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43
교랑의경 343화
공당 옆쪽에 앉아 있던 반근이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근은 몇 번이고 자리를 박차고 공당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었지만, 부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한다는 정교랑의 당부를 떠올리며 간신히 참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반근 낭자, 고개를 들지 않아도 되니까, 겁먹지 말고 있는 사실 그대로 얘기하면 돼요.”
반근과 함께 관청으로 온 남정 여인들이 자신들도 겪어 본 일이라는 투로 반근을 다독였다. 하지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까지 더듬으며 건네는 그녀들의 말은 반근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남정 사람들에게 관리를 대면하는 일은 엄청난 일이었다. 게다가 이번 일은 자식이 가장을 고소하는 악역무도한 사건이었다.
반근이 여인들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네, 알겠어요.”
반근은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걸음을 옮겼다.
“나이가 어려서 걱정했는데, 반근 낭자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 모양이네.”
“주씨 가문의 사람이라잖아. 주씨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데, 무서울 게 뭐 있어?”
여인들의 속삭임을 뒤로하고, 반근은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 너한테 시킬 일이 있어. 할 수 있겠니?
– 아씨, 소인은 아씨가 죽으라고 명하셔도 기꺼이 따를 거예요.
하지만 아씨는 절대로 자신의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아. 아씨의 사람이라면 뭐든 뜻대로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 아씨는, 오직 아씨를 죽이려는 사람들만 죽음으로 내몰 뿐이야.
“노비 반근, 대인을 뵙습니다.”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는 어린 몸종을 보자 안심하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긴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작 열댓 살짜리 어린애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저런 아이라면 늙은 여우 같은 정 대노야가 굳이 나설 필요도 없지. 나더러 저 주둥이를 막으래도 막을 수 있겠는걸.
통판은 자세를 바로 했고, 이 절추는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정 낭자의 측근이 나이 지긋한 여종이 아니라 저렇게 어린 몸종이었어? 저 영리한 조귀처럼, 정 낭자의 시중을 드는 어멈들도 꽤 쓸 만했을 텐데. 어쩌다가 저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아이를 보낸 거야?
정 대노야는 반근을 보고도 미동조차 없었다.
저런 몸종을 보내다니. 주씨 가문이 아무리 잘 가르친다 한들, 그저 어린 계집일 뿐이야.
정 대노야는 더 이상 입을 열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통판 선에서 어렵지 않게 해결될 일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너희 아씨가 집안의 어른을 고소하여 혼수를 찾으려는 것이 사실이더냐?”
이 절추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사람들은 힘이 빠진 이 절추의 목소리에서 좀 전과는 다르게 그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
반근이 대답했다.
“그럼 돌아가서 네 아씨에게 알리거라. 가문도 있고 친족도 있으니, 집안에서 알아서 해결하라고. 게다가 재산 문제로 자식이 가장을 고소하는 일은 기강에 어긋나는 일이니, 터무니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해! 그렇지 않으면 네 아씨를 불경죄로 다스리겠노라!”
통판이 호통을 치면서 경당목을 쥐었다.
“퇴······.”
“대인, 저희 아씨께서는 재물 때문에 이 재판을 하고자 하시는 게 아니에요.”
반근이 퍼뜩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씨께서 정 대노야를 고소한 것은 아씨의 모친인 주씨 부인의 명예를 위해서입니다.”
반근이 정 대노야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대노야께서는 저희 아씨가 남들에게 괴롭힘을 당할까 봐 혼수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하면 저희 아씨께서는 무사할지 모르겠지만, 저희 부인의 억울함은 어찌합니까?”
부인?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의아해했다.
이게 그 죽은 주씨 부인이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
통판도 속으로 같은 생각을 했다. 순간 경당목을 쥐고 있던 통판의 손이 주춤했고, 퇴정을 알리려던 통판의 호통도 잠시 멈췄다.
공당 아래 서 있던 반근의 맑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 부인께서는 아씨와 함께인 단란한 가족생활을 얼마 즐기지도 못하시고 일찍 별세하셨습니다. 그런 부인께서 저희 아씨께 유일하게 남겨주신 것이, 바로 그 혼수고요.”
