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96
교랑의경 396화
정사낭은 뛰는 듯 빠른 걸음으로 정교랑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마당에 놓여 있던 알록달록한 장식들은 모두 치워져 있었고, 회랑 아래에 앉아 있던 반근은 하얀 상복을 조금 뜯어내어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무슨 일 생겼느냐?”
정사낭이 반근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씨와 의남매를 맺었던 오라버니들께서······.”
반근이 울먹였다.
“전에 말했던 그 도련님들 말이냐?”
정사낭이 물었다.
작년 새해 정사낭이 입었던 새 옷들은 전부 그들을 위해 준비했지만 끝내 쓰이지 못한 것들이었다. 경성에 있는 시녀의 입에서 들은 이야기들도 있다 보니, 정사낭은 반근이 말하는 도련님들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아씨께서 가장 의지하시는 오라버니들이에요. 혈육보다도 더 가까운 분들이죠. 같이 늑대도 죽였고······.”
같이 사람도 죽였죠.
반근이 말을 하다 말고 또다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모두 없어졌어. 정말로 다 없어졌어. 어떻게 그리 한순간에 모두 없어질 수 있지?
반근은 지금이 제발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조금만 지나면 이 슬픈 악몽에서 깨어날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구나.”
정사낭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변방의 전란 속에서 사상자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때는 잘 지냈다고 들었는데, 왜 다시 입대한 거야? 경성에 남아 있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정사낭이 물었다. 반근이 애끓는 마음으로 다급하게 말했다.
“넷째 공자님, 저희 아씨께서 그분들을 내모신 게 아니에요. 저희 아씨께서 그러신 게 아니라······.”
반근이 다급하게 말하다가 돌연 말을 멈췄다. 자신이 뱉은 말에 반근 스스로 화들짝 놀랐고, 정사낭도 덩달아 흠칫했다.
그래서 아씨께서는 더욱 자책하고, 더욱 슬퍼하시는 걸까? 만약 도련님들이 경성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반근이 후드득 눈물을 떨궜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제 뜻은 그게 아니라······.”
반근은 바닥에 엎드려 얼굴을 가린 채 통곡했다. 정사낭이 서둘러 반근을 다독였다.
“알아, 알아. 누이가 어디 그럴 사람인가? 누이는 아마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걸 알았기에 그랬을 테지. 그분들은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을 거야. 자고로, 세상만사는 원하는 대로 이뤄지기 힘든 법이잖아.”
반근은 힘겹게 울음을 삼키며 정사낭에게 감사의 예를 표했다.
“누이는?”
정사낭이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반근과 한참이나 대화를 주고받았는데도, 정교랑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씨께서는 정평을 찾아가셨어요. 저는 서북으로 보낼 장례 물품을 준비하느라 집에 있었고, 아마 조 집사가 아씨와 함께 있을 거예요.”
정평은 또 누구지? 누이는 어쩐지 우리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단 말이야.
정사낭이 속으로 생각했다.
문밖에 선 조 집사가 안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정평과 정교랑은 회랑 아래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아씨께서는 저놈을 볼 때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시잖습니까. 하필 오늘 같은 날 저놈을 보게 되면 더 안 좋지 않을까요.”
시종이 조용히 말했다.
“어쩌면 이독치독(以毒治毒)이 될지도 몰라.”
조 집사가 다시 한번 안쪽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게 뭐 그리 슬픈 일이라고.”
정평이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이 여인도 참 웃긴 사람이야. 정씨 일족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막강한 사람인데, 어쩔 땐 꼭 철이 덜 든 아이처럼 나한테 달려와서 되지도 않는 질문을 한단 말이지.
“슬픈 게 아니에요.”
정교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손으로 눈가를 만졌다.
아직까지도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의 생사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었다. 더구나 애초에 그녀에게 이곳 사람들은 전부······ 죽은 사람들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정교랑은 마음 한쪽이 몹시 답답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답답함 때문에 정교랑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렇잖습니까.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것이니, 그들은 원하던 바를 이룬 거예요. 슬퍼할 게 뭐 있습니까. 병사로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니, 이런 결말도 충분히 예상했겠죠.”
정평이 말했다.
