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36
교랑의경 436화
어사중승이 손에 들고 있던 상소문을 내려놓았다. 다 읽었다는 뜻이었다.
조당에 있던 이들은 모두 놀란 눈치였다.
“그게 다요?”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자문은 또 진지하게 상소를 들어 쓱 훑으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게 다요.”
이자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게 다라니······.
“그자는 도중에 의식을 잃는 바람에, 요행히 목숨을 건졌군.”
“그래서 원하는 게 뭐라고 하오? 죽지 않았으니 위로하고 보살펴 달라는 건가?”
“도망친 장수가 그들을 죽고 다치게 한 원흉이라는 거요?”
논쟁이 오가면서 조당 안이 시끌시끌해졌다. 양옆에 있던 어사들이 앞으로 나와 호통을 친 후에야 다소 고요해졌다.
“그 정 낭자는? 정 낭자는 뭐라고 했지?”
황제가 물었다.
대황자는 이런 일이 관료들끼리 다투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흥미진진한 눈으로 어사중승을 쳐다보던 대황자는 무언가 떠오른 듯 진안 군왕을 힐끔 쳐다봤다.
다른 때는 늘 생기 있어 보이던 진안 군왕이 이번엔 어쩐 일인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사중승이 상소를 쓱 훑고 대답했다.
“그 여인은 공을 다투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조당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공을 다투려 한다니!
의남매를 영접하고 안장하려 했을 뿐 억울하다고 한 게 아니라, 그저 호화스러운 장례를 치르고자 했을 뿐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한 게 아니라, 결코 이럴 의도는 아니었으며 그럴 마음도 없다고 한 게 아니라······ 일부러 작심하고 이렇게 했다는 말이었다.
그 여인이 공을 다투려 한다!
조당 안이 다시 시끌시끌해졌다.
“무슨 공을 다툰단 말이오? 끝내 굴복하지 않고 싸운 자들 또한 한둘이 아니오만, 이런 경우는 없었소이다!”
“돈이 있고 세력이 있으면 멋대로 이런 일을 벌여도 된다는 거요?”
“백성을 선동해 겁박을 하다니!”
이번에도 어사 둘이 나와 호통을 친 후에야 조당이 잠잠해졌다. 용상에 앉은 황제는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아주 깔끔하게 인정하는군.”
황제의 표정을 보고 황제의 말을 들으며, 고능준과 진소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황제는 늘 이랬다. 너희가 뭘 하든 난 다 아니까 날 기만할 생각은 넣어 두라고. 여인이 계속해서 억울하다며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면, 황제는 더욱 질색하며 못마땅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깔끔하게 인정한다면, 백성을 부추겨 조정을 협박하려 했다는 죄는 성립되더라도, 황제가 느끼는 혐오감은 한결 줄어들 터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혐오감이 다소 줄어들 뿐, 죄는 분명했다. 노정의 탄핵 결과가 어떻게 되든, 여인은 죄를 벗을 수 없을 것이다.
진소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린 낭자가······. 죽어간 의남매를 위해 목숨을 걸고 공을 다투어 공명을 얻는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분이나 푸는 정도지. 지금껏 쌓은 명망을 잘 이용했다면 좋은 곳에 쓸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소동을 벌였으니 명망은 도리어 해가 될 뿐이었다.
결국 속 좁은 여인네다 보니 감정을 앞세우는군.
“그 여인을 부르시오. 무슨 공을 다투려는 건지, 무엇이 불공평한지 짐이 물어야겠소.”
황제의 말에 조정 대신들은 흠칫 놀랐다.
“폐하, 불가하옵니다. 그런 하찮은 여인을 어찌 용인하신단 말입니까.”
“그렇사옵니다. 그 여인이 등문고를 두드렸다면 몰라도, 신선이니 도사니 하는 말로 백성을 선동하고 관료와 결탁하여 중상모략을 저지른 자인데 어찌 이를 눈감아주려 하십니까!”
관료들이 떠들어대는 통에 조당이 또다시 어수선해졌다. 이번에는 어사들이 여러 번 호통을 친 후에야 간신히 소리를 잠재울 수 있었다.
“그 여인이 그랬기에 짐이 만나 보려는 거요. 짐은 그 여인에게 답을 주어야겠소. 그 여인뿐 아니라 백성에게도, 그 여인과 결탁한 관료에게도 답을 줄 거요.”
