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93
교랑의경 393화
“대인, 대인!”
용곡성 북쪽에 있던 유규가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뱅글뱅글 돌다가, 지나가던 장수를 보고는 덥석 붙잡았다.
“이제 지원군을 보내도 되죠?”
장수는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유규를 흘겨보았다.
“지원군을 보내긴 개뿔! 당장 제자리로 돌아가라!”
“대인, 하지만 방(方) 시금(侍禁: 관직명)의 부대가······.”
유규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장수는 호통을 쳤다.
“방 시금의 부대가 뭐! 봉화도 올라왔는데, 벌써 도망치고도 남았겠지!”
장수가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떴다. 유규는 초조한 표정으로 장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놈들을 지켜볼 거야. 내가 그놈들을 지켜볼 거라고! 그놈들, 아무 데도 도망치지 못해!”
유규가 중얼거리면서 이를 악물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망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천막 안. 주육낭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천막 안의 모든 시선이 주육낭에게 집중됐다. 주육낭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장수가 그에게 앉으라는 눈치를 줬다.
“육낭, 앉거라.”
총괄로 보이는 관료는 주육낭의 행동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웃었다.
“저 아이가 자네 주씨 가문의 후예인가?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방 시금의 부대는 바로 성보를 버리고 철수하지 않았을 겁니다.”
주육낭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모래로 만든 눈앞의 지형 모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리가 너무 짧습니다. 그쪽에서 봉화를 올리고 전령병을 보냈다지만, 전령병이 오가는 시간은 우리가 준비를 마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이 점은 오랑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방 시금의 부대도 알고 있겠죠. 그러니 그들은 절대 성보를 버리지 않고, 우리를 위해 시간을 끌고 있을 겁니다.”
“전령병의 말로는 오랑캐가 최소 사천이라는데, 성보에 남은 병력은 이천도 안 될 걸세.”
한 장수의 말에 주육낭이 가슴을 펴고 말했다.
“우리 군은 절대 적군이 많다고 해서 겁먹을 사내들이 아닙니다.”
공을 세우려고 혈안이 된 그놈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이건 엄청난 기회야. 너희가 큰 공을 세울 엄청난 기회! 절대로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라! 너희들, 꼭 버텨야 한다!
주육낭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전방에 서 있는 여섯 병사의 손은 끊임없이 화살을 올리고 활시위를 당기며 바삐 움직였다. 성벽 위에서부터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화살들이 성 아래에 있는 방패와 철갑옷들을 뚫자, 아래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무원산 형제들의 궁술이 엄청나군.”
방 시금이 성문 위에서 말했다.
어쩌면 정말 한 시진은 버틸 수 있을 거야.
방 시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앞으로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수하 한 명이 재빨리 화살을 쳐내자, 방 시금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화살은 바닥에 떨어지며 방 시금의 정강이를 세게 쳤다.
방 시금은 화살에 맞은 정강이가 몹시 아팠다.
역시 오랑캐 왕족의 정예병다워. 궁술이 남달라!
말을 타고 괴성을 지르면서 성벽 아래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오랑캐들을 보자, 방 시금은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끝도 없이 펼쳐진 적진을 내다보며 손에 땀을 쥐었다.
어쩌면, 한 시진은 너무 긴 시간일지도 모르겠네.
성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 때문에, 성벽 아래서 공격을 하던 적군이 잠시 물러났다.
서봉추가 호탕하게 웃었다.
“이놈들!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똑똑히 보여 주마! 이따 저것들을 못다 챙겨 가는 게 한이네. 저것만 해도 벌써 공이 몇 개야?”
서봉추가 성벽 아래에 널브러진 오랑캐들의 시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봉추,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딸 수 있는 오랑캐의 목은 차고 넘치니까.”
형제 중 하나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형제들의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 번의 북소리가 들려왔다. 공성전이 또 한 차례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리 작은 성도 뚫지 못한다면 정예병이라고 할 수도 없지.
형제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예병들도 형제들과 같은 생각인지, 조금 전보다 더욱 맹렬한 기세로 휘몰아쳤다.
오랑캐들이 쏘아 올리는 화살 때문에 성벽 위의 병사들은 고개를 들기조차 힘들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어?”
범강림이 큰 소리로 물었다.
“금방입니다! 이제 반 시진 남았습니다!”
반 시진이나?
