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7
교랑의경 37화
날이 밝자 밤새 한숨도 못 잔 몸종이 몸을 일으켰다. 어제 아씨의 말을 따르느라 두고 온 쌀과 채소를 생각하자 못내 아쉬웠다. 오늘 밥은 어쩐담?
“걱정할 것 없어. 가져올 사람이 있거든.”
아씨에게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을 때 정교랑은 그렇게 대답했다. 누가? 그 못된 하인 놈이 잘못을 뉘우치고 가져다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휘장 뒤 침상에 있는 정교랑은 아직 자는 중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몸종은 마당에 서서 잠시 하늘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마당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근 낭자, 반근 낭자.”
몸종은 멈칫했다. 이 목소리는……. 잠시 주저하던 몸종은 다가가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문밖에는 관주가 서 있었고, 그 뒤로 각각 쌀과 채소가 담긴 광주리를 든 두 아이가 서 있었다.
역시! 몸종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아씨는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만 바보기는커녕 미래까지 내다보다니. 기쁜 표정을 짓는 몸종을 보며 관주는 우쭐함이 담긴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반근, 어젠 놀랐지?”
관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잠깐 스친 우쭐한 표정을 거두고 두 아이를 앞으로 나오게 했다.
“자, 그만 화 풀고 이 식재료 받아.”
머뭇거리던 몸종은 이들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비켜섰다.
“그런 사람들은 부드럽게 다뤄야지, 강하게 나가면 오히려 반발해. 앞으로는 그런 사람들이랑 똑같이 굴지 마. 저쪽에서 때맞춰 갖다 주는 걸 받아먹으며 사는 처지에 억울한 일 한두 번 안 당하긴 힘들지. 부족한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내가 여기 더 오래 살기도 했고 나이도 더 많으니 먹고사는 일에 대해선 둘보다 잘 알잖아.”
관주는 다정하게 굴며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씨로부터 관주도 가담했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몸종은 관주의 호의가 진심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사람을 너무 무시하잖아요.”
몸종이 툴툴거렸다. 관주에게 하는 말인지 먹거리를 가져왔던 그 하인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일이었다.
몸종은 관주의 곁채를 쓱 둘러봤다.
“도사님은 여기 10년 넘게 사신 거예요? 진짜 고생 많으셨겠네요.”
관주가 고기 한 덩이를 들고 문밖에서 들어왔다.
“고생은 고생인데 그래도 속세의 번잡한 속박에서 벗어나니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어.”
몸종은 구역질이 나는 걸 간신히 참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거 좋은 분들이 주고 간 거야. 가져가서 아씨랑 먹어.”
관주가 말했다. 주고 가긴, 고기 써는 방식이 딱 정씨 가문 부엌 솜씨랑 똑같은데. 역시 이 여인이 음식을 가로챘던 거구나. 몸종은 사양하지도 않고 냉큼 손을 뻗어 받았다.
“출가한 분한테 보살핌을 받게 되네요.”
몸종은 짐짓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출가해서 힘들긴 해도 네 고생에 비하면 낫지.”
관주의 동정 어린 말투에 몸종은 그 위선을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 여인에 대한 믿음은 전달한 셈이었다.
“어머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우리 아씨랑 산책하러 가야 해요. 안 그럼 성을 내세요.”
몸종은 예를 표하는 것조차 잊고 급히 몸을 돌렸다.
“정말 딱하네. 멀쩡한 사람이 바보한테 혹사를 당하다니.”
관주가 뒤에서 혼잣말인 듯 일부러 몸종 귀에 들리도록 말하더니 목소리를 키워 말을 이었다.
“반근 낭자, 부족한 게 있으면 나한테 와서 말해.”
몸종은 손을 내젓고 문가에서 살짝 예를 표한 후 자리를 떴다.
“아씨, 힘드시면 잠깐 쉬시겠어요? 사탕 귤을 가져왔는데 좀 드실래요?”
산길을 걷던 몸종이 정교랑을 향해 예의 바르게 손을 뻗었다. 정교랑은 걸음을 멈추고 몸종이 내민 향낭에서 백설탕이 묻은 알갱이를 꺼내 입에 넣었다. 이곳에서는 산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제 막 새벽을 지난 터라 산길에는 인적이 없었다.
“점심때쯤 되면 사람이 많아져요. 일용품이나 과일을 파는 사람도 있고요. 아씨께서 드신 귤도 거기서 산 건데 저렴해요.”
몸종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그 관주가 얘기하자고 부르면 저 또 가야 해요? 웃는 걸 보고 있자니 너무 거북해요.”
“가.”
정교랑이 말했다.
“하지만 오래 있으면 안 돼. 그 사람이 주는 걸 먹어서도 안 되고.”
몸종은 네 하고 대답했다. 맞은편에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와 정교랑과 몸종은 소리 나는 쪽을 쳐다봤다. 맞은편 산길에서 걸어오던 여도사 셋은 등에 광주리를 멘 채 웃으며 떠들다가 이쪽에 사람이 있는 걸 보고 얼른 웃음을 거둔 후 살짝 예를 표했다.
