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21
교랑의경 421화
“고능준 이 독한 놈!”
벌써 보름 가까이 지났는데도, 노사안은 여전히 분을 못 참으며 이를 갈았다. 특히 경성을 떠나 부임지로 가게 될 7월 말, 8월 초가 가까워지자 더욱 그랬다.
노사안이 분통을 터뜨리며 길길이 날뛰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서북행을 자청하며 벌을 청한 것으로 일단락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고능준이 진언을 올린 끝에 남주(南州)로 가게 됐기 때문이다.
이유마저 지극히 합당했다. 강문원은 본디 남주에서 남쪽 오랑캐를 섬멸하며 세를 키우기 시작한 자였다. 따라서 강문원이 어떤 고생을 겪으며 공을 세웠는지 노사안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주에서부터 알아보기 시작하는 게 맞다는 이유였다.
이유야 그럴듯하다지만 누가 봐도 노사안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의도가 명확했다. 남주 땅이 어떤 곳이던가. 장려(瘴癘: 기후가 덥고 습한 지방에서 생기는 유행성 열병이나 학질)가 창궐하는 곳이라 그곳에 간 이들 중 열에 아홉은 목숨을 잃었고, 그나마 목숨을 건져도 여생을 갖은 병에 시달리며 보내야 했다.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처벌이었다. 누구든 고능준에게 맞서는 자는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처벌.
경성 관리는 외직으로 나가는 일을 원치 않았기에, 가능한 한 하루라도 더 경성에 오래 붙어 있고 싶어 했다. 노사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그가 갈 곳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땅이었으니, 가족들은 벌써부터 초상 치를 일을 근심할 정도였다. 이부에서는 빨리 부임지로 출발하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재촉했다.
“이게 어딜 봐서 부임인가? 압송이지!”
노사안이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쾅 내려놓으며 또 분한 듯 이를 갈았다.
덕승루의 상등 별실에서 열리는 노사안의 송별연에 참석한 이들도 속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울분을 토하며 마시는 술인 만큼 취기가 빨리 올라왔다. 벌써 얼큰하게 취한 이가 여럿이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장수의 명예를 더럽힌 죄라니. 일개 무관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잔뜩 취한 누군가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불평을 쏟아냈다.
“공을 세우긴, 공을 세웠으면 뭐? 왕문성도 큰 공을 세웠지만 결국 죽여 버리지 않았소. 이렇다 할 이유도 대지 않고 죽여 버렸다고. 노 대인 같은 문관이 일개 무장에 대해 못 할 말이 뭐 있소? 나라가 미쳐 돌아가도 분수가 있지!”
“그럼 어쩌겠소? 이건 무장들과 관계된 문제가 아니오. 고능준 때문이지!”
또 다른 자가 이를 갈며 대꾸했다. 그 말에 별실 분위기는 더욱 침울해졌고, 다들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전부 고능준 때문이지. 고능준이 벌인 일이고.
“사안 형의 송별연을 위해 모인 자리인데, 그런 쓸데없는 놈 말을 왜 꺼내시오!”
누군가가 분위기를 띄우며 말했다.
“참, 내가 노 형을 위해 좋은 걸 준비했소.”
또 다른 누군가가 자기로 된 작은 병을 꺼내며 거들자, 자리에 있던 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게 뭐냐고 물었다.
“내가 동 내한의 댁에서 간신이 얻은 환약이라오.”
그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하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3년 전 동 내한이 죽다 살아난 일은 기담으로 남아 있었다. 특히 동 내한의 머리에 백발 대신 다시 검은 머리카락이 나고 혈색이 좋아진 것은 물론, 기력까지 더욱 왕성해진 터였다. 결단코 금석을 복용해서가 아니라 신의에게서 얻은 약 덕분이었다.
신의는 그 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지만, 신의가 있었던 약포는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일설에는 동씨 가문 외에 팽씨 가문도 거기서 천금을 주고도 얻기 힘든 귀한 약을 얻었다고 했다.
뜻밖에도 그 약을 구해 오다니. 작은 병이라고는 하나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 내한이 당초 금석을 먹은 것도 젊을 때 남주에서 몸을 상했기 때문이거든. 근데 이젠 금석을 먹지 않아도 된다더군. 이 환약을 먹은 덕에 회춘하게 되었으니 말이오. 이번에 손녀보다도 몇 살 어린 딸을 얻었다던데.”
