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4
교랑의경 44화
노인은 상쾌한 기분으로 산에서 걸음을 내디뎠다. 뒤에는 지난번에 따라왔던 노복 외에 어린 시종이 하나 더 있었다.
“노야, 돌아갈 수 있으시겠어요?”
노복이 물었다.
“의원이 별일 없을 거라고 했으니 별일 없겠지. 이번엔 나오기 전에 밥을 든든히 먹었으니 별일 없을 게다.”
노인은 웃으며 말했지만 노복은 근심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많이 안 드셨잖습니까.”
노인은 허허 웃으며 못 들은 척 넘기고 손을 뻗어 산허리를 가리켰다.
“며칠 사이에 산림까지 변했구나. 지난번 왔을 땐 저 도관이 수리를 하기 전이었던 것 같은데.”
노인이 화제를 돌렸다.
“저 도관이 벼락을 맞았거든요.”
시종은 신이 난 투로 말했다.
“그 관주는 불여우가 둔갑한 거라 벼락을 불러들였대요. 그날 벼락이 무시무시했다고 그러더라고요. 뇌공(雷公: 천둥을 맡고 있다는 신) 나리를 직접 봤다는 사람도 있어요.”
하여간 민간에 도는 말은 늘 이렇게 과장이 섞여 있는 법이다. 노인은 껄껄 웃고 나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현묘관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현묘관을 보자 그날 먹은 사탕 귤이 떠오르며 입가에 신맛이 돌았다. 집으로 돌아간 후 부엌 찬모에게 똑같이 만들어 보라고 했지만 딱히 별다를 게 없어 보이던 사탕 귤인데 좀처럼 그 맛이 나지 않았다. 그날 자신이 아파서 더 맛있게 먹었던 것인지 그 간식에 따로 비법이 있었던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기왕 왔으니 저기 가서 물 한 사발 얻어 마셔야겠다.”
노인은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가며 말했다. 노인이 문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비질을 하고 있던 도동이 엇, 하는 소리를 냈다.
“배고파서 병이 났던 어르신이네요.”
도동이 버릇도 없이 불쑥 말해 버리자 옆에 있던 여도사가 얼른 손을 뻗어 제지하며 앞으로 나가 노인을 맞이했다.
“시주님.”
여도사는 예를 표했다. 노인 역시 도동의 말을 들었지만 그저 씩 웃어 넘길 뿐이었다.
“이번엔 배가 고파서 온 게 아니고 물이나 한 사발 얻어 마실까 해서 왔소.”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도동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빗자루를 내던지고 노인이 앉도록 얼른 자리를 깔아 준 다음 물을 뜨러 갔다.
“사매, 내가 무슨 좋은 걸 가져왔나 좀 봐.”
여도사 둘이 찬합을 들고 뒤쪽에서 웃으며 걸어 나오다가 회랑 아래에 앉아 있는 노인을 보고 역시 엇, 하며 놀랬다.
“어르신, 오셨네요. 마침 잘 오셨어요.”
그중 한 여도사가 얼른 인사했다.
“지난번에 산에서 만난 낭자가 여기 있거든요.”
노인과 노복은 깜짝 놀랐다.
“아, 그렇다면 잘됐군.”
노인은 얼른 일어서려고 하다가 그 낭자가 여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도로 앉았다.
“수고스럽겠지만 한번 볼 수 있겠냐고 도사님께서 물어봐 주시오.”
여도사는 네 하고 뒤쪽으로 갔다. 곧이어 도동이 물을 떠왔다. 물을 받아 마시려던 노인은 문득 맛있는 냄새가 훅 끼치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눈길은 여도사의 손에 들린 찬합에서 멈추었다. 막 뚜껑을 열어 사매에게 보여 주려던 참이었다.
“도사님, 그게 뭐요?”
노인의 물음에 여도사는 웃으며 찬합 안에서 둥그런 등자 하나를 꺼냈다.
“등자네요.”
여도사는 잘라 놨던 등자 껍질을 도로 덮어 만든 뚜껑을 열며 말했다.
“안에는 고기가 들어 있고요.”
뚜껑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노인은 저도 모르게 깊이 숨을 들이켰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갑자기 배고픔이 엄습했다. 여도사는 노인의 상태를 알아보고 웃으며 하나를 올렸다.
“드셔 보세요. 이게 무슨 고기죠?”
노인은 등자를 받아 쓱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해황(蟹黃: 게의 배속에 들어 있는 누런 알)이로군.”
게살을 이렇게 조리하다니 기발하군. 노인은 젓가락을 들어 한입 먹고는 환하게 웃었다.