“오늘따라 한 시진이 무척 길게 느껴지네.”
어떤 병사가 말했다. 병사들은 화살 비가 잠시 멈춘 틈을 타서 재빨리 활시위를 당겨 성벽 아래로 반격했다.
“화살 더 없어? 화살 좀 줘!”
서봉추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자 서봉추는 고개를 돌렸다.
성벽 위에 남아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사령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방 시금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서봉추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 대인이 도망쳤다!”
고개를 돌린 다른 병사들도 텅 빈 사령관 자리를 보고는 절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사령관이 도망갔다는 소리에 성벽 위는 일순간 혼란스러워졌다.
두 병졸은 소식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리고 냅다 도망치려 했지만, 적에게 등을 보인 순간 성벽 아래에서 날아온 돌덩이에 맞아 머리통이 산산조각 났다.
“이 비겁한 놈들아!”
서봉추가 바닥에 쓰러진 병졸들을 향해 포효했다.
“모두 집중해! 지금 도망친다 한들, 저 오랑캐 놈들보다 빨리 도망가지는 못한다고! 우리가 좀 더 시간을 끌어야 해!”
서무수가 혼란스러워하는 병사들을 붙잡고 말했다.
“서 감용, 어떻게 시간을 더 끌라는 말입니까! 지금 남은 병력으로는 역부족입니다!”
다른 병졸이 외쳤다. 서무수는 성벽 아래에 홍수처럼 밀려오는 적군들을 내려다보고, 머리 위로 쉼 없이 날아오는 돌덩이와 화살들을 올려다보았다.
“성에 불을 질러!”
서무수가 말했다.
무자비한 발길질에 창고 문이 부서지다시피 열렸다. 케케묵은 먼지와 낡은 바구니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범강림이 손으로 잡동사니를 치워내면서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여기에 기름이 있나?”
범강림이 외쳤다. 서무수와 다른 세 형제도 창고 안으로 들어와 사방을 헤집으면서 방 시금의 사돈 팔촌까지 싸잡아 욕했다.
방 시금이 도망간 탓에, 성보 안에 남아 있던 병졸들과 잡역부들까지 한꺼번에 달아났다. 잡역부들이 없으니 병사들이 물건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서 서둘러! 불이 붙을 만한 건 모조리 꺼내 와, 시간이 없어!”
범강림이 형제들을 재촉했다. 형제들은 성문 앞에 기름통을 꺼내 놓은 뒤, 주위의 민가와 거리에 기름을 뿌렸다.
“어서 가자!”
기름을 얼추 다 뿌린 듯하여, 범강림은 형제들을 재촉해서 성벽 위로 올라갔다.
병사들은 잠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서무수 일행이 없는 틈을 타 재빨리 달아났다. 성벽 위에 남은 것이라고는, 도망치다 돌덩이에 맞거나 화살에 맞아 죽은 사람들의 시체뿐이었다.
오랑캐들이 성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쿵쿵 울려 퍼지는 충차의 충돌음이 병사들의 심장을 쥐어짰다.
“불을 붙여, 불을!”
범강림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가 손에 쥔 횃불을 아래로 던지자, 기름이 뿌려진 곳이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서무수가 갑자기 성벽 위로 뛰어 올라갔다.
“셋째야, 어디 가는 거야!”
범강림이 소리쳤다.
“아직 한 시진이 안 됐습니다. 우리의 수고가 헛수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올라가서 좀 더 버텨 볼게요!”
서무수가 대답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그는 여기저기 흩어진 쇠뇌를 모아 일렬로 세웠다.
범강림은 어이, 외치면서 서무수의 뒤를 쫓아갔다. 이미 다른 병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앞서가던 서봉추와 형제들도 성벽 위로 오르는 범강림을 보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벽으로 되돌아왔다.
성벽 위에는 쇠뇌 열 개가 놓였다.
“죽어라, 이놈들아!”
서봉추가 외치면서 쇠뇌를 쏘았다.
서무수와 다른 형제들이 나머지 쇠뇌를 쏘자, 활시위가 떨리는 소리와 함께 성벽 아래로 화살이 우수수 쏟아졌다. 오랑캐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고 성벽을 부수던 충차도 잠시 멈췄다.
“가자, 어서!”
범강림이 외치자마자, 서무수가 갑자기 그를 옆으로 힘껏 밀쳤다.