“산 아래 대현묘관 사람이에요.”
몸종이 정교랑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정교랑은 대현묘관의 일에 대해 잘 몰랐기에 호기심이 일었다. 몸종이 목소리를 낮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정교랑은 생각에 잠겼다.
“산 아래에 대현묘관이 있다고?”
정교랑은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몸종은 정교랑을 부축하며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더니 손으로 어딘지 가리켜 주었다. 녹음 사이로 도관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렇게, 큰 건 아니네.”
정교랑이 말했다.
“우리 도관보다는 크죠. 원래 우리 도관이랑 합치려고 했는데 그 여인이 선수를 쳐서 뺏은 거예요.”
정교랑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대답했다.
“정말, 안타깝네.”
“그러니까요. 신선을 모시는 깨끗한 곳이 그 여인 때문에 이 꼴이 될 일도 없고 말이에요.”
몸종은 열이 받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듯 말했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누군가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노야, 왜 그러세요?”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사람을 살리라고? 몸종은 깜짝 놀랐다. 이 벌건 대낮에 산적이라도 나타난 건 아니겠지?
“가 보자.”
정교랑은 앞장서 가며 말했다. 몸종의 눈과 입과 발에 의지하며 지내던 예전의 정교랑과는 달랐다. 이런 기분 정말 좋아. 몸종은 급히 뒤를 따랐다. 산길을 따라 굽이를 돌자 소리는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대현묘관의 여도사 셋이 벌써 빙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산석 근처에 노인 하나가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옆에 있는 노복은 초조한 마음에 눈물까지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이죠?”
“병이 난 거예요?”
“뱀한테 물렸어요?”
여도사들이 긴장한 듯 물었다. 노복은 노인을 업으려고 애를 쓰며 물었다.
“어디로 가야 의원이 있죠?”
“아이고, 거긴 너무 먼데. 성까지 가야 있어요.”
여도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업는 것을 도와주었다.
“잠깐만요!”
위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들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봤다. 남색 무명천으로 지은 치마를 입은 여인 하나가 손에 향낭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오는 모습이 보였다.
“의원을 찾으러 가다간 시간만 허비할 거예요.”
사람들은 뭔가 대꾸하려 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듯했다.
“낭자께선 의술을 아십니까?”
노복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걸 천천히 먹여 보세요.”
몸종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곧장 말했다.
“몸을 옆으로 눕힌 후 가슴과 배를 쓸어 주면서 귀를 세게 꼬집어 피를 토하게 하면 금방 나을 거예요.”
노복과 여도사 셋은 그 말에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그게 다야?
“그게 다예요, 그럼 곧 깨어나세요. 깨어나시면 급히 가지 말고 좀 앉아 계셔야 해요. 뭘 좀 드시고 가는 게 가장 좋고요.”
말을 마친 몸종은 손에 들고 있던 향낭을 노복에게 쥐여 주고는 뒤돌아 자리를 떴다. 노복과 여도사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몸종은 이미 굽이를 돌아 산길로 사라진 후였다.
“으응? 저기요, 낭자.”
노복이 소리쳤다.
“우리가 좀 전에 저 낭자를 봤을 땐 두 사람이었어요. 어느 댁 낭자가 산책을 나왔나 봐요.”
한 여도사가 말했다. 노복의 손에 들린 향낭으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먹으라고? 노복은 안색이 창백해지다 못해 곧 정신을 잃으려 하는 노인을 보더니 이를 악물고 향낭을 거꾸로 들어 쏟았다. 백설탕에 굴린 호두알 크기의 사탕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우리 노야께선 천지에 부끄러운 일 안 하신 분입니다. 이런 분을 해칠 사람은 없죠.”
말을 마친 노복은 손을 뻗어 노인의 입을 벌린 후 알갱이를 먹였다.
같은 시각 몸종은 이미 정교랑과 함께 소현묘관 문밖에 도착해 있었다.
“아씨, 그 사탕 귤을 먹으면 정말 사람 목숨을 구할 수 있어요?”
궁금한 마음을 꾹꾹 누르고 있던 몸종이 결국 못 참고 물었다.
“목숨이 달린 일도 아닌데, 목숨을 구했다고 할 순 없지.”
정교랑은 말을 이었다.
“그냥 가벼운 병세일 뿐이야.”
“그럼 사탕 귤이 약도 되는 거예요?”
몸종은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었다.
“찐빵은 약일까?”
정교랑은 몸종을 보며 물었다.
“찐빵은 당연히 약이 아니죠.”
몸종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배가 고파 죽기 직전일 땐, 그게 바로 목숨을 구하는 약이야.”
정교랑이 말했다.
“아씨, 절 놀리느라 그리 말씀하셨군요.”