말을 하던 반근의 마음이 점점 아려왔다.
정교랑이 담담하고 감정 없는 말투로 이 이야기를 전했을 때만 해도, 반근은 별생각이 없었다. 당시에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도록 아씨의 말을 외우기도 벅찼기에 감정의 동요 또한 없었다.
반근은 자신의 양쪽으로 반듯하게 서 있는 관졸들을 훑어보았다. 또 공당 정중앙에 걸린, ‘명경고현(明鏡高顯: 밝은 거울이 높이 걸려 있다는 뜻으로, 판결이 공정함을 일컫는 말)’이라 쓰인 편액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관포를 입고 있는 관리들과 자신의 주위에 꿇어앉아 있거나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순간 반근은 자신과 정교랑이 병주 도관에서 숨죽이고 살던 시절이 떠올랐고, 이노야 식구들이 말도 없이 병주를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을 때의 절망감이 떠올랐다. 병주 도관에 번개가 내리쳤던 그 밤과 병주에서 강주까지 힘들게 왔던 천 리 길의 여정도 떠올랐다. 정교랑이 집에서 쫓겨나 소현묘관에서 지낼 때 마주쳤다던 음란한 남녀의 소름 끼치는 눈빛까지도.
정교랑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온 길에는 고난과 역경이 가득했다. 그 고난과 역경은 한 사람이 평생을 살아도 겪어보지 못할 것들이었다.
아씨는 그 많은 고난과 역경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셨어. 끝도 없는 고난과 역경들을 견뎌내셨다고.
왜? 왜 우리 아씨만 그런 고난과 역경을 겪어야 하는 건데?
만약 부인께서 살아계셨다면, 아씨께서 이런 일들을 겪지 않아도 되셨을까?
“비록 아씨를 직접 키우지는 못했지만, 부인께서는 유산으로나마 딸과 함께하고자 하셨을 거예요.”
만약 부인께서 살아 계셔서, 아씨가 다 나은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런데 대노야는 아씨를 위한 혼례를 올리겠다는 미명으로 세상 사람들을 속이셨죠. 모녀의 정을 끊고, 자식을 사랑하는 주씨 부인의 마음을 욕보인 것. 이것이야말로 천륜을 어기는 대죄이지 않습니까.”
말을 하던 반근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반근은 울먹이는 목소리를 간신히 참아가며,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려고 노력했다.
절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을 호소하는 데는 나이든 어멈들보다 저런 어린아이가 더 효과적이긴 하지.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소녀의 눈물만으로 동요할 사람들이 아니야. 온갖 참혹한 사건과 억울한 사건들을 다뤄왔기 때문에, 서럽게 운다고 해서 판결이 달라지지는 않아. 더군다나 오늘 같은 사건은 더더욱 판결을 뒤집기 힘들지. 이런 사건은 사정보다 관계를 더욱 중시하는 법이거든.
절추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곁눈질만으로도 통판이 냉소를 지으며 자신을 쳐다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저희 아씨는 모친께서 남겨주신 혼수의 값어치가 얼마가 됐든, 신경 쓰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아씨께서 쟁취하시려는 것은 재물이나 점포, 농토와 금은보화가 아니라 바로 어머니의 명예입니다. 남들처럼 아씨를 아껴 주는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고, 부인께서 아씨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지켜내기 위함이죠! 그 혼수는 주씨 부인께서 정정당당하게 아씨께 물려주는 유산이니, 그 누구도, 어떤 명목으로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공당 안에 반근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반근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통판 대인과 절추 대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몇 걸음 기어갔다.
“저희 아씨는 기필코 이 재판을 진행해야만 하고, 맞서 싸워야만 합니다. 정씨 가문에서는 결코 아씨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아씨께서는 오직 관부의 올바른 판결만을 바라고 계세요. 이 재판을 십 년, 이십 년, 아니 죽을 때까지 치러야 한다고 해도! 아씨가 평생 시집을 가지 못한다고 해도! 이 재판만은 꼭 진행해야겠다고 말씀하세요. 대인, 부디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결코 부인께 억울한 오명을 씌워서는 아니 됩니다!”
