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31
교랑의경 431화
고능준이 한숨을 내쉬며 문밖을 바라봤다.
“중요한 건 필요야. 폐하께서 무엇을 필요로 하시는지, 조정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백성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보고, 저들이 필요로 하는 걸 주어야 해.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사실엔 아무도 관심 없어!”
그래서 노사안이 감히 탄핵 상소를 올린 것이다. 폐하께 보여 드릴 무언가가 필요했기에. 그런데 뜻밖에도 유금천 그 쓸모없는 놈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바람에 민심을 부추기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번엔 운이 고능준 편에 있지 않은 듯했다.
“그럼 대인, 정말 강문원을 조사하실 생각입니까? 사, 사실 이건 사소한 일이잖습니까.”
부윤이 물었다.
“사소한 일? 엄청난 일 치고 사소한 일에서 시작하지 않는 게 있던가? 서둘러 각자가 필요로 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해 주지 않으면, 점점 더 많은 일이 연루될 게야.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걸 받아내려는 사람도 점점 많아지겠지.”
그랬다. 조정의 분쟁은 언제나 사소한 일에서 시작됐다가 탄핵에 탄핵을 거듭하며 끝없이 이어졌다. 싸움이 격렬해질수록 연루된 사람도 점점 늘어나, 결국에는 어느 한쪽이 처참한 패배를 맛보아야 끝났다. 물론 그 어느 쪽도 실패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승부는 나기 마련이었다.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라지만, 나쁜 결과도 고려해야 했다.
또 그 탈영병들이 문제로군! 지난번엔 내 계획을 망치더니, 이번에도 또!
또 그들이야! 아니지, 또 그 여인이야! 그 여인!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살리는 것 외에도, 이리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니!
태평거와 신선거의 내력과 그 뒤에 있는 이의 신분을 진작 알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난번에 그 여인이 이황자를 고칠 수 있는지 여부 외에 다른 것도 고려했을 것이다. 그때 깔끔하게 죽여 없앴다면, 이리 성가신 일도 없었을 터인데.
“강주 바보!”
고능준이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며 소리를 질렀다.
“강주 바보.”
한편 진 노태야도 같은 말을 내뱉고 있었다. 다만 진 노태야의 얼굴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앞으로 경성엔 두 개의 강주가 있겠구나. 하나는 강주 선생, 하나는 강주 바보.”
진소가 차를 우려 건넸다. 진 노태야가 찻잔을 받으며 손을 내저었다. 회랑 아래에 앉아 무원산 이야기를 전한 사환이 얼른 고개를 숙여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넌 잠시 기다렸다가 하소연을 받아 줄 생각이었지만, 놓친 게 있다. 그 여인이 어디 기다리는 사람이더냐.”
진소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다리기는커녕 아예 만백성을 끌어들였습니다. 온 경성이 술을 탐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온 경성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지요.”
진소는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여인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입니다. 그 여인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다른 이들이 계속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진 노태야가 웃으며 차를 마셨다.
“어쨌거나 넌 그 낭자한테 고마워해야 한다. 노사안은 더더욱 고마워해야 하고.”
진소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당 문 밖에서 사환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대인, 속히 입궐하시라며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진소가 사환과 부친을 차례로 쳐다봤다.
“왔군요.”
궁에서 온 부름을 말하는 것인지,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서문에 위치한 송(宋)씨네 점포는 경성에 있는 술집 중 손에 꼽힐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귀한 손님을 맞이하게 됐다.
“아이고, 반근 낭자랑 대관리인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송씨네 점포의 관리인이 웃으며 인사했다.
신선거와 태평거를 관리하는 시녀와 대관리인은 경성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이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였다.
“우리 점포가 문을 닫았으니, 밥 먹을 곳을 찾아봐야 하잖아요.”
시녀가 웃으며 대꾸하고는 걸음을 멈추고 송씨네 관리인에게 말했다.
“거리에 인접한 상등 방으로 주세요.”
무언가 더 말하려던 송씨네 관리인의 시선이 시녀를 뒤따라 들어오는 남녀 한 쌍에게서 멈췄다.
