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87
교랑의경 387화
진안 군왕이 황제를 알현하러 갔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의원은 잘 찾아보았느냐?”
황제의 물음에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나중에는 의원을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는 한쪽에서 족자를 꺼내어 황제에게 건넸다.
“이건 제가 폐하를 위해 준비한 선물입니다.”
황제가 실소를 터트렸다.
“짐에게 줄 선물까지 준비한 것을 보니, 정말로 더는 찾아다니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내시가 진안 군왕이 건넨 족자를 받아 황제 앞에서 펼치자, 황제는 흠칫 놀랐다.
“육가아를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한번은 육가아와 함께 산꼭대기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우연히 일출을 보게 되었습니다. 출렁이는 구름 사이로 햇빛이 서서히 번져 나가는 장관을 마주하게 되었지요. 그때 육가아가 지도 보는 걸 좋아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폐하께서도 지도를 좋아하셨지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워낙 정사로 바쁘시고, 육가아는 아직 나이가 어리다 보니, 높은 산과 세찬 강물이 흐르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많이 보지 못했을 듯싶었습니다.”
진안 군왕이 이어서 말했다.
“그건 제가 직접 그린 것입니다. 현지의 유명한 화공에게 부탁한 것이 아니라요. 그림에는 저마다의 정이 스며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화공의 손을 거친 그림은 그들의 눈에 비친 강산일 뿐이라 생각하여, 제 눈에 보이는 산과 강을 그려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그 장관을 보면서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 폐하께 그림으로 보여 드리고 싶었죠.”
황제가 눈앞에 펼쳐진 화폭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두꺼운 붓으로 그려낸 그림에는 높고 거대한 산이 있었고, 물길이 세차 보이는 강이 있었다. 첩첩산중이 보이기도 했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보이기도 했다.
그림 솜씨가 그리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고, 서투른 붓질이 그림 곳곳에 고스란히 묻어났지만, 그래서인지 그림에는 더욱 생동감이 넘쳤다. 황제는 그림을 들여다볼수록, 마치 자신이 이 산과 강을 앞에 두고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천하라고는 하나, 제대로 볼 기회도 없었다. 황제가 볼 수 있는 곳이라고는 기껏해야 이 황궁뿐이고, 조금 더 멀리 나간다고 해도 제를 올릴 때 지나는 경성의 거리가 전부였다.
분명 그의 천하인데, 이 조그마한 황궁 안에 갇혀있는 신세를 생각하니,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그 역시 자신의 천하를 보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실행은커녕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는 사실만 알려져도 신하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나라가 곧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질책할 터였다.
천자, 천자라······. 천하의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해도, 실상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 천자의 운명이로구나.
황제는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에게 시선을 옮겼다.
황궁을 떠났던 일 년 사이, 수척하고 병약해 보이던 진안 군왕의 얼굴에는 생기가 차오르고, 눈빛에는 광채가 더해졌다.
“정성이 갸륵하구나.”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바로 정성을 들이는 일, 진심이었다. 천하를 가진 천자조차도 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신의 진심이옵고, 폐하께서 오랜 세월 가르쳐 주신 진심이기도 합니다. 육가아를 대신하여 폐하께 효심을 다하고 싶기도 했고요.”
진안 군왕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리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했다.
“황후에게도 가 보거라.”
비록 대신한 것이라 해도, 그 지극한 효심을 보고 싶은 사람이 비단 짐뿐만은 아닐 게야.
진안 군왕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물러났다.
밤색이 짙어진 황궁 안, 진안 군왕의 앞뒤로 내시들이 등롱을 밝게 비추며 조심스럽게 길을 안내했다. 층계 위에 선 진안 군왕이 멀리 있는 궁문을 쳐다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계산해 보려는 듯,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전하, 무슨 셈을 하시는지요?”
진안 군왕의 뒤에 서 있던 내시가 조용히 물었다.
“날짜를 세고 계시는 것이다.”
내시 옆에 있던 다른 내시가 천천히 말했다. 감상에 젖은 목소리였다.
“무슨 날짜요?”
내시가 다시 물었지만, 다른 내시는 대답을 하지 않고 층계 위에 서 있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군왕께서 출궁하실 날짜, 자유의 몸이 되실 수 있는 날짜를 세는 게지.