약을 구해 온 자가 약병을 건네며 말했다.
“노 형, 이걸 가져가면, 남주에서 몸을 지킬 수 있을 거요.”
귀하디귀한 선물이었다. 신선이니 뭐니 하는 말은 믿을 수 없다지만, 어쨌거나 세상에 신비롭고 기이한 비술이 전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노사안의 얼굴이 겨우 환해졌다. 노사안은 손을 뻗어 약을 받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장려 예방에 좋을 것 같아 본디 신선거에 예약을 잡고 과로신선이나 먹을까 했는데, 글쎄 오늘 영업을 쉰다더군.”
누군가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이제 경성을 떠나면 과로신선도 못 먹겠네그려.”
“직접 만들어 먹으면 되지.”
누군가가 웃으며 대꾸했다.
“직접 만들어 먹으면 과로신선이 아니지. 그건 낙득자재라고.”
먼저 말했던 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신선거가 왜 갑자기 문을 닫았지? 새해 명절에도 영업을 하는 곳인데.”
누가 궁금한 듯 물었다.
“점원들한테 듣자니 주인어른을 맞이하러 가야 한다더군. 아무리 주인의 마중을 나가도 그렇지 장사까지 쉴 건 또 뭔가. 무슨 일인지 이해가 안 가.”
눈 깜짝할 사이에 화제가 신선거로 옮겨 가자, 누군가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끊었다.
“남의 일에 뭔 걱정이 그리 많소. 오늘은 노 형을 위한 자리라고.”
“참, 그렇지.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좋은 쪽으로 생각합시다. 진(陳) 대인께서 어떻게든 지켜 주실 거요. 남주에 당도하기도 전에 새로운 전근 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지.”
누군가가 맞장구를 치며 화제를 돌렸다. 노사안은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술잔을 들었다.
하긴, 뭘 어쩔 수 있으랴. 진소 대인께서 승승장구하여 다시 끌어올려 주시길 고대하는 수밖에. 옛말에 사람이 떠나면 차도 식는다고, 경성에 남은 이들이 날 기억해 주긴 할지 모르겠네.
노사안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털어 넣고 안주를 집어 입에 넣었지만, 쓰고 떫은 맛만 느껴질 뿐이었다.
권커니 잣거니 진탕 술을 마시고 있던 그때, 갑자기 거리가 시끄러워졌다. 떠들썩한 목소리까지 들리자, 송별연에 모인 이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창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이가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거리에 사람이 많구먼.”
창문을 연 이가 말했다.
“거리엔 본디 사람이 많지 않소.”
자리에 앉아 있던 이가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 아니,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소. 누가 길을 가르며 무언가를 놓고 있는데.”
창문을 연 이가 말했다.
경성 사람의 호기심은 지위 고하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우르르 달려와 밖을 내다봤다. 과연 거리는 인파로 가득 차 있었고, 사람도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옆쪽 별실에 있던 이들도 창문을 열고 밖으로 목을 빼며 구경했고, 복도에서도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술동이랑 그릇을 놓고 있군.”
누군가가 거리를 보며 말했다.
“길가에 왜 술동이를 놓지? 어느 주점에서 손님을 끌어들이려고 술수를 부리는 건가?”
꽤 식견이 있는 이가 그럴싸한 추측을 내놓았다.
“저기 좀 보라고. 하나만 놓는 게 아니야. 일정 간격을 두고 거리에 쫙 깔아 놨어. 사람들도 있고.”
자리에 있던 이들이 전부 창가로 몰려가 구경하고 있는데도, 노사안은 여전히 홀로 자리를 지키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래, 이게 바로 경성이지. 번화하고 떠들썩한 곳. 새로운 일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곳. 난 이제 한동안 이런 구경을 못 하겠군. 어쩌면 평생 못 할지도 모르고.
떠들썩한 소란을 보며 노사안은 더욱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술을 마시고 난 그는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창가에 모여 아래쪽을 쳐다보며 떠들어대는 동료들을 보고는, 인사도 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사람이 복도를 바삐 오갔다.