소년 공자는 귀티가 나는 차림새였다. 화려한 옷자락이며 허리춤에 걸린 옥패, 움직임에 따라 언뜻언뜻 보이는, 은실로 수놓은 신발까지 어느 것 하나 귀해 보이지 않는 게 없었다.
관리인의 시선이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여인에게로 향했다. 순간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멱리로 가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송씨네 관리인은 세상에 다시 없는 진기한 보물이라도 본 듯한 눈빛이었다.
대관리인만 온 게 아니구나. 행수까지 왔어! 그 무원산이라는 독한 술을 먹을 기회가 나한테도 온 것인가?
“아씨, 이곳으로 드시지요.”
송씨네 관리인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친히 길을 안내했다.
이들이 막 점포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성 밖에서 들어온 마차가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차 안에서 백옥처럼 희고 고운 손이 나와 휘장을 들어 올리자, 청아하고 아름다운 얼굴 반쪽이 드러났다.
“언니, 정말 진 공자님이네요.”
옆에 있던 춘령이 바깥을 쳐다보며 말하고는, 점점 멀어져 가는 주점을 보며 눈빛을 반짝거렸다.
“정말 오랜만에 진 공자님을 뵙네요. 글공부로 바쁘신 줄 알았더니, 미인과 함께 놀러 다니시나 봐요. 요즘엔 왜 언니를 통 안 찾아오시죠? 언니를 잊으셨나.”
“허튼소리 마. 저분이 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큰일 날 일이야.”
주 낭자가 대꾸했다.
“명문가의 자제가 향락에 빠지면 체통은 어찌하고? 더구나 저분이 언제 날 찾아오셨니? 다른 이의 초청 때문에 왔다가 우연히 동석한 거지.”
춘령이 헤헤 웃었다.
“맞아요. 진 공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죠.”
그렇기에 존경하고, 그렇기에 못 잊는 것일 테고.
마차는 성안으로 달려갔다. 그때 거리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소란이 일더니 행인들이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급보를 전하는 역참의 병사가 말을 탄 채 내달렸다.
“서북으로 갈 급보로군요.”
진십삼이 멀어져 가는 병사를 보며 고개를 돌려 정교랑에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온 정교랑은 멱리를 벗고 청초한 얼굴을 드러냈다.
“이 급보가 전해지면, 이 일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기 시작할 겁니다. 온 천하가 낭자를 알아볼 테고요.”
진십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교랑은 한 손으로 소매를 잡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느릿느릿 먹기 시작했다.
“난 언제나 여기 있었어요. 알아보든 말든, 보든 못 보든 그건 남의 일이죠.”
정교랑도 고개를 들어 진십삼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일부러 누군가에게 자신을 알리려 한 적도, 알려지지 않기 위해 숨은 적도 없었다.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진십삼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지 않았던가.
진십삼이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진십삼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가족에게 버림받았으면 어떻고, 경성이 살기 힘들면 어떠하랴. 호시탐탐 재산을 노리는 이들이 있으면 또 어떠하랴. 고관대작에게서 먹을 걸 챙기고, 횡포를 부리는 무뢰한은 깔끔하게 죽여 없앴다.
거센 비바람 앞에서도, 험한 가시밭길 앞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보기에 옳은 길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거센 풍랑과 위험천만한 일들도 그녀의 눈에는 맑게 갠 하늘과 다를 바 없었다.
다 똑같았다.
정교랑은 찻잔을 들어 진십삼과 허공에서 부딪치고, 소매를 들며 단숨에 비웠다.
용곡성은 8월 하순이 되자 벌써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단출한 마당에서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 관구, 이 편자를 박으면 정말 얼음 위에서도 빨리 달릴 수 있습니까?”
대장간처럼 생긴 초막 밖. 병졸들이 쭈그려 앉거나 일어선 채 초막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을 보며 물었다.
“그렇다니까.”
초막 안에서 웃통을 벗은 사내가 대답했다.
“그럼 이번 겨울에 양마하(亮馬河)를 건너 오랑캐 땅으로 쳐들어가 영지를 회복할 수 있는 겁니까?”
병사들이 웃으며 물었다.
“물론이지.”
사내가 대답했다. 대장장이들이 건네는 편자를 받아 꼼꼼하게 살펴보던 그는 이번에도 던져 버렸다.
