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8
교랑의경 38화
“네가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건 처음 보는구나.”
노인은 노복을 놀리며 손을 뻗어 귀를 만지더니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만평 네놈의 손이 이리 매운 줄은 미처 몰랐다.”
노복은 쓴웃음을 지었다.
“노야, 우스갯소리나 하실 때가 아닙니다. 얼른 식사하시고 바로 의원한테 가 봐야죠.”
“그 낭자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느냐. 그 말은 왜 안 들어?”
노인은 웃으면서도 젓가락을 들어 식사를 계속했다. 여도사들은 전부 자리에서 물러났고 관주만 배석하여 노인이 밥이며 국, 반찬을 싹싹 비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도동이 물을 올렸다.
“차가 없으니 양해해 주세요.”
관주가 말했다. 나도 밖에선 함부로 차를 마시지 않소, 이리 볼품없는 도관에서라면 더더욱 그렇지. 노인은 미소만 지었다.
“괜찮소이다.”
노인은 투박한 도자기 잔에 담긴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기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노인은 작은 도관을 둘러봤다. 푸른 벽돌에 회색 기와를 보니 주인이 공들여 수리한 티가 났지만 낡고 오래된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고, 영험한 기운보다는 저속한 기운이 느껴졌다. 도관이라는 곳도 역시 오가는 사람이 있어야 영험한 기운이 깃드는 법이다.
물을 마신 노인은 또다시 사탕 귤 두 알을 꺼냈다. 잠시 머뭇거리던 노인은 결국 한 알만 먹고 나머지 한 알은 도로 넣은 다음 몸을 일으켰다. 밖에는 벌써 나귀 마차가 당도해 있었다. 노복은 노인이 마차에 오르도록 부축했고, 관주는 제자들을 데리고 나와 배웅했다.
“정말 고맙소.”
노인의 말에 관주는 얼른 답례했다.
“정말 고맙소.”
노인은 한쪽 옆을 향해 공수하며 말했다. 나귀 마차는 천천히 멀어졌다.
“저 어르신은 정말 예의가 바르시네요. 고맙단 인사를 두 번이나 하시다니요.”
도동이 히히 웃으며 말했다.
“두 번째는 우리한테 한 인사가 아니었어. 그 낭자한테 한 인사지.”
한 여도사가 도동의 머리를 쓰다듬고 웃으며 말했다.
“사저, 그 낭자는 어떤 사람이에요. 산에 사는 선인이에요?”
도동은 궁금해하며 물었다. 산나물을 뜯으러 함께 가지 않은 게 몹시 후회스러웠다. 선인을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도동의 말에 여도사들은 저도 모르게 산 위를 올려다봤다. 쨍쨍 내리쬐는 햇빛이 산을 환히 비추는 가운데 나무숲 사이로 숨어 있는 작은 도관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순간 흥이 깼다. 저리 더럽고 불결한 여인이 있으니 선인도 떠나 버리겠지!
몸종이 솥뚜껑을 열자 푹 익은 고기가 솥 안에 들어 있었다. 몸종은 천으로 받쳐 고기를 꺼내고 밥도 한 그릇 담았다. 이어 옆에 있는 독에서 짙푸른 색의 장아찌를 꺼내 접시에 담았다. 몸종은 아궁이의 불이 꺼졌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후에야 쟁반을 받쳐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은 대청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아씨, 식사부터 하세요.”
몸종은 무릎을 꿇고 펼쳐 놓은 책장을 보며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책 보는 거 안 서두르셔도 돼요. 새해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한 쪽은 다 읽으실 수 있을걸요.”
정교랑은 피식 웃었다. 같이 지내다 보니 이 몸종은 예전 그 애처럼 지나치게 조심스럽진 않았고 농담도 곧잘 했다. 따지고 보면 인간관계라는 게 다 이렇다. 낯선 사람이 익숙해지고 익숙했던 사람이 낯설어지고.
정교랑은 젓가락을 들고 고기를 집어 밥 위에 올려놓은 다음 또다시 장아찌를 집어 살짝 섞더니 입에 넣었다.
“그 사람이 관주와 정을 통하는 사내니?”
정교랑이 불쑥 물었다. 아직 시집도 안 간 규수가 이런 말을 입에 올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몸종은 아씨가 이런 쑥스러운 얘기를 꺼낼 줄은 예상 못 했다. 더구나 아씨는 오늘 밥은 좀 질다는 말을 하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렇겠죠.”
몸종의 대답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밥을 먹었다.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반근 언니, 반근 언니.”
관주가 거둔 어린아이였다. 몸종이 일어나 나갔다.
“관주님이 잠깐 오래요.”
아이가 쭈뼛쭈뼛 말했다. 몸종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안에 있는 정교랑을 바라봤다. 정교랑은 몸종을 향해 젓가락을 내저었다.
“네, 다녀올게요.”