관료들은 계속해서 반대하려 했지만, 황제의 결심은 확고했다. 명을 들은 내시들이 재빨리 나가 말을 전했다. 황제는 막간을 이용해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황제가 조당 뒤쪽에 있는 후당으로 가 잠시 쉬는 동안, 관료들은 조당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사들이 한쪽 옆에 서서 노려보고 있었지만, 관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까지 막을 순 없었다.
표정은 다들 제각각이었다. 흥분하는 이도 있고, 무관심한 이도 있고, 근심하는 이도 있었다. 다들 황제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추측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노정은 끝났군.”
고능준이 다소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하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태조의 예를 본받으시려나 봅니다.”
관료 하나가 말했다.
조당 안에 의론이 분분한 만큼 조당 밖도 초조하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당에서 일어난 일을 숨길 수는 없었다. 더구나 보기 드문 일이 벌어진지라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당시 변방의 장수였던 송명(宋明)은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자라 아주 제멋대로였어. 남의 재물은 물론이고 아내와 딸까지 빼앗았다니까. 그러다 백성 하나가 상경하여 등문고를 두드리자, 태조께서 친히 그 백성을 만나 주셨지.”
신분이 신분인지라 진십삼은 부친의 관청 바깥쪽에 마련된 공간에 앉아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진십삼은 주육낭을 보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육낭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찻잔을 들고 있으면서도 반나절 내내 한 모금도 안 마시는 걸 보면 얼마나 초조해하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낭자가 자신의 명망에 기대 백성의 뜻을 모아 협박할 수 있었다면, 폐하도 능히 그러실 수 있지. 어쨌거나 폐하께서 정 낭자를 만나 주시는 것만으로도 백성은 만족할 거야. 공로를 인정받느냐 마느냐, 상을 받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백성의 관심사가 아니거든. 백성들은 그저 이번 일 자체에 관심을 둘 뿐이지.
정 낭자를 만나 주고 난 후 폐하께서 강문원이 군을 제대로 위로하지 못했다며 서북 군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성대한 제를 올리라 명하신다면, 백성은 위로를 받았으니 그럭저럭 넘어갈 거야. 강문원 역시 자신을 지켜 주신 폐하께 더욱 감격할 테고. 모두가 폐하의 성은에 감읍하며 폐하를 인자한 성군이라 칭송하겠지. 참, 노정은 멋대로 역참의 말을 이용하고, 백성의 뜻을 부풀리며 공신을 모함한 것도 모자라 조정을 우롱하기까지 했어. 인자하신 폐하께서 문신을 죽이실 리야 없겠지만, 살아서 남주 땅까지 가긴 힘들 거야.”
잠자코 진십삼의 말을 듣고 있단 주육낭이 물었다.
“그럼 서무수 형제들은 결국 또 아무것도 못 얻는 거네?”
진십삼이 주육낭을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내가 보기엔 이미 얻은 것 같은데? 온 경성이 무원산에 대해 떠들고 있잖아. 폐하께서도 친히 물으실 정도니, 공로는 인정받지 못했다지만 대단한 공명을 떨친 셈이지.”
주육낭은 잠시 침묵하다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네가 말은 잘했는데, 내 생각에 결과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아. 그 애가 남 좋은 일 시키자고 그리 바삐 움직였을까?”
그 여인이 그럴 사람이던가.
“그런 일을 벌여 봤자 헛수고만 한 셈이지.”
고능준이 중얼거리고 웃으며 맞은편의 진소를 쳐다봤다. 진소의 표정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눈빛은 편안해 보였다.
“어찌 헛수고라 할 수 있겠소. 폐하께서 태조를 본받으신 걸 보면, 이는 곧 폐하께서도 강문원에게 잘못이 있다고 여긴다는 뜻인데.”
진소 역시 고능준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고능준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숲에서 홀로 유달리 큰 나무가 있으면 바람이 쓰러뜨리기 마련이고, 남달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는 필시 여럿의 비방을 받기 마련이지(木秀於林, 風必摧之. 行高於人, 衆必非之). 강문원은 서북을 지키며 여러 잡다한 일을 처리하고 있소. 병사들의 마음을 살피는 일에 소홀했다 해도, 사려 깊지 못한 정도지 이를 큰 과오라 할 순 없잖소.”