“하지만 죽기 위해 병사가 되려는 사람은 없잖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우리 정씨 가문이 새로운 황제를 보필했던 건, 멸족이나 당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세상에 마땅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아! 이렇게 말 한마디로 가볍게 정리되는 죽음은 없다고.
“에이, 그건 좀 틀린 말 같네요.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시작했는지를 중요하게 여겨야죠.”
정평의 말에 정교랑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집안에서 가장 영민한 사람이었다. 한 번 보면 즉시 깨우치고,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다. 남들은 일 년을 걸려 배울 것을 한 달 만에 익혔다. 하지만 선조 앞에선 언제나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정교랑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혈육을 만나서인가? 삼백 년을 거스르긴 했지만, 그래도 혈육이니까.
“그자들은 자신이 왜 병사가 되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면서요? 그러니 그것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그래서 그들의 죽음이 값지고 의미 있다고 하는 겁니다.”
값진 죽음. 저도 알아요, 값진 죽음에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걸. 오라버니들은 용감하게 전장에 나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어요. 이름과 공로를 남기고 그에 상응하는 포상을 받았으니, 허투루 산 건 아니지요.
하지만 제 아버지는요? 제 혈육과 친구들은요? 다 죽었어요. 모조리 다 죽어 버렸다고요. 그들도 오라버니들처럼 용감하게 맞서 싸웠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은 놈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어요.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한 채로 죽고, 그간 해 왔던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했습니다. 값진 죽음이 아니었죠. 그렇다면 우리는 삶을 허투루 산 것이 아닌가요?
“응? 뭐라고요?”
정평은 귀를 기울였지만, 정교랑이 웅얼거리는 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하고, 그간 해 온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하면 허투루 산 거 아니냐고요?”
정평이 들은 것을 되묻자, 정교랑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아닌가요?”
정교랑이 물었다.
“당연히 아니죠.”
정평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원하는 바가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렇죠. 좀 전에 말했잖아요. 무엇을 위해 시작했는지를 알면 된다고. 낭자가 말한 그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던 겁니까?”
“아니요. 우리는 잘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새로운 황제를 잘 보필해서, 대업을 이루려 했죠.
우리라고?
정평의 눈썹이 꿈틀이면서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좋을 대로 말하라지.
“그것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요?”
정평이 물었다.
“네.”
정교랑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천문과 지리를 살피고, 전략을 짜고, 장병들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해 온몸에 적군의 피를 묻혔다. 단 한 사람도 뒷걸음질 친 이는 없었다.
“그럼 된 거 아니에요?”
정평이 두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했다.
“그게 어떻게 값지지 않다고 할 수 있죠? 충분하지 않아요?”
“그게 어떻게 충분해요?”
정교랑이 목청을 높였다.
문밖에 서 있던 조 집사가 서둘러 안쪽을 들여다보고 정평을 향해 위협적인 손짓을 보냈다. 정평은 조 집사의 손짓을 보고는 입술을 삐죽였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요? 낭자가 원하는 게 있으면, 당연히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낭자가 고군분투한다고 해서,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요? 원하는 대로 다 이뤄질 거라는 입에 발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말하는 대로 다 이뤄지는 세상이라면, 세상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지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노력도 했고 애도 썼는데 왜 그렇게 됐냐고요? 낭자 말고 다른 사람은 생각해 봤습니까? 그들도 똑같이 노력했을 텐데, 낭자만 성공하고, 남은 실패하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낭자에게도 사정이 있겠지만, 그건 남들도 똑같습니다. 어째서 낭자한테만 당연할 거라는 기대를 하는 겁니까?”
정평이 말했다.
뭐라고?
정교랑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평을 쳐다보았다.
“무엇을 위해 그 일을 시작했는지 잘 알고, 그것을 위해 죽을 만큼 노력하고 애썼다면, 그게 바로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이고 그 자체로 값진 겁니다. 한고조 유방이 황제가 된 것도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이고, 초패왕 항우가 오강에서 자결한 것도 원하는 바를 이룬 거예요. 거지가 밥 한 끼를 해결하는 것도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이고, 개미들이 강가에 빠져 죽지 않고 둑을 오른 것 또한 원하는 바를 이룬 거죠.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天地不仁以萬物爲蒭狗 – )고 하잖습니까. 그런데 낭자는, 어디서 나온 자신감으로 원하는 바를 이뤘는지 아닌지를 한 사람의 성패로 따지는 거죠? 무슨 근거로 하늘을 대신하여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었는지 판단하는데요? 그건 다 낭자가 생각하고 원하는 바일 뿐이지, 절대 하늘의 뜻이 아닙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정평의 목소리는 흥분한 듯 고양되었다. 한껏 집중한 그가 눈빛을 반짝이며 외쳤다.