몸종은 문을 닫고 나가 아이를 따라갔다. 둘이 자리를 뜨자 다른 한 아이가 한쪽에서 고개를 내밀고 좌우를 살피더니 굳은 결심을 한 듯 살금살금 걸어와 문을 반쯤 열었다. 그러더니 무슨 장난을 치는 건지 후다닥 달아났다.
문소리를 들은 정교랑은 고개를 들었지만 반근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잠시 있다가 식사를 계속했다.
“그 몸종을 데려다 밥을 먹는다고 해서 날 내쫓을 것까진 없잖아. 같이 먹으면 좀 좋아.”
사내는 뒷문으로 불쑥 들어오며 답답한 듯 투덜거렸다.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도 있고 말이야. 난 아직 배불리 먹지도 못했는데.”
사내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반쯤 열린 문을 쳐다봤다. 그 바보 낭자가 사는 곳이네. 바보 낭자라는 단어가 떠오르자 이른 아침에 보았던 생전 처음 본 눈부신 미모가 사내의 눈에 언뜻 스쳤다. 무엇보다도 바보란 말이지. 바보, 아무것도 모르는.
호흡이 가빠진 사내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가을인데도 온몸이 후끈 달아오른 통에 사내는 옷섶을 풀어헤쳤다. 털이 무성하고 까무잡잡한 가슴이 드러났다. 사내는 문이 반쯤 열린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낭자.”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청 안을 쳐다봤다.
“우리 강주성 생선이 엄청 유명하거든. 예전에 물이 많을 땐 우리 집 대문 밖에 나가 아무렇게나 낚싯대를 던져도 고기가 잡혔다니까.”
관주는 방금 식탁 위에 차려 놓은 싱싱한 생선을 가리키며 열심히 떠들어댔다. 몸종은 아, 하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희 아씨는 식사했지?”
관주가 물었다.
“네, 지금 들고 계세요.”
몸종은 걸음을 옮기려 했다.
“별일 없으시면 아씨 시중들러 갈게요.”
“에이, 어차피 혼자 먹으니까 혼자 먹게 둬. 자, 이리 앉아. 여기서 나랑 같이 먹자.”
관주는 웃으며 젓가락을 건넸다.
“매일 남이 먹다 남은 음식이랑 찬밥만 먹다니 딱해라.”
“아니에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주님.”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에 문밖에서 아이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언니, 장작 어디 있어?”
“아저씨가 가지러 가지 않았어?”
“아, 그래? 나 반근 언니네서 아저씨 봤는데.”
“반근 언니네 먼저 가져다주나 보지. 기다려 봐.”
두 사람은 방에서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가 곧 안색이 싹 변했다. 몸종이 먼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왔다. 초조한 마음으로 급히 걸음을 옮기던 몸종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문을 나서기도 전에 벌써 눈물범벅이 된 몸종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관주 역시 곧바로 뒤따라 나오더니 손을 들어 마당에 서 있던 아이 하나의 따귀를 때렸다.
“망할 것, 왜 아저씨를 안 불렀어!”
아이를 혼낸 관주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이 망할 놈이 누구 신세를 망치려고!
“낭자, 내가, 같이 놀아 줄까? 나비를, 잡아 주면 어때?”
사내는 대청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단정히 앉아 밥을 먹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품이 넓은 수수한 옷차림에 가지런히 풀어 놓은 흑발은 어찌나 풍성한지 바닥까지 닿았다. 소녀는 조용히 젓가락을 들며 이쪽을 쳐다봤다.
바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와 같다. 마을에서도 그런 바보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저 먹고 놀며 멍청하게 웃는 것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돌멩이를 주며 얼렀더니 사탕인 줄 알고 먹다가 이가 빠진 일도 있었다.
“이 오라비가 사탕 줄게. 사탕 먹지 않을래?”
사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마침내 회랑 아래까지 왔다. 소녀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일수록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사내는 나무 난간을 짚고 엉거주춤 앉아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눈앞의 소녀는 입을 씰룩이며 웃는 듯했다. 웃는 거야? 웃었지? 역시 이 방법이 잘 통하네!
사내는 목이 탔다. 이 해맑은 소녀에게선 다른 바보들처럼 역겨운 느낌이 전혀 안 드네. 그냥 보기만 하는 건 안 되겠어. 사내는 입술을 핥았다.
“낭자, 이 오라비한테 사탕이 있거든. 먹을래?”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사내는 몸이 달았다. 사타구니 밑이 불끈 솟자 사내는 한 손으로 잡고 주무르면서 다른 한 손으로 섬돌을 짚더니 훌쩍 뛰어 올라왔다. 대청 안의 정교랑은 입에 넣고 있던 젓가락을 천천히 빼 손에 쥐고는 사내를 조용히 바라봤다.
문밖에서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렸지만 사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사내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미 대청 안으로 들어선 사내를 본 몸종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더니 옆에 있던 빗장을 들고 달려들었다. 몸종은 말도 나오지 않는지 비명만 내지르며 사내를 향해 무작정 달려들었다.
