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84
교랑의경 384화
반면, 귀비는 휘장을 홱 치우면서 성을 냈다.
“유비(劉妃)가 고의로 그런 게야. 우리가 그 바보를 잊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게지? 어쩜 분위기가 좋다 싶을 때마다 그 얘기를 꺼내!”
궁녀와 내시들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숙혜(淑慧) 공주가 그만큼 컸는데, 제대로 가르칠 때도 되지 않았나? 하긴, 천한 도자기 장인 가문 출신의 유비 밑에서 뭘 배우겠어. 당장 숙혜 공주를 주(朱) 현비(賢妃)의 거처로 옮기라 하여라. 거기서 교양이라도 쌓게.”
태후의 슬픔이나 귀비의 불쾌함은 대황자의 기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는 서재에 앉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경서 한 편을 외워냈다. 스승이 감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자, 대황자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이제 더는 누군가와 비교당하지 않아도 되고, 그 빌어먹을 지도도 보지 않아도 돼. 끝이 없을 것 같던 꾸중도 없어졌고, 모두가 다 날 좋아하고 내게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어. 이것이야말로 바로 내가 누려야 했던 나날들이야.
이런 날들만 있으니 얼마나 좋아.
그 애가 없어지니 모든 게 다 좋아졌어. 그 애가 없어진 뒤에야, 나는 최고가 된 거야.
“스승님, 어제 했던 공부를 복습하고 싶습니다. 아직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몇 군데 있어서요.”
대황자가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쳐앉은 뒤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陳)씨 가문의 식구들은 피서를 위해 한 달 동안 교외에 있는 저택에서 지내기로 했다.
“십팔랑, 십팔랑.”
진단랑이 마당 안으로 쪼르르 뛰어 들어왔다. 해가 지난 뒤, 키가 부쩍 자란 진단랑은 예전보다 행동이 좀 더 성숙해졌다. 진단랑이 뛰어다니는 모습도 더 이상 예전처럼 우스꽝스럽지 않고, 나비 한 마리가 나풀거리는 듯 생동감이 넘쳤다.
진십팔랑의 마당에 있던 여종과 몸종이 서둘러 진단랑을 부축하며 맞이했다.
“단랑 아씨, 아씨께서는 지금 글씨 연습을 하고 계셔서 방해하면 안 돼요.”
여종들이 나지막이 고했다. 진단랑은 아, 하고 대꾸하고는 아쉬워하며 목을 빼고 창문을 향해 말했다.
“날이 이렇게 더운데, 글씨 연습만 해서 뭐 해? 할아버지께서 밥 먹으러 나가자고 하시던걸.”
진단랑이 까치발을 하며 안쪽을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서재의 창문은 열려 있었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단정하게 앉아 있는 진십팔랑의 모습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그녀는 짙은 색 저고리를 입고, 뒤로 묶은 머리카락에 아무런 장신구도 꽂지 않고 있었다.
오늘날, 이런 그녀의 모습은 진씨 가문 십팔랑을 알아보는 표식과도 같아졌다. 진십팔랑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항상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딜 가나 단번에 진십팔랑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말소리가 들리자, 진십팔랑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는 괜찮으니 할아버지랑 같이 다녀와. 아직 두 장 더 써야 해.”
진단랑이 회랑 아래서 서재 안쪽을 훑어보았다. 서재의 벽과 바닥에는 온통 글씨가 쓰인 종이로 가득했다.
“언니, 글씨 쓰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이미 충분히 잘 쓰는 것 같은데?”
진십팔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정중앙 서화판 위에 걸린, 크게 쓰인 몇 글자를 쳐다보았다.
– 연습만 많이 하면, 낭자처럼 좋은 글씨를 쓸 수 있을까요?
– 아니요. 때로는 타고나야 해요.
타고나야만 한다고?
진십팔랑은 입술을 꾹 다물고 붓을 들어 천천히 글씨를 써 내려갔다. 진단랑이 무료한 듯 다시 물었다.
“진짜 안 가게? 태평거에 간다는데.”
진십팔랑이 멈칫하고는 붓을 거두었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단랑, 아직 정 낭자를 기억하니?”
진십팔랑의 물음에 진단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작년의 열렬한 반응과는 달리, 한풀 꺾인 듯한 반응이었다. 어린아이의 기억은 짧아 말 몇 마디를 나눴던 사람과 가까이 지냈던 사람을 또렷이 구분하지 못했다. 작별하고 석 달만 지나도 기억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정 낭자가 경성을 떠난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네.