몸종은 웃으며 정교랑을 부축해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말씀하시면 되잖아요. 저 어르신은 병이 난 게 아니라 배가 고팠던 거라고요.”
“아니지.”
정교랑은 말을 이었다.
“배가 고픈 것도 병이거든.”
몸종은 풉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 일에서 관심을 거두고 문 뒤에 쌓여 있는 장작을 쳐다봤다.
“우리 땔감 다 떨어졌어요. 이걸 옮기면 되겠네요.”
몸종은 몸을 구부려 장작을 주우며 말했다.
“어린 낭자가 장작을 옮기면 쓰나. 낭자가 이렇게 몸 쓰는 걸 좋아해서야, 원. 내가 할게.”
장난기 섞인 사내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몸종이 화들짝 놀라 쳐다보자 정교랑도 따라서 고개를 돌리고 쳐다봤다. 언제나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던 가리개를 이제는 걷어 올리고 다니던 터라 정교랑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저리 고운 외모라니! 사내는 손에 들고 있던 멜대를 꽈당 소리가 나도록 떨어뜨린 채 넋을 놓고 정교랑을 바라봤다.
몸종은 상대가 그날 관주의 마당에서 마주쳤던 사내임을 알아봤다. 어린 나이였지만 대갓집에서 자란 터라 세상 물정을 일찍 터득한 몸종은 이 사내와 관주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알았다. 이런 놈은 인성이 쓰레기지. 그날도 날 대놓고 훑어보더니 오늘은 아씨를 저렇게 보네.
몸종은 뒤돌아 총총 걸어가 정교랑의 가리개를 내려뜨려 준 다음, 장작을 내버려 두고 정교랑을 부축해 다른 한쪽에 있는 자신들 거처 마당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노복은 여도사 둘과 함께 조심스레 노인을 부축해 처마 아래의 짚방석 위에 앉혔다.
“피를 닦아야 하지 않을까요?”
한 여도사가 노인의 양쪽 귀에 남은 핏자국을 보며 긴장한 듯 물었다.
“괜찮소, 괜찮아.”
노인은 천천히 말했다. 소식을 들은 관주가 저쪽에서 여도사와 함께 급히 달려왔다.
“관주님.”
세 여도사는 예를 표했다.
“어떻게 된 거죠?”
관주의 물음에 나머지 사람들이 사정을 설명했다.
“폐를 끼쳤구려.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겠소이다.”
노인이 말했다. 쇠약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기개가 범상치 않았다. 관주는 얼른 예를 표했다. 산을 오르려던 사람이었구나. 관주와 여도사들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현묘관의 명성이 높지 않기도 했거니와 소현묘관의 평판이 형편없는 탓에 이곳 도관을 방문하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말이다.
이 노인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니었다면 절대 이 도관에 발을 들이지 않았겠지. 노인이 신도가 될 가망은 없어 보였지만 관주는 그래도 노인을 극진하게 대했다. 곧 식탁에 정갈한 식사가 차려졌다.
“도관이라 음식이 소박한 편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관주가 말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이다.”
노인도 예의 있게 대답했다. 관주는 노인이 곧장 젓가락을 드는 대신 손에 들고 있던 향낭을 쏟아 안에 있던 사탕을 천천히 입속에 가져다 넣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게 산에서 낭자가 준 환약인가요?”
관주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묻자 노인은 웃었다.
“실은 환약이 아니오.”
노인은 한 알을 더 꺼내 관주에게 건넸다.
“도사님도 드셔 보시구려.”
환약이 아니라고? 그냥 막 먹어도 되나? 여도사들은 내심 놀랐다.
“그럴 수야 없죠.”
관주는 얼른 사양했다.
“드셔 보래도, 어서요.”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좀 쉬고 나니 차츰 기력이 돌아왔다. 나이와 신분이 있는 관주는 자제하며 먹지 않았지만 어린 도동(道童: 도를 닦는 아이) 하나가 호기심을 못 이기고 손을 뻗어 한 알을 받아 들고는 사부의 눈치를 살폈다. 관주가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딱히 나무라지 않자 도동은 안심하고 입속에 넣었다. 입속에 꿀맛이 퍼졌다.
“사부님, 귤이네요!”
도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리자 침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이미 정답을 알고 있던 노인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귤?”
“산 아래에서 파는 작은 귤이요.”
역시 약이 아니었군. 관주는 생각했다.
“사부님, 귤을 이렇게 먹기도 해요?”
“사부님, 귤은 그냥 먹는 거 아니에요?”
당연히 아니지. 부잣집 사람들은 해바라기씨나 호박씨를 먹을 때도 다양한 방식으로 먹거든. 과일 정과를 만드는 방법은 더욱 번잡하고 사치스럽지. 여도사들이 나지막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던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입맛이 까다로운지라 소박한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건 당연지사였다.
“노야, 그 아씨 말씀이 식사를 하셔야 한다고…….”
노인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려고 하자 노복이 얼른 나서서 조용히 말씀을 올렸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