“대체 무슨 일이래?”
“무슨 일인지 물어봤어?”
윗전의 명으로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나온 사환들이 떠들어댔다. 그런 소란 속에서 노사안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거리로 나오자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는 이가 더 많아졌다.
“술입니다, 술.”
술동이를 놓던 사내가 끝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더 많은 질문을 불러올 뿐이었다.
“무슨 술이요?”
“파는 겁니까?”
“파는 거 아닙니다. 드리는 거죠.”
사내가 대답했다.
공짜 술을 맛보게 생겼군!
구경하던 이들은 더욱 화색이 도는 얼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같은 질문과 대답이 여기저기에서 오가면서 순식간에 온 거리가 들끓었다.
“밀지 마시오, 밀지 말라고! 지금 드리는 게 아니라, 주인어른이 오셔야 드립니다.”
주인어른? 주인어른이 대체 누구기에?”
인파 속을 가로지르며 걷던 노사안도 걸음을 멈췄다. 동료들과 나누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 신선거가 왜 갑자기 문을 닫았지? 새해 명절에도 영업을 하는 곳인데.
– 점원들한테 듣자니 주인어른을 맞이하러 가야 한다더군.
저 사내가 말하는 주인어른이 신선거의 주인인가? 역시 술을 팔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였군.
노사안은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두어 걸음도 채 걷기 전에 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이 죽었다고?”
주인이 죽어?
노사안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인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습니다. 이 댁 주인어른이 돌아가셔서, 이제 안장하러 간답니다. 우린 술을 나눠 주기 위해 고용된 거고요.”
안장! 시신을 운구하려는 건가?
“장례를 치른답니다. 서문으로 들어와 동문으로 나간다고, 길에 쭉 깔아 놓으래요.”
경성 전체를 가로지르겠다는 거잖아!
노사안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길만 해도 저런 사내가 족히 열 명은 되는 것 같은데. 서문에서 동문까지 가로지르려면 이런 거리가 최소 열댓 개는 될 터. 저런 사내를 대체 몇이나 고용하고 술은 얼마나 많이 갖다 놓은 거야!
“이 술은 무슨 술이오? 싸구려 술이겠지?”
주인어른인지 뭔지가 죽었는지 어쨌는지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모두가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을 누군가가 던졌다.
공짜로 주는 거잖아. 좋은 술일 리가 없지.
“직접 빚은 술이라 세상에 둘도 없는 거랍니다. 팔지는 않는대요. 세상에서 가장 독한 술이라고 하던데요.”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사내의 말이 틀렸다며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독한 술은 덕승루의 운상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추수대의 조홍양이 최고야.”
사내가 억울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렇게 말했어요. 이따 먹어 보면 알 거 아닙니까.”
그 말에 현장은 더욱 소란스러워졌고, 구경꾼도 점점 늘어났다.
그게 얼마나 귀한 술인지는 노사안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내를 고용한 것만 봐도 보통 비싼 술이 아니리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사내들도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달변인 자로 고르고 고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품삯도 적잖이 줬을 터.
경성 사람들은 겉치레를 너무 신경 쓴다니까. 혼사만 성대하게 치르는 게 아니야. 이젠 장례까지 떠들썩하게 하는군. 이게 바로 경성이지. 번화한 거리에 신선한 일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곳.
하지만 이제는 노사안과 무관한 곳이었다. 노사안은 고개를 돌리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죽을 때도 이리 처량하게 죽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어른이 대체 뭐 하는 사람인데?”
뒤에서는 질문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누구냐고? 벼슬아치가 이런 일을 벌일 리는 없지. 아무것도 없고 가진 건 돈뿐인 자들이나 벌이는 일이야!
“서북 군영에 있던 병졸인데 전사했다더군.”
“다섯 명이 한꺼번에 죽었다니, 장렬하지 뭔가.”
병졸! 전사!
돈 있는 사람이 군에 들어갔다고? 돈 있는 사람이 제 발로 죽으러 갔단 말이야?
말도 안 되지!
서북, 다섯, 전사, 경성 출신······. 왠지 귀에 익은데.
노사안이 우뚝 멈춰서서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럼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