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55
교랑의경 355화
어둠이 내린 객잔의 어느 방 안. 팔다리가 묶인 정평이 바닥에 앉아 몸으로 문을 쾅쾅 찧었다.
“이봐요, 이봐.”
정평이 문틈 사이로 힘없이 소리쳤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댁들 아씨는 정신이 드셨소이까? 깼으면 물어보십시오. 분명 그리 말할 테니.”
문밖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었다. 정평의 귀에 그들의 숨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일단 먹을 거라도 좀 주면 안 되겠소?”
물론 대꾸하는 이는 없었다. 정평은 하는 수 없이 몸을 움직여 문에 기대앉은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객잔의 상등 방이었다. 낭자가 언제든 정평을 편히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지 팔을 뒤로 결박하여 마구간이나 나뭇간에 가두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방 안의 장식은 정교하고 아름다웠으며 온기가 느껴졌다. 탁자 위에는 차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그래도 얼어 죽진 않겠군.
정평은 몸을 움직여 탁자 쪽으로 갔다. 차 주전자에 입을 대고 차를 마시려 해 보았다. 움직임이 불편한 탓에 사레가 들리면서 몸으로 차를 조금 쏟긴 했지만, 정평은 싱글벙글 웃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훌륭하군, 훌륭해. 좋은 차야.”
정평은 입을 대고 차를 마저 마셨다.
기뻐하는 정평과 달리 저쪽에선 아낙들이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으로 약을 들고 왔다. 시종 둘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어때요? 깨어나셨어요?”
아낙들의 물음에 시종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또 의원을 부르러 갔습니다. 집에도 연통을 했고요.”
시종들이 말했다.
“너무 세게 내리친 건 아니에요?”
세랑이 물었다. 시종 하나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당황하여 강도를 제대로 조절 못 한 탓에, 아씨께서 아직도 안 깨어나시는 건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원!”
아낙들은 한숨을 내쉴 뿐 시종들을 나무라진 않았다. 당시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까.
아낙들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휘장 뒤에 있는 침상에 반듯이 누워 잠들어 있었다.
“삼랑, 이럼 약을 먹일 수가 없잖아.”
세랑이 말했다. 삼랑도 달리 도리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의원 말로는 괜찮다잖아. 깨어나면 약을 먹이고, 깨어나지 않으면 안 먹여도 된댔어. 괜히 사레 걸리면 더 안 좋다고.”
두 아낙은 수심에 잠긴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분명 잘 지내셨는데.
“이게 다 그 사기꾼 때문이야!”
세랑이 분통을 터트렸다.
“목숨이 없는 사람이니 뭐니 하는 바람에, 이 꼴이 됐잖아.”
하지만 삼랑은 맞장구를 치는 대신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근데, 좀, 이상하긴 하잖아.”
삼랑이 불쑥 입을 열자, 세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사실, 어렸을 때 바보였다지만, 지금 아씨를 봐. 어디 바보 같아?”
삼랑이 나지막이 소곤거리자 세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모로 보나 언행으로 보나 바보는 아니었다.
세상에 저런 바보가 어디 있나. 저런 사람이 바보라면 우리 같은 사람은 뭐가 돼!
“나았다지 않았어?”
세랑이 물었다.
“바보의 병도 낫는단 말이야?”
삼랑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혹시 귀신에 들린 건 아닐까? 듣자니 귀신에 씌었다가 들키면 귀신이 도망친대. 귀신이 도망치면 그 사람은 죽는 거지. 아까 낮에 봤잖아. 꼭 정신줄을 놓은 사람처럼 구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랑은 낯빛이 새하얘지며 손을 들어 삼랑을 때렸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무슨!”
세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삼랑도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방은 어두웠고, 창문 틈새로 바람이 들어오면서 휘이잉 소리를 내는 바람에 한층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드, 등불을 켜자.”
삼랑의 말에 세랑은 얼른 등불을 켰다. 등잔 몇 개에 불이 들어오자 방 안은 한결 따스해 보였다. 두 사람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의원이 왔습니다.”
문밖에서 시종의 말이 들리자 두 사람은 얼른 일어났다. 약상자를 든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이 많아지자 아낙들은 불안감이 다소 가시는 듯했다. 막 입을 열려는데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어요, 난 괜찮아요.”