어머니 말씀으로는, 강주에서도 떠났다던데. 정 낭자는 지금쯤 어디서 방랑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돌이켜 생각해보니, 정 낭자는 올 때나 갈 때나 흔적 하나를 남기지 않았네. 어린 단랑은 관두고, 당장 나만 해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졌어. 마치 애초에 정 낭자라는 사람이 경성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언니, 그래서 가는 거야 마는 거야. 같이 안 가면, 두부도 안 사 올 거야.”
진단랑의 목소리가 진십팔랑의 생각을 멈추게 했다.
두부, 태평거, 신선거, 그리고 차정사의 글씨들.
아니야.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니야. 정 낭자는 존재했던 것뿐만 아니라, 많은 발자취를 남겼어. 다른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정 낭자가 남긴 발자취를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때때로 정 낭자를 떠올리겠지.
올 때는 갑작스러웠지만, 갈 때는 담담했어. 짧은 일 년 동안, 경성에 이렇게나 많은 발자취를 남기다니. 경성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풍랑에 그 여인의 흔적이 남아 있어. 정 낭자를 모르는 사람들은 죽어도 그 여인을 알 수 없겠지만, 그 여인을 아는 사람들은 평생 그 여인을 잊을 수 없을 거야.
진십팔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혼자 가서도 먹을 수 있거든? 어서 할아버지 모시고 가. 너무 많이 먹다 체하지 말고. 그러다 뚱뚱보 된다.”
올해 일곱 살이 된 진단랑은 자신만의 미적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진단랑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코끝을 문지른 후 어깨를 으쓱하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여름의 신선거는 태평거보다 다소 썰렁했다. 하지만 신선거가 썰렁하다고 해서, 이 집이 곧 문을 닫네, 마네 같은 걱정을 하는 이는 없었다.
시녀는 장부를 쳐다보면서 한 손으로 분주하게 산가지를 놓으며 셈을 했다. 시녀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로 춘령에게 물었다.
“사공자께서 다음 달에 강주로 돌아가신다고? 갑자기 왜?”
시녀의 반대편에 앉은 춘령은 그녀가 손을 멈추지 않고 동시에 세 가지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며 감탄하느라 물음을 듣지 못한 듯 보였다. 고개를 들었다가, 넋이 나간 춘령의 모습을 본 시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물었다.
“반근 아씨, 진짜 일을 잘하시네요.”
춘령은 대답 대신 감탄을 뱉었다.
“아씨는 무슨. 난 너랑 같은 아랫것일 뿐이야.”
시녀가 말했다.
“아니에요, 같을 수가 있나요!”
춘령이 화들짝 놀라면서 두 손을 세차게 저었다.
“저처럼 저급한 것이 어떻게 아씨와 같을 수 있겠어요.”
“저급한 것은 무슨. 네가 거기로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잖아. 원해서 간 게 아니라면, 너는 깨끗한 몸이야. 그리고 아씨라고 부르지 마. 내가 모시는 아씨도 있는데, 그런 호칭은 도리에 어긋나.”
시녀의 단호한 태도에 춘령은 민망한 듯 알겠다고 대답했다.
“사공자 말씀으로는 강주 선생께서 입조하셔야 해서 한동안 학당을 닫아야 한대요. 2년 뒤에 과거 시험을 칠 때쯤 다시 여신다던데요.”
춘령이 뒤늦게 시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겠네. 노야께서 맡으신 일이 하나 더 늘었다고 하던데.”
시녀는 사환을 불러 정사낭이 타고 갈 말과 마차를 빌리고 선물을 준비하라 일렀다. 그러고는 사환에게 돈이 부족한지 물었다.
“혹 부족하면, 일단 아씨 몫에서 좀 떼서 공자님께 드려.”
“차용증을 써둘까요?”
사환이 우스갯소리로 물었다. 반년 동안 정사낭에게 들어간 돈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에이, 그 정도도 내 마음대로 못해? 차용증은 무슨.”
시녀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옆에 있던 춘령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를 쳤다.
“맞아, 맞아. 다 반근 언니가 여기서 힘들게 일한 덕분에 번 돈인데, 마음대로 쓰지도 못해?”
시녀가 춘령을 쳐다보며 나무랐다.