11월 18일, 바로 오늘. 이 날짜는 내가 군왕과 함께 손가락을 꼽으며 셌던 날이기도 하고, 바라고 또 바라던 날이기도 해. 하지만 작년에도 나가지 못했고, 올해도 그러하구나.
어쩌면, 영영 나갈 수 없을지도.
“궁으로 가자.”
진안 군왕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황궁 안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진안 군왕은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칠흑 같은 밤 속으로 사라졌다.
11월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12월이 되어 새해를 맞이할 때가 되었다.
올해는 황제의 기분도 좋고, 건강도 많이 호전되어 새해를 맞이하는 황궁 분위기가 한층 흥겨웠다. 작년에는 이황자의 사고 때문에 황궁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었지만, 올해는 모든 것이 즐겁기만 했다.
귀비와 대황자가 태후궁 앞에 다다르자, 태후궁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태후의 웃음소리 이외에도 이상한 웃음소리가 같이 들렸다.
대황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전 가지 않겠습니다.”
대황자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렸지만, 귀비가 재빨리 붙잡았다.
“경왕이 있다고 해서 네가 피할 건 또 뭐냐.”
귀비가 눈썹을 치켜뜨고 낮게 호통쳤다.
“그 애를 피하는 게 아니라, 보기가 싫을 뿐입니다. 전 해야 할 일이 많아요. 그 바보와 놀아줄 시간 따위는 없습니다.”
대황자가 성가시다는 듯 대답하고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귀비가 대황자를 몇 번 불렀지만, 대황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사가아가 요즘 점점 더 말을 안 듣네.”
귀비가 말했다.
“마마, 전하께 차츰 주관이 생기시는 게지요. 듣기로는 어제 조당에서 상공 대인, 참정 대인들과 논변까지 하셨답니다.”
내시가 아첨의 미소를 보이며 대황자를 치켜세웠다. 아들을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아진 귀비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귀비가 태후궁 안으로 들어섰을 때, 태후는 경왕에게 손수 탕을 떠먹여 주고 있었다. 먹은 게 반, 흘린 게 반으로 보였지만 태후는 경왕이 반이나 먹었다며 기뻐했다.
“위낭, 네가 보기에는 육가아가 애가를 알아보는 것 같으냐?”
태후가 웃으면서 진안 군왕에게 물었다.
퍽이나 알아보겠네.
귀비는 미소를 띤 채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바보처럼 웃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마마께서 경왕 전하를 그리도 매일같이 돌봐 주셨는데, 당연히 알아보겠지요.”
귀비가 말했다. 진안 군왕은 귀비를 향해 예를 올린 뒤, 경왕을 데리고 물러나겠다고 했다.
“조금 더 있다 가지 뭘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모처럼 둘의 얼굴을 보게 됐는데.”
귀비가 웃으면서 붙잡았지만, 진안 군왕은 입꼬리를 올린 채 가볍게 목례를 하고 경왕과 함께 자리를 떴다.
“자네들이 겁먹을까 봐 저리 급하게 가는 것 아니겠나.”
태후가 귀비에게 말했다.
진안 군왕은 가끔 태후궁을 들르는 것 외에는 항상 자신의 처소에 머물렀다. 태후궁에 들를 때도, 비빈이나 공주들이 태후를 알현하러 왔다는 전갈을 받으면 서둘러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제가 왜 겁을 먹어요. 억울합니다, 마마.”
귀비가 웃으면서 가볍게 말했다. 태후에게 새해와 관련된 일들을 이야기하던 귀비는 태후의 기분이 좋아 보이자 조심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새해가 되는 김에, 진안 군왕이 전에 지내던 바깥 궁을 한번 수리하는······.”
“수리는 무슨. 위낭은 거기서 지내지 않을 것이야.”
귀비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태후가 단호하게 말했다.
“마마, 진안 군왕도 내년이면 열여덟입니다.”
귀비가 태후에게 일렀다.
“열여덟이 왜? 평왕도 서른이 될 때까지 궁에서 살았는데, 그게 뭐 어쨌다는 게야? 누가 또 뒤에서 세 치 혀를 놀리더냐?”
태후가 눈썹을 치켜뜨고 귀비를 흘겨보았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야 진안 군왕을 생각해서 말씀 올리는 거죠.”