그런 과오는 황제에게 도리어 좋은 일이었다. 군을 위무하는 일은 강문원보다 황제가 하는 편이 훨씬 적합하기 마련이니까.
진소 역시 웃음을 지었다.
“그 정도 과오에 불과한 게 아니라면요?”
그 정도 과오에 불과한 게 아니다?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데, 어사가 무거운 헛기침을 했다.
“정씨 여인이 왔습니다.”
조당에 있던 관료들이 일순간 입을 다물고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드넓은 황궁의 저 멀리서 한 여인이 내시들의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였기에 멱리를 벗고 겉에 입는 긴 옷도 벗은 상태였다. 짙은 색상의 치마만 입은 여인은 다소 왜소한 모습이었다. 으리으리한 전각들이 사방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지라 더욱 작고 허약해 보였다.
저게 바로 그 정 낭자인가?
진소를 제외하고는 다들 정 낭자를 처음 보는지라, 관료들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며 여인을 살폈다.
나막신이 청석판에 닿자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전각 안을 맴돌았다.
“아방(阿昉: 정방의 별칭)!”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크고 건장한 사내가 쏟아지는 햇빛 속에 역광으로 선 모습이 보였다.
“아방, 대주의 옛 도성은 폐허가 되어 이 터와 무너진 전각밖에 안 남았어. 그래도 전엔 꽤 으리으리했을 것 같네.”
사내가 양팔을 활짝 벌리며 웃었다. 청량한 소리가 황량한 황궁에 울려 퍼지며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설마 그렇게 좋았을까. 그래도 네가 살 집엔 비할 수 없을걸.”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뒤에 있던 사내의 웃음소리가 더욱 밝아졌다. 사내가 정교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벼운 헛기침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정교랑이 고개를 들었다. 앞서가던 내시가 뒤돌아 정교랑을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갑옷 차림으로 양옆에 있던 호위들도 창을 바투 잡으며 경고의 눈길로 노려봤다.
“겁낼 것 없소. 묻는 말에 대답만 하면 되니까.”
내시가 중얼중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어린 소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천자를 처음 뵙는 자리에서는 황제를 알현할 자격을 얻은 관료들조차도 허둥대며 추태를 보이기 마련이니, 하물며 이렇게 어린 낭자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낭자가 이리도 어렸구나. 신의 낭자라기에 일흔이나 여든은 된 줄 알았지. 아무리 못 돼도 스물은 넘었을 줄 알았는데, 어사대에서 이렇게 어린 계집이 나올 줄이야.
열여섯은 됐으려나? 아니면 열일곱?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하고, 족히 10장 정도의 높이는 되어 보이는 주변의 전각들을 둘러봤다.
“오나라 왕궁의 화초는 옛길 속에 묻히고, 진나라의 고관대작은 고분의 주인이 되었다네(吳宮花草埋幽徑, 晉代衣冠成古丘 – 이백). 아방, 내가 지은 시 어때?”
여인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에이, 거짓말쟁이. 시와 사(詞)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시와 사를 모르는 건 아니거든?”
거짓말쟁이······. 아니지, 거짓말쟁이가 아니야.
“이로부터 당시에는 천제도 취하여 진나라 땅에 산하가 있음을 상관하지 않았네(自是當時天帝醉, 不關秦地有山河 – 이상은).”
정교랑이 앞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라고?”
내시가 몸을 가까이 기울이며 묻고는, 정교랑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경고했다.
“궁에서는 묻지 않는 것에 대답하면 아니 되오.”
정교랑은 다시 예를 표하며 입을 다물었다.
“저리 어렸다니.”
조당에 있던 관료들이 시선을 거두었다.
“저 놀란 것 좀 보게나. 무슨 배포로 그런 일을 꾸민 거야.”
웅성거리던 관료들은 이번에도 어사들이 나서서 경고한 끝에 조용해졌다.
뒤에서 교사한 사람이 없다는 게 이상하지.
낭자의 나이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고 나니 생각보다 더 어린 모습에 고능준은 절로 탄식이 나왔다.
확실한 정보임을 거듭 확인하지 않았다면, 고능준은 저런 낭자에게 힘이 되어 주려고 나서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저 낭자가 그런 도움을 받을 만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도 믿기 힘들었을 테고.
어쩌면 그래서 유 교리가 방심했다가 일이 틀어졌는지도 모르겠군. 저런 상대라면 실로 만만히 보기 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