“그 말도 틀렸어. 이건 내 덕이 아니야. 다른 사람이 깔아 준 사다리 덕분에 지붕 위로 올라오게 된 건데, 그걸 어떻게 내 공이라고 해? 사람은 자신의 본분을 잊으면 안 돼.”
“아, 맞아요, 맞아요. 덕승루에 있긴 하지만, 우리 아씨께서 나한테 엄청 잘 대해 주시거든요. 그러니 난 성심을 다해 아씨를 잘 모실 거예요. 반근 언니, 이게 바로 본분이라는 거죠?”
춘령이 눈망울을 크게 뜨고 진지하게 물었다. 시녀는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고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춘령은 헤헤 웃으면서 몸을 일으키고 신선거를 나왔다.
밖으로 나온 춘령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걷혔다. 춘령은 시기와 미움이 섞인 눈빛으로 신선거를 돌아보았다.
어쩜 저렇게 씨알도 안 먹힐까. 그 여인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저리도 충직한 개가 되려는 거야?
* * *
영화 원년 10월 말.
7월에 경성을 떠나, 함께 공부하던 학형들을 만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방문했던 정사낭은 드디어 강주 근처에 다다랐다. 며칠 전부터 마중하러 나와 있던 정씨 가문의 사람들이 기쁘게 그를 반겼다.
정사낭의 마차를 본 정씨 가문의 집사는 흠칫 놀랐다. 정사낭이 타고 온 마차가 무척 고급스러웠기 때문이다. 몇 개월을 타고 다녔을 마차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새것처럼 보였다. 또 집사는 그 마차를 만드는 데 쓰인 재료가 모두 최상급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끌고 온 마차를 쳐다보았다. 정 대부인은 정사낭이 타고 다니던 마차가 너무 오래되어서 사람이 앉을 수도 없을 지경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집사에게 좋은 마차를 골라서 마중 나가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집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꾸민 마차를 끌고 왔지만, 정 사낭이 몇 개월 동안 타고 다녔던 마차보다 뒤지는 느낌이었다.
정사낭은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여 집사가 끌고 온 마차로 갈아탔다.
반나절이 지나자, 정사낭이 탄 마차가 강가에 도착했다. 집이 점점 가까워오자, 흥분한 정사낭은 마차 휘장을 들어 올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집을 떠난 지 어언 일 년이 넘었구나.
이렇게 오랫동안 집을 비운 것이 난생처음이었던 정사낭은 휘몰아치는 향수에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모든 게 익숙하게도, 낯설게도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정말 낯설긴 하네.
문 앞을 지키는 사환을 보면서 정사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없어졌잖아?
필요에 따라 집안 하인들을 바꾸는 건 지극히 정상적이었기에 그는 잡생각을 떨치려 했다. 하지만 마당으로 들어선 정사낭은 다시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춘란이 여기 없다고?”
정사낭이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가까이서 자신의 시중을 들던 몸종이 바뀌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사낭은 불안해하며 시선을 피하는 몸종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설마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춘란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그럴 리가 없는데. 춘란은 항시 내 곁에 있으려 무슨 일이든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성격이야, 그런 애가 잘못을 저리를 리가 없어.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정사낭이 그제야 몸종에게 물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대문을 지날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아 보이는 듯했지만, 보면 볼수록 어딘가 익숙하지 않았다.
쇠락.
맞아, 가문이 쇠락한 게 틀림없어.
등골이 서늘해진 정사낭은 몸을 움찔거렸다.
“대노야께서 병에 걸리셨습니다.”
몸종들은 더는 숨기지 않고 무릎을 꿇으며 사실대로 말했다.
도대체 어떤 병에 걸리셨길래 집안이 이렇게 쇠락한 거지?
정사낭은 혼절할 뻔한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씻지도 않은 채 정 대부인의 거처로 달려갔다.
정 대노야는 이제 자신의 힘으로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지만, 몸을 가누는 건 여전히 힘들어 보였다. 그런 정 대노야의 모습을 본 정사낭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통곡했다. 옆에 있던 여종들이 정사낭을 다독이면서 그를 일으켰다.
“지금은 몸이 괜찮아져서 따로 네게 알리지 않은 것뿐이다. 강주 선생께 가르침을 받는 기회가 얼마나 귀한데,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오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정 대노야가 말했다.
정사낭은 참았던 눈물이 또다시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 내어 울지 않으려 애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형제자매들이 정사낭과 함께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정 대부인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자식들을 다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