“훌륭하구려, 훌륭해.”
노인은 훌륭하다는 말만 남기고는 더 이상 말할 새도 없이 등자를 먹어 치웠다. 멈칫하던 노복과 시종은 곧 크게 기뻐했다.
“정말 잘됐네요. 노야께서 드디어 입맛이 도시나 봐요!”
시종이 말했다. 여도사 셋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이 어르신한테 또 배고픈 병이 도졌군. 배고파서 병이 난 게 틀림없어. 여도사들은 탁자 위에 놓인 속이 텅 빈 등자 세 개와 손수건을 받아 입을 닦고 있는 노인을 연달아 봤다.
“여기에 흰죽 한 그릇을 같이 먹으면 더 좋겠는데.”
노인은 더 먹고 싶은데 아쉬운 듯 말했지만 도관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차밖에 없는데 드시겠어요?”
여도사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그럼 모처럼 먹은 진미의 맛이 희석될 거요.”
해황 등자 세 개로 배를 채운 노인은 기운이 나는 듯 손을 털며 일어섰다.
“이거면 됐소. 어서 집에 가서 흰쌀을 끓여야겠군. 진하게 끓여서 채소 무침이랑 한 그릇 해야겠소.”
노인이 한시도 못 기다리겠다는 듯 서두르자 노복과 시종은 얼른 길을 안내했다. 한동안 식욕을 잃었던 노인에게 이렇듯 간절한 밥생각이 난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여도사가 뒤쪽에서 급히 달려왔다.
“시주님, 이걸 어쩌죠. 그 낭자가 나가셨네요.”
여도사가 미안한 듯 말했다. 노인은 아차 한 듯 손으로 머리를 치며 자신이 왜 거기 앉아 있었는지 그제야 떠올렸다. 은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해황 등자 세 개에 까맣게 잊었구나. 나갔다고? 떠났단 말이지?
“공교롭게 됐구려.”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그 낭자는 어느 댁 분이오?”
여도사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사실 어느 댁 낭자라고 하긴 좀 그래요.”
도동의 대답에 노인은 이해할 수 없는 듯 음 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어느 댁 부인이신가?”
산촌에 사는 아낙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지 알면 말해 주시오. 그래야 사람을 보내 사례라도 하지. 의원 말로는 그날 제때 구했으니 망정이지, 늙은이라 한참을 병석에 누워 있을 뻔했다고 했소.”
그 사탕 귤의 효능이 그리 뛰어났단 말이야? 여도사들은 놀랐다. 그 몸종이 마음씨만 착한 게 아니라 손재주도 좋네.
“실은 낭자를 모시는 사람입니다. 몸종이에요.”
여도사의 대답에 노인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어느 집 몸종인데 그리 영특한 거요?”
“북정 사람입니다. 이름은 반근이고요.”
노인이 호기심에 묻자 여도사가 대답했다. 노인은 또다시 아, 소리를 내고는 무언가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야, 얼른 가시죠. 어느 댁 낭자인지 알았으니 사례하기도 쉽잖습니까.”
노복이 재촉했다. 모처럼 노인의 식욕이 돌아왔는데 지체할 순 없었다. 그러다가 먹고 싶은 생각이 달아나면 얼마나 아쉽겠는가. 노인은 껄껄 웃으며 여도사들에게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문 앞까지 마중을 나온 여도사 셋은 마차를 타고 떠나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기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기개가 범상치 않은 분 같아. 정말 정씨 가문에 사례하러 가면 그 댁에서도 반근 언니의 능력을 높이 살 테니 평생 바보의 시중을 들 일도 없겠네.”
한 여도사의 말에 나머지 두 여도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개가 범상치 않다고요? 엄청 가난한 분 아니에요? 매번 올 때마다 저렇게 굶주려 있잖아요.”
문 안으로 들어온 도동은 탁자 위에 놓인 물그릇과 등자 껍질을 보며 말했다.
“이게 정말 그렇게 맛있나?”
도동은 궁금증이 생기는 듯 등자 껍질을 들고 이리저리 쳐다봤다. 등자 껍질은 어느덧 차갑게 식었고 안에 들어 있던 고기는 다 먹은 뒤라 아까처럼 맛있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찌고 나서 색이 죽은 과일의 시큼한 향만 날 뿐이었다.
“그러게, 반근 언니 말로는 그 댁 아씨도 안 먹겠다고 했다는데. 바보도 안 먹는 게 맛이 있을 수가 있나?”
“네? 이것도 반근 언니가 만든 거예요?”