귀비가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말했지만 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위낭이 궁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경왕도 위낭만을 따르지 않느냐. 애가는 절대로 위낭을 내보내지 않을 것이야.”
쨍그랑 소리와 함께 귀비가 던진 옥 접시가 산산조각 났다. 문밖에 서 있던 궁녀들은 재빨리 뒤로 몇 걸음 더 물러나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문을 지켰다.
“경왕이 그 애만 따르지 않냐고? 그 애가 없으면 왜 안 되는데?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그깟 바보 수발 하나 못 들까!”
“말씀을 삼가세요, 마마!”
고 전원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귀비는 들끓는 화를 식히려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그 애를 궁에 남겨두는 걸 보니, 마마께 다른 속셈이 있는 거예요. 폐하의 옥체가 많이 좋아지셨으니, 손자 하나를 더 보고 싶은 게죠. 옥체가 좋아지신 지 얼마나 됐다고, 어쩜 그렇게 득달같이 비빈들을 폐하 옆으로 보내는지. 그러다 폐하의 옥체에 무리라도 가면 어쩌려고!”
귀비는 분이 가시지 않은 듯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어 갔다.
“회임한 비빈이 생겼다고 해도, 누가 들으면 웃음거리밖에 더 돼요? 진안 군왕이 올해 열여덟입니다! 다른 집 아들들은 그 나이면 벌써 혼례를 올리고 아비가 됐다고! 이러다가······.”
“마마, 마마! 그런 말씀을 입에 올리시다니요! 목숨을 잃을까 두렵지 않습니까!”
귀비의 말을 듣다 못한 고 전원이 눈썹을 치켜뜨고 귀비의 말을 끊었다.
“내가 하지 않아도, 어차피 누군가의 입에서 나올 말입니다.”
귀비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더 말을 잇지는 않았다. 고 전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 뭘 그리 초조해하십니까. 진안 군왕이 궁 안에 있든 궁 밖에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요. 진안 군왕이 경왕의 시중을 들면서 세상 구경을 시킨 일로 태후와 폐하께서 감동하셨을 순 있겠지만, 얻은 게 있는 만큼 잃은 것도 있습니다. 마마의 말씀마따나 군왕은 벌써 열여덟 살입니다. 한데 공부를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사람 됨됨이가 훌륭한 것도 아니지요. 가만 보면 참 다행입니다, 경왕과 너무도 잘 어울리니까요. 이미 폐인이 된 둘을 뭐하러 염려하십니까? 그들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겁니다.”
귀비가 좀 전보다 누그러진 태도로 한숨을 쉬었다.
“그건 나도 알죠.”
귀비가 팔걸이 의자에 기대면서 말했다.
“그런데 진안 군왕을 보면 마음이 통 편치 않습니다. 그 애의 눈빛은 독사처럼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다고요. 그 애가 아직도 궁에 있다는 생각만 떠올리면, 한시도 마음 놓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술잔에 비친 활의 그림자가 뱀으로 보이는 게로군. 마음속에 다른 꿍꿍이가 있으니, 남들도 자신과 똑같아 보이겠지.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기에 고 전원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평생 저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말고, 되도록 생각도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고 전원은 잠시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두 눈을 번뜩였다.
“군왕이 올해 열여덟이니, 다른 건 몰라도 혼인을 미룰 수는 없을 테지요. 혼례를 올리면 자연스럽게 황궁 안에 남아 있을 수도 없을 거고요.”
귀비도 고 전원의 말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그러네. 혼례를 올릴 나이가 됐어!”
하지만 귀비는 곧바로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폐하와 태후께서 송자동자를 그리 쉽게 놓아줄 리 없을걸요.”
고 전원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에이, 말을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폐하와 태후께서는 자비로운 분들입니다. 군왕이 경왕 전하를 위해 그리 헌신했는데, 설마 이대로 군왕을 평생 경왕의 유모로 살라고 하시겠습니까? 안 그래도 챙겨 줄 사람이 없는 군왕인데, 얼마나 가엾습니까.”
귀비가 고 전원의 말을 곱씹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비의 입꼬리가 점점 더 올라갔다.
틀린 말이 아니야. 군왕도 사내인데, 챙겨줄 사람이 하나 있긴 해야지. 자고로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챙기는 것은 부부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