반근이 이마를 땅에 찧으며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반근의 말이 끝나자마자 절추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았다. 이와 동시에, 통판도 자세를 고쳐 앉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반근을 쳐다보았다.
정 대노야도 반근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절추나 통판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대신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참으로 맹랑하구나! 어디서 헛소리를 하는 게야. 이게 어딜 봐서 제 어미를 욕보이는 일이라는 게냐?”
정 대노야는 투덜거리며 통판에게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빨리 판결을 끝내라는 눈짓을 보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던 그는 공당에 있던 관리들의 표정을 보고 흠칫 놀랐다.
통판 대인의 표정이 왜 저러지?
정 대노야는 공당 안의 모든 관리를 훑어본 뒤, 다시 통판에게 시선을 옮겼다. 모든 사람의 표정이 좀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정 대노야는 좀 전에 반근이 했던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
방금 저 말에, 뭐 잘못된 게 있었나? 아니, 저 몸종이 한 말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어. 지극히 옳은 말이었지!
공당에 있던 모든 관리와 관졸들이 속으로 외쳤다.
정 대노야가 했던 말들은 번개가 잠시 번쩍이는 느낌이었다면, 저 여린 몸종이 한 말은 귀가 찢어질 듯 울리는 천둥소리와도 같았다.
사실 관리들은 처음에 반근이 울먹이면서 했던 많은 말들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하지만 반근이 마지막에 했던 말은 똑똑히 들었다.
재물도, 혼수도 필요 없고, 바라는 것은 오직 명예뿐이다.
꼭 이 재판을 해야만 한다. 한평생을 바쳐서라도! 한평생을!
사람들이 가산 문제로 관청에 오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돈 때문이다.
형제끼리 가산 문제로 관청에서 재판을 하게 되면, 가산의 절반 이상이 없어지게 된다. 재판이란 말다툼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기에, 관청에 발을 들이는 건 쉽지만 나가는 것은 지독히도 어려웠다.
특히나 사람 목숨이 달린 게 아닌, 단순히 재산에 대한 재판이라면 관리부터 관졸들까지 꼭 한 다리씩 걸쳐서 어떻게든 돈을 뜯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남에게 이득을 내어주는 재판은 바보가 아니고서야 진행할 리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산 문제로 관청까지 오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바보가 나타나다니! 더군다나 가산은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명예만을 바라는 바보가!
자리에 있던 관리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바로 명예를 우선시하고, 재물을 등한시하는 이런 재판이었다.
이게 뭘 뜻하는 거냐고?
사람들은 반근이 한 말의 속뜻을 단번에 이해했다. 관리들은 더 이상 비아냥거리는 눈빛으로 절추를 쳐다보지 않았다.
어쩐지 저 목수 놈이 체면도 내팽개치고 이 재판을 강행한다 싶었어!
생각을 해 봐, 생각을! 좀 전에 다들 돌려봤던 그 혼수 목록을 떠올려 보라고!
금은으로 만든 거대한 산을 눈앞에 던져다 주면, 누군들 소매를 걷어붙이지 않겠어? 여기서 한 몫을 따내면 반평생은 족히 풍족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상대가 누군지를 고민할 겨를이 어디 있어!
강주의 명문가든, 정씨 가문의 대노야든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애초에 우리가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도 아니고, 저들이 제 발로 관청까지 찾아와 고소장을 올린 사건이라고. 우리는 원리원칙대로 일하는 것뿐이니, 정정당당하고 떳떳해! 우리가 겁낼 게 뭐 있어!
조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번쩍이는 눈빛들을 보자 놀랍기도 하고 어쩐지 무서워지기도 했다. 조귀는 자수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마음속에 남아있던 일말의 불안과 걱정을 마침내 씻어냈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래서 아씨가 꼭 이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고 했던 거군. 주 노야도 돈이 아까워서 끝내 재판을 진행하지 않았는데. 아씨는 애초부터 이 재판에서 이길 생각이 없었던 거야.
욕심이 없으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말처럼, 이길 생각이 없어야 지는 것이 두렵지 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