등불을 들고 자리를 안내하던 삼랑은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소리를 질렀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비명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밖에 있던 시종들도 남녀유별을 따질 계제가 아닌지라 얼른 달려 들어왔다.
“아씨, 아씨, 제가 잘못했어요.”
아낙들이 황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올렸다.
아씨께서 깨어 계셨구나. 그럼 우리가 나눈 말도 분명 들으셨을 텐데.
아이고, 이 아둔한 것아. 뒤에서 남의 얘기를 할 때도 들킬까 봐 겁을 내는 법인데, 대놓고 떠들어 댔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괜찮아요. 두 사람뿐 아니라 나 스스로도······ 두려워요. 들어오자마자 불쑥 입을 여는 게 좀 그래서 가만히 있었는데, 나 때문에 놀랐나 보네요.”
정교랑이 말했다.
자기가 자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정말이지, 너무······.
두 아낙은 더욱 면목이 없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아씨, 그런 사기꾼이 지껄이는 헛소리 믿지 마세요. 괜찮으실 거예요. 그런 사기꾼들은 입을 털며 먹고 사는 작자들이잖아요.”
그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낙들을 쳐다봤다.
“두 사람이 도와줄 일이 있어요.”
아낙들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내쫓기는커녕 일을 시키겠다니. 포용력이 대단하신 분이야.
“돈을 가져가서 책 좀 사 와요. 무슨 책이든 상관없어요. 많이 사 올수록 좋아요.”
책? 지금?
아낙들은 당황하면서도 얼른 알겠다고 대답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정평은 복도에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에 놔요, 전부 여기에.”
말소리와 함께 물건을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들이 어지럽게 들렸다.
“살살 다뤄요.”
뭐 하는 거지?
정평이 얼른 문가로 다가가 한쪽 눈으로 밖을 내다봤다. 복도에서 사환 두세 명이 급히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손에는 두꺼운 서책 뭉치가 들려 있었다.
책? 이 오밤중에 저 많은 책을 들여온다고?
“밖에 있는 수레에 더 남았어?”
아낙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이걸 다 가져오라니. 아씨께서 다 보실 수는 있으려나?”
아씨?
정평은 몹시 기뻐했다.
그 낭자가 깨어났구나!
“이봐요, 이봐.”
정평이 어깨로 문을 쳤다.
“날 좀 풀어 줄 순 없겠소?”
정평이 계속 소리를 질러대자 누군가가 걸어왔다. 하지만 문을 열지는 않았다.
“풀어 달라고?”
사내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잠자코 있어라. 아씨의 일부터 도와드리고 네놈을 손봐 줄 테니까!”
이 오밤중에 무슨 일?
정평은 문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이미 깊은 밤이라 복도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관두고 일단 잠이나 자자. 일어나서 얘기하지, 뭐.
동녘이 밝아올 즈음, 문을 지키며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낙이 잠에서 깼다. 앞에 있는 다른 아낙은 바닥에 누워 이불을 덮은 채 단잠에 빠져 있었다.
날이 밝겠네.
아낙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주무르고 똑바로 앉아 안쪽을 쳐다보았다. 방문을 열자 안에 단정히 앉은 여인이 보였다.
단정히 앉아 있어!
아낙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설마 밤새 저리 앉아 계셨나?
방 안에는 여전히 등불이 켜져 있었다. 어젯밤에 사 온 책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탁자 위에도 책이 흩어져 있고, 여인은 그 가운데 단정히 앉아 있었다.
여인이 책을 펼쳐 본 건 아니었다. 여인의 앞에 놓인 책 한 권은 어젯밤에 보던 그 책이었고, 나머지 책들도 여전히 원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늘빛이 밝아오면서 밝게 빛나던 등불은 차츰 어두워졌다. 그 바람에 방 안은 도리어 어두워졌다. 여인도 생기를 잃어 한층 침울해 보였다.
아낙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았다. 무언가 꽉 막힌 느낌이었다.
정처 없이 걷고, 소리 없이 울고, 바닥에 쓰러져 울부짖던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저리 멍하니 넋을 놓고 앉아 있는 모습에 비하면 그건 괴로운 것도 아니었네.
진정 괴로울 땐 마음이 다 타 재만 남은 듯한 저런 모습이 나타나지. 정말 그 사기꾼 말대로, 그래서 그런 걸까?
