. 그 바보에게 남정 비렁뱅이들이 공갈을 친 게야. 노야는? 냉큼 뛰어가서 노야께 알리거라.”
너무 급하게 몸을 일으킨 나머지, 정 대부인이 탁자에 무릎을 세게 박았다. 뼈가 저릿하게 아픈 고통에 울화가 치민 정 대부인은 탁자를 걷어차 뒤엎어 버렸다.
“저건 부숴서 태워 버려라!”
정 대부인이 소리치고는, 여종의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며 대청을 나섰다.
여종들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바닥에 엎어진 탁자를 밖으로 옮기려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여종 하나가 침상 옆에 놓인 경서를 흘깃 쳐다보면서 소곤거렸다.
“아무리 진인이라도 바보한테는 소용이 없나 보네.”
대청 안에 있던 여종 둘은 저도 모르게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여종들은 재빨리 웃음기를 거두고, 서로 장난스러운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탁자를 밖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