도동이 놀라며 물었다. 아까는 사저들이 찬합을 가져오는 걸 보면서도 제대로 묻지 못했다. 노인이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그 재주 좋은 몸종의 솜씨였구나.
“반근 언니가 저 어르신의 배고픈 병을 두 번이나 고쳐 줬네요.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만하네. 이 좋은 소식을 어서 반근 언니한테 알려야겠어요.”
얼른 안쪽으로 뛰어가려는 도동을 다른 여도사가 붙잡으며 말했다.
“일단 말하지 마.”
“왜요? 이거 좋은 일 아니에요? 이번 기회에 그 어르신한테 부탁하면 여기서 떠날 수 있잖아요.”
도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은혜를 갚겠다고 말하는 건 쉬워. 하지만 그걸 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
나이가 많은 여도사가 말했다.
“일단 반근한텐 말하지 않는 게 좋아. 그 어르신이 진짜로 고맙단 인사를 하면 반근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말만 그렇게 해 놓고 깜빡해 버리면 어떡해. 반근이 모르고 있어야 기대도 안 하지. 그래야 괴로워할 일도 없고.”
확실히 그랬기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반근 언니에게 좋은 소식이 있길 기다려야겠네요.”
도동이 웃으며 말했다.
산허리에 있는 소현묘관은 뚝딱뚝딱 소리로 시끄러웠다. 불에 탄 관주의 방은 손 관주의 뜻에 따라 새로 짓지 않고 싹 밀어 공터로 만든 다음 작은 정자를 지었다. 물론 손 관주의 뜻은 곧 정교랑의 뜻이었다.
건물을 새로 지을 필요 없이 낡은 건물을 새로 칠하고 보수하는 수준인 데다 손 관주가 품삯을 제때 넉넉하게 주는 덕에 공사 일정은 빠르게 진행됐다.
“15일이면 들어갈 수 있어요.”
반근이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려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정교랑은 산석에 앉아 있었다.
“곧 8월 15일이지?”
“네.”
정교랑의 물음에 반근이 대답했다. 정교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이제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 소현묘관을 바라보았다. 아니지, 이젠 소현묘관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지. 대와 소를 합쳐 큰 것은 ‘현묘’라 하고 그에 부속된 작은 것엔 ‘태평(太平)’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빠르네.”
정교랑이 말했다. 7월에 집을 나와 8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소현묘관에서 태평관으로 바뀌기까지 한 달여의 시간은 확실히 빠르게 흘러갔다.
중추절이 가까워지자 경성 거리는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술집과 찻집은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쉴 새가 없다시피 했고 자식들과 함께 노인을 모시고 구경을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거리에는 여자들이 눈에 띄게 늘었고 부잣집 마차가 줄을 이었으며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 물건을 파며 외치는 장사치들의 소리로 가득 찼다.
“반근 언니, 서둘러.”
한 몸종이 불렀다. 노점 앞에서 넋을 놓고 설탕 공예를 구경하던 반근은 얼른 대답한 후 찬합을 꼭 끌어안고 인파를 헤치며 몸종을 따라갔다.
“거리가 떠들썩하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15일이 임박하면 훨씬 더 떠들썩할걸.”
몸종은 웃으며 반근의 팔을 다정하게 잡아끌었다.
“언니는 그때 나와서 실컷 보면 되겠다. 우린 집에서나 달을 구경할 테지만.”
“내가 어떻게 나와. 다들 똑같은 처지인데.”
반근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어. 여섯째 공자께서 언니를 그리 좋아하시는데. 언니가 놀러 가자고 말만 하면 분명 데리고 나오실걸.”
몸종이 웃으며 말하자 반근은 얼굴이 빨개졌다.
“무슨. 공자님은, 그러니까 공자님은…… 나도 몸종일 뿐인걸.”
반근은 우물쭈물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게 무슨 감정인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몸종은 무슨. 공자님은 누구랑 식사하러 갈 때도 언니를 잊지 않고 데려가시잖아.”
“그야 공자님께서 기름과자(炸果子: 밀가루를 발효시켜 길쭉한 모양으로 만들고 기름에 바삭하게 튀긴 음식)가 드시고 싶어 그러지.”
반근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런 과자는 언니만 만들잖아. 그거면 됐지. 집안에 몸종이 한둘도 아닌데 공자님이 기억하시는 몸종이 몇이나 되겠어.”
몸종은 웃으며 반근의 팔을 잡아끌었다. 비위를 맞추려는 마음과 부러운 마음이 섞여 있었다.
“그러니 공자님께서 언니를 그리 먼 곳에서 데려오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