삼백 년이라······.
인생이란 찰나와 같은 것이라,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갈 뿐이었다. 그녀는 생사의 순간에 삼백 년 가까운 시간을 뛰어넘었다.
대주(大周) 건원(乾元) 6년.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서책을 펼친 다음, 책에 기록된 머리말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이었다.
익숙한 것은 그 시대가 기억 속에 있어서였고, 낯선 것은 생생한 느낌 때문이었다. 과거에 읽었던 책도, 서가에 꽂혀 있는 진귀한 고서도 아닌데.
대주, 건원 6년. 건국 후 칠십 년도 채 안 된 지금은 네 번째 황제인 중종(中宗)의 재위 기간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살던 곳에서 대주 황족 방씨는 이미 몰락하여 전부 죽고, 뒤를 이은 대경(大慶) 역시 어린 마지막 황제가 갑작스레 병사하면서 사분오열하여 와해됐다. 이어 전화 속에 살아남은 성벽의 잔해 위에 새 나라 대량(大梁)의 깃발이 꽂혔다.
정교랑은 멍하니 손을 꼽아 보았다.
그게 294년 이후의 일이구나. 그때 정씨 일족도 멸문의 화를 입었고.
정교랑이 손을 떨구며 탁자를 붙잡았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가늘고 긴 손가락이 새하얘졌다.
이럴 수가. 강주 정씨가 그런 멸문의 화를 입다니. 십 년이나 양(楊)씨 가문을 도와 함께 싸웠는데, 결국······.
“아방, 아바마마께서 퇴위하시면 태사국에서 우리의 책봉일을 택할 거야!”
“경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경하드립니다, 황후마마.”
정교랑은 탁자를 잡고 소리 없이 웃었다.
우습구나, 우스워.
가장 가까웠던 이가 친히 내린 명에 그녀는 온몸에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가 됐다. 그 사람은 제 손으로 직접 그녀의 심장을 파내기도 했다.
우습구나, 너무나도 우스워.
대량의 사황자, 양산!
대량, 양씨!
새가 없어지면 활이 소용없어 활집에 넣어 둔다지만(蜚鳥盡良弓藏), 양씨 가문의 천하가 안정을 찾은 지 얼마나 됐다고 정씨 가문에 칼을 휘두르지?
건국 초기엔 나라를 안정시키고 논공행상을 해야 마땅한데, 정씨 가문에 칼을 휘둘렀다?
난세로 어수선하고 나라가 바뀔 때에도, 강주 정씨는 수백 년간 자리를 지켜왔다. 명성이 자자한 점술가의 일족으로서 대대로 제왕의 존경을 받았으며, 가주(家主)는 대대로 태사국(太史局)을 관장해 왔다. 하늘을 보고 땅을 살피며 날씨를 예측하고 책력을 만들고 역사를 편찬했다.
그게 바로 천하에 명성을 날린 강주 정씨요,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낸 명문 정씨였다.
유서 깊은 정씨 가문이 그렇게 망하다니!
가산을 몰수하고 멸문에 처해라! 고양이 한 마리, 개 한 마리도 남겨 두지 마라!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모조리 불살라 버려라!
불태우고 심장을 꺼내 삶아라. 혼을 갈기갈기 찢고 영을 없애 버려라. 흔적도 없이 지워 버려!
없어! 이젠 없다고! 전부 없어졌어!
정씨 가문이 없어졌어! 정씨는 이제 없어!
정교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던 아낙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아씨······.”
정교랑은 아낙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곧장 밖으로 나갔다.
“그 사람 어디 있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지금 어디 있죠?”
그 사람?
아낙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멈칫했다가 곧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대답했다.
“사기꾼이요? 옆방에 있어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바닥에 잠들어 있던 아낙도 이내 잠에서 깼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여인의 옷자락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야?”
잠이 싹 달아난 아낙이 벌떡 일어났다. 다른 아낙은 잠에서 깬 아낙을 내버려 둔 채 정교랑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아씨!”
복도에 있던 시종들도 놀라 소리치며 똑바로 섰다.
“아냐, 아냐. 난 그냥 좀 걸으려고.”
정교랑이 말했다.
또 그냥 걷는다고?
모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