“두께가 일정치 않잖아.”
대장장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얼른 다시 만들러 갔다.
사내는 매어 놓은 말 옆으로 가서 쭈그리고 앉아 능숙한 동작으로 말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한 손으로 옆에 있는 나무판 위에 말굽을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인두를 들어 올렸다.
이제 군마는 거의 다 편자를 박은 상태라 말편자를 보는 건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달궈진 편자를 박는 일을 직접 보는 경우는 드물었다. 병졸들이 차마 못 견디고 신음 소리를 냈다.
“얼마나 아플까.”
누군가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서사근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열댓 살쯤 된 어린 병졸이었다. 여위고 허약해 보이는 체구에 안색도 창백하고, 군복은 몸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는 게 꽤 흥분한 눈치였다. 서사근이 형제들과 함께 연줄을 통해 처음 군영에 들어와 군복을 받아 입었을 때도 아마 저런 모습이었으리라.
“아프지도 않고 어떻게 빨라지겠느냐.”
서사근이 껄껄 웃으며 말편자를 박고 인두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긁개를 들어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둔 말굽을 쓱쓱 다듬었다. 넋을 놓고 그 능숙한 동작을 바라보는 사이, 어느덧 말편자 네 개가 깔끔하게 박혔다.
“서 대인, 손재주가 대단하십니다.”
다들 칭찬을 늘어놓자 서사근이 웃으며 일어났다.
“그래. 서 대인의 손재주는 정말 대단하지.”
문밖에서 낮고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서사근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걷혔다.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무관 셋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관청 사람들이었다. 병졸들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서 대인.”
그중 한 무관이 입을 열었다. ‘대인’이라는 두 글자에 특히 힘이 실려 있었다.
“여기 일하는 게 아주 즐거워 보이는군.”
“관복을 갖춰 입지 않아 예를 못 올리겠군요. 이건 소생이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서사근이 대답했다. 서사근은 관구로 군마에 관한 일을 맡고 있지만, 말편자를 박는 일을 직접 할 필요는 없었다. 벌을 받아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서사근, 시답잖은 소리나 하자고 온 거 아니다. 요즘 다친 군마가 몇이나 되는지 대답해 봐라.”
무관 하나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전부 스물다섯 필입니다.”
서사근이 대답했다.
“대답 한번 뻔뻔하구나.”
다른 무관이 눈을 부라리고 나서며 호통을 쳤다.
“군마를 관리하랬지, 누가 군마를 못쓰게 만들랬느냐?”
“최고의 편자를 만들어 냈으니, 못쓰게 됐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올겨울엔 우리 군마가 더 빠르게, 더 멀리 달릴 수 있을 겁니다. 말 스물다섯 필을 바쳐 무수한 오랑캐의 목숨을 취할 수 있으니, 충분히 값지지요.”
서사근의 말에 무관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저 자식이 만든 말편자가 쓸만한 건 사실이니까. 편자가 없을 때도 적을 죽이고 공을 세웠다지만, 저게 생겨서 해가 될 건 없잖아. 말의 손상이 줄어드니 군에 배정되는 말도 점점 늘고 있고.
더 이상 전처럼 말편자를 놓고 왈가왈부하며 공을 다투는 건 현실적으로 맞지 않아. 말편자에 있어서 저놈은 자신감이 넘치고, 우린 아니니까.
“여기서 열심히 잘해 보라고.”
무관들은 비꼬는 듯한 말을 던지고 자리를 떴다. 막 문을 나서는데, 무관 하나가 깜빡한 게 있는 듯 고개를 돌렸다.
“서무수.”
무관이 갑자기 소리쳤다. 서사근은 순간 움찔하며 손을 멈추었다. 이름을 불렀던 무관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미안, 미안. 이름이 너무 비슷해서 자꾸 실수하네. 서무수가 워낙 깊은 인상을 남겨서 말이지. 제가 무능해서 죽어 놓고 공을 바라는 놈은 처음 보거든. 용곡성 밖에 누워 있던 병사들도 죄다 벌떡벌떡 일어날 일이야.”
긁개를 쥔 서사근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퍼런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귓가에 계속해서 무관의 말이 들려왔다.
“난 그런 쓸모없는 놈들 못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