흠칫 놀란 사내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연달아 두 대를 맞았는데 여자라 힘이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그 광기 어린 모습은 놀라기에 충분했다. 사내는 얼른 물러났다.
“오해야, 오해. 난 장작을 가져왔는데, 이 바보가 날 불렀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해서 들어온 건데.”
사내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여전히 이성을 잃은 몸종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 망할 놈을 패 죽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겁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사내도 부아가 치밀었다. 어차피 조만간 내 노리개가 될 계집인데, 조그만 게 어디서 이리 방자하게 굴어! 사내가 잽싸게 손을 놀려 빗장을 낚아챘다.
“망할 년, 맞아야 정신을…….”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가에서 여인의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또 들렸다.
“황이낭, 지금 뭐 하는 거야!”
관주는 아이에게 소리치는 시늉을 했다.
“어서 정씨 댁 대노야와 이노야께 알려라. 감히 정씨 가문에 행패를 부리는 놈이 있다고!”
사내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래, 여긴 정씨 가문의 소유였지! 상대는 정씨 집안 아씨고,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는 아랫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측실 소생도 아닌 정실부인의 혈육 아닌가! 이 일이 새어 나갔다간 맞아 죽을 터였다.
“오해입니다, 오해요. 내가 말했잖아요. 내가 여길 지나는데 이분이 부르길래 무슨 일인가 하고 들어와 본 거라니까요!”
사내는 높이 쳐들었던 빗장을 바닥에 확 내던지고는 억울하다는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빗장을 빼앗기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던 몸종은 울면서 사내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관주가 얼른 몸종 앞을 막아섰다.
“황이낭, 앞으로 장작 가져올 필요 없으니까 당장 꺼져!”
관주는 사내에게 소리치고 나서 몸종을 달랬다.
“겁낼 것 없어, 내가 있잖아.”
네가 있어서 이런 일이 생긴 거잖아! 몸종은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미처 방어하지 못한 관주는 깜짝 놀랐고 머리채와 얼굴을 붙잡혔다.
“미쳤네, 미쳤어. 얼른 얘 좀 말려.”
관주가 소리쳤지만 사내는 이미 도망친 후였고, 아이들은 겁을 먹은 채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몸종에게 붙잡힌 관주는 여기저기 찢기고 뜯긴 후에야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미 이성을 잃은 몸종을 보고 관주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너희가 잘 지켜보고 위로해 줘. 난 저놈 도망갔나 보고 사람 불러올 테니까.”
관주가 나가자 두 아이도 겁을 먹고 재빨리 도망쳤다. 몸종은 쫓아가려다가 힘이 쭉 빠진 듯 몇 걸음 못 가고 넘어져 대성통곡을 했다.
이런 엄청난 소동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정교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느릿느릿 밥을 먹었다. 정교랑은 식성이 까다로워 좋아하지 않는 음식은 입에도 안 댔지만, 입맛에 맞는 음식이 있으면 싹싹 비우곤 했다. 정교랑이 마지막 밥풀 하나까지 다 먹었을 즈음 몸종이 울며 비틀비틀 걸어왔다.
“아씨, 아씨, 아무 일 없으셨죠?”
몸종은 울면서 묻다가 퍼뜩 생각했다. 일이 있고 없고가 다 무엇인가. 규방 여인이 이런 취급을 당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수치인데 정말 꼭 ……을 당해야 일이 있는 것일가? 몸종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바닥에 머리를 쾅쾅 찧으며 절을 올렸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어요.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몸종은 울며 잘못을 빌었다.
“반근!”
정교랑이 소리치자 몸종은 눈물범벅인 얼굴로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아씨, 하실 말씀, 있으세요?”
“밥 더 줘.”
정교랑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릇은 싹 비워져 있었다. 몸종은 그릇을 하나씩 거두고 국물을 한 그릇 올려놓았다.
“아씨, 배즙이에요.”
몸종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정교랑은 손을 뻗어 숟가락으로 천천히 떠 먹었다. 몸종은 옆에서 또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씨, 우리 돌아가요. 우리 돌아가서 노야와 부인께 말씀드려요. 못 돌아가게 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어리석은 소리.”
정교랑이 말했다. 간신히 나왔는데 뭐 하러 돌아가.
“저 천박한 연놈이 너무 가증스러워요. 너무 가증스럽다고요!”
우느라 눈이 퉁퉁 부어오른 몸종과 달리 정교랑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맷돌로 갈아 만든 배즙은 어찌나 투명한지 고개를 숙이면 배즙에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 아래로 먹물처럼 진하고 긴 눈썹과 함께 더욱 심원해 보이는 두 눈이 드러났다.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살려 둬선 안 되지.”
정교랑은 고개를 들어 몸종을 바라보며 물었다.
“반근, 너한테 시킬 일이 있어. 할 수 있겠니?”
반근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소인더러 나가 죽으라 하셔도 소인은 할 거예요.”
정교랑은 입을 오므리며 피식 웃었다.
“왜 네가 나가 죽어? 죽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