“왜 그래?”
바닥에 엎어진 범강림이 고개를 들며 서무수를 올려다보자, 서무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래? 무슨 일 났어?
“형님!”
서봉추가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서무수를 향해 외쳤다. 주위의 형제들도 재빨리 서무수 옆으로 뛰어갔다.
순간, 서무수는 주위의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에 박힌 화살을 내려다보았다. 오랑캐의 매서운 화살은 서무수의 살을 찢고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지난번에도 이 화살이었지. 이 화살 때문에 형제들과 함께 탈영하고 도망칠 때 병이 났었지.
지난번에도, 이번에도······.
서무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 단지 병일 뿐, 명이 달린 일도 아닌데, 못 고치긴요.
내 명이 여기까지겠지.
내 명줄에는 공을 세워 입신양명하는 게 없는 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없는 건 어쩔 수가 없지. 그래도 전장에서 눈을 감을 수 있으니, 이것으로 충분해.
“누이한테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전해 줘.”
서무수는 점점 흐릿해지는 형제들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 * *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유규는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성보 안을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녔다.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었지만, 시체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전장에서 이보다 더 참혹한 시체도 많이 봤으니까. 유규는 시체들을 뒤적이면서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아댔다.
그놈들은? 그놈들은 어디 있어? 도망친 거야? 정말로?
“내가 네놈들을 지켜보고 있을 거다! 내가 네놈들을!”
같은 말을 연신 외쳐 대던 유규는 성벽 아래서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커다란 머리에 부릅뜬 눈, 거칠게 난 수염.
유규는 떨리는 손으로 서봉추의 몸을 뒤집으려 했지만, 서봉추가 두 팔로 꽉 안은 오랑캐 때문에 뒤집기가 쉽지 않았다. 긴 창 하나가 서봉추와 오랑캐의 몸을 나란히 관통해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보니, 서봉추가 이 오랑캐를 끌어안고 긴 창을 향해 돌진한 모양이었다.
유규는 두 사람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떼어내지 못했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놈들은? 다른 놈들은 어디 갔지?
유규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발을 질질 끌다시피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네놈들을 지켜볼 거다! 내가 지켜볼 거라고!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마! 다 돌아와! 당장 돌아오라고!
유규가 악 소리를 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눈을 떠보니 주위에는 거센 밤바람이 불고, 여름 밤하늘에는 별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꿈인가? 꿈이구나! 다행이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대화 소리, 말이 우는 소리, 횃불이 타는 소리가 유규의 귀에 한꺼번에 들려왔다.
“사상자 수는?”
“오랑캐 머릿수는 얼마나 되고?”
“시신은 구덩이를 파서 화장해.”
“숨이 붙어 있는 자는 열여덟이고, 치료한다면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일단 부상병부터 옮겨.”
사상! 시신!
유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꿈이 아니었어!
유규는 비틀거리면서 한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오랑캐들의 시신은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서 각각 한쪽에 쌓아 두었다. 오랑캐들의 수급을 군영으로 가져가야, 그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무더운 여름 날씨 때문에 시체 썩은 내가 진동했고, 주위에는 파리와 구더기가 득실거렸다.
다른 한쪽에는 아군의 시신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랑캐들의 시신과는 달리, 아군의 시신들은 바닥 위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내일쯤이면 아군의 시신을 안치할 수 있는 커다란 구덩이를 다 파낼 수 있을 것이다.
유규는 아군의 시신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는 몸을 휘청거리면서 시체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찾아냈다.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유규는 갑자기 멈추어 섰다.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금세 정신을 차리고 기어 다니면서 시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주저앉다가 몸을 일으키기를 반복하면서 시신들을 확인했다.
“유규! 지금 뭐 하는 거야?”
보다 못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여인네도 아니고 사람 죽은 거 처음 봐? 왜 미친 사람처럼 그래?”
그래. 미칠 게 뭐 있다고.
오랑캐와 전투를 벌일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전장에 나가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죽음과 함께여야 해. 죽음이 무서웠다면 벌써 도망쳤겠지.
난 무서운 게 아니야. 내가 왜 죽음을 무서워하겠어. 난 단지, 난 단지······.
“내가 네놈들을 지켜본다고 했잖아! 도망칠 생각하지 마! 일어나! 어서 일어나라고!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