문밖에 서 있던 조 집사가 낡고 해진 옷을 입은 정평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잰걸음으로 정평의 거처를 벗어나자, 조 집사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정평의 멱살을 잡았다.
“아파요, 아파. 아프다고.”
정평이 외쳤다.
“안 그래도 요새 들어 우리 아씨의 기분이 부쩍 좋지 않으신데, 네놈이 뭐라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게야!”
조 집사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정평에게 위협적으로 호통쳤다. 정평은 억울하다는 듯 해명했다.
“생각의 창을 넓히게 일깨워 주었을 뿐입니다. 무엇 때문에 끝을 맞이하게 됐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시작했는지에 의미를 두라고. 본래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 그 안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조 집사가 정평의 멱살을 잡은 채로 그를 세차게 흔들었다.
“알아듣게 말해!”
조 집사가 호통쳤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으니, 평상심을 유지하라는 말이죠.”
“고작 말 한마디를 그렇게 길게 했다고? 이런 네놈이 사기꾼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저녁 무렵, 조 집사는 불안해하며 정교랑이 있는 안채로 들어갔다. 그를 본 반근이 조 집사에게 손짓했다.
“별일 없었어요. 이제 막 목욕을 마치셨으니, 곧 주무실 거예요.”
반근이 조용히 말했다.
“정말 별일 없었어?”
조 집사가 속삭이다시피 묻자, 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어려운 여인이네. 어쨌든 친남매가 아니니, 그렇게 슬퍼할 정도는 아닌가 보군.
조 집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 있으면 날 불러. 오늘은 내가 당직이니까.”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 집사가 마당을 나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반근은 회랑 아래에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 아직 꺼지지 않은 등불 덕에 정교랑의 그림자가 창가에 비쳤다.
정교랑은 씻고 난 뒤 한참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오늘 정평에게서 들은 말이 너무 많아 정교랑은 조금 멍해졌다.
그만 생각하자, 그만.
정교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머리를 풀었다.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맑은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정교랑이 고개를 숙여 보니, 치맛자락 옆에 조그마한 은빗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희미한 등불에 비친 은빗이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 아씨, 저희 형제 일곱은 모두 동향입니다. 무원산에서 왔죠. 저희의 천한 이름은 기억하실 것 없으니 은인인 아씨의 존함을 알려 주십시오. 은혜를 깊이 새기겠습니다.
– 그래요, 그래요. 아씨께선 제 형제를 구하고 은자까지 주셨잖아요.
– 생명의 은인이 따로 없죠.
– 아씨께 장생위패(長生位牌: 은인의 복과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만드는 위패)라도 세워 드려야 하는데.”
무원산 형제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텅 빈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정교랑은 무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실상 은혜라고 할 것도 없지. 사소한 수고였을 뿐이야.
정교랑은 자신과 친했던 사람의 죽음을 이렇게 빨리 또 겪을 줄 몰랐다. 무원산 형제들을 잃은 슬픔과 혈육을 잃었던 슬픔이 한데 섞여 얽히고설킨 감정이 피부에 와 닿는 듯싶다가도 아스라이 멀어졌다. 마치 환상처럼.
정교랑은 바닥에 떨어진 은빗을 집어 들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더는 그 사람이, 그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아.
– 조용히 해요, 조용히. 우리 셋째 아우가 노래를 부른다고!
– 형제의 정이여. 생사의 기로에서도 호방한 기개와 정의를 잃지 않으리. 아름다운 여인이여, 날 위해 웃어 주오.
“천고의 풍류를 즐기리. 지기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목숨까지 바치리라. 고운 얼굴 백발이 되어도, 사랑하는 이 마음은 늙지 않네.”
곁방에 누운 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던 반근은 방 안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켜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