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40
교랑의경 440화
관료가 놀라 고개를 숙이고 살펴봤다. 책자에 기록된 필체와 표식을 확인한 관료는 더욱 놀란 눈치였다.
“이건, 분명 대인께서 직접······.”
“내가 뭐?”
유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잘랐다. 관료는 멈칫했다. 경성에서 일하는 관료치고 눈치 없는 자는 없었다.
“대인 말씀이 맞습니다. 3년 만에 시행되는 대규모 인사이동인 만큼 신중해야지요. 대조 확인도 철저히 하고요.”
관료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유평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유평이 나가고 나자 관료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책자를 살폈다.
“대체 뭐가 문제야?”
관료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옆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책자를 힐끔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아둔한 사람을 봤나. 이자가 누군지 좀 보시오.”
누구냐고?
관료는 다시 한번 진지하게 이름을 살폈다.
정동.
지방 관리가 한둘도 아닌데, 그 이름을 어찌 다 기억하나.
“정(程)!”
옆에 있던 관료가 귀띔을 해주며 손으로 황궁 안쪽을 가리켰다.
“서북 일에 대해 벌써 잊으셨소?”
관료는 순간 퍼뜩 깨달은 듯 안색이 싹 변하여 얼른 붓을 들고 정동의 이름에 갈고리 표시를 했다. 그러고도 불안한지 붓으로 이름 위를 두어 번 칠하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
“승진 좋아하네. 그런 딸을 낳아 놓고선. 멸문의 화를 입을 날이 얼마 안 남았거늘.”
관료가 중얼거렸다.
“그야 모르는 일이지. 서북 일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잖소”
옆에 있던 관료가 말했다.
하긴 그렇군.
“그런데 번개를 어떻게 불러들일지 궁금하긴 하군.”
“나도 벼락에 맞는 사람을 본 일은 아직 없소.”
관청 내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서북쪽을 쳐다봤다.
서북 일은 어떻게 되려나?
경성 사람들이 기대하는 눈길로 서북쪽을 쳐다보고 있던 그때, 워낙 먼 거리인지라 서북에 있던 이들은 이번 일의 성패가 자신들에게 달려 있음을 알지 못했다.
급보로 보낸 조정의 공문은 아직 당도하기 전이었지만, 그렇다고 용곡성의 분위기가 마냥 편하고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유규가 관청에서 끌려나가며 소리소리 질러대자 지나가던 이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보긴 뭘 봐!”
병사 중 우두머리가 호통을 쳤다. 구경하려고 몰려들던 백성들은 얼른 몸을 움츠리며 흩어졌다.
“서사근을 풀어 줘! 그 전엔 못 돌아간다!”
유규는 소리를 지르며 코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쓱 닦았다. 병사들이 냉랭한 눈길로 유규를 쏘아봤다.
“꺼져.”
병사들의 말과 행동엔 거침이 없었다.
“범강림을 내쫓은 것도 모자라 이젠 서사근까지 잡아가다니, 대체 뭐가 무서워서 그러나? 서무수 형제의 죽음이 수상하잖아. 강문원 그 새끼는 뭘 무서워하는 거야?”
유규가 소리를 질렀다.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하고 있던 백성들은 유규의 말을 듣자마자 뿔뿔이 흩어졌다.
이런 일은 구경하면 안 돼. 듣지 말아야 할 걸 듣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간 경을 치거든. 서쪽 오랑캐의 세작이라는 죄명을 붙여 관청에서 잡아가면 감옥에서 살아서 못 나와.
동시에 누군가가 유규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체포해라. 군령을 거역한 죄로 하옥한다.”
병사 중 우두머리가 소리치자, 병사 일고여덟 명이 우르르 달려들어 유규를 포위했다.
그때 긴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말을 탄 무리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말에 탄 이가 외쳤다. 고개를 돌리던 병사들이 얼른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섰다.
“주 대인, 이자가 술에 취해 관청에서 난동을 부리기에, 명을 받들어 체포했습니다.”
병사 중 우두머리가 대답했다. 주봉상은 딱히 대꾸하지 않고 훌쩍 몸을 날려 말에서 내렸다. 옆에 있던 조성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다. 데려가 술이나 깨게 해라.”
병사들이 얼른 대답하며 유규를 부축해 일으켰다. 병사 중 우두머리가 뭐라 대꾸하려는데, 주봉상이 이미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비켜라.”
주봉상의 측근들이 소리치자, 병사 중 우두머리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비켜섰다.
“부총관, 그자를 체포하다니 무슨 뜻이오?”
관청 안. 주봉상이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탁자 앞에 앉은 강문원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전에는 부총관이라는 호칭이 몹시도 귀에 거슬렸지만, 지금은 평온하기만 했다.
늦가을 메뚜기는 뛰어 봤자 며칠이라고, 네놈이 끝장날 날도 머지않았구나.
“서사근은 소란을 피워 군의 사기를 어지럽혔으니, 군법에 따라 처벌함이 마땅하오.”
강문원이 앞에 있던 서책을 내던지며 대꾸했다. 주봉상이 서책을 받았다.
“그자가 무슨 소란을 피웠단 말이오? 괜히 일 만들지 마시구려. 성가신 일이 아직도 부족한 거요?”
서책을 넘겨 보던 주봉상은 돌연 안색이 싹 변해 성을 냈다.
“이게 뭐요?”
“조정에서 급하다고 해서, 내가 서둘러 조사를 마쳤소.”
강문원이 웃으며 주봉상을 향해 아래턱을 쳐들었다.
“어쨌든 날 탄핵한 것이니, 내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최선을 다하려면 일을 피하는 게 옳지 않겠소?”
주봉상이 손에 든 서책을 도로 내던지며 말을 이었다.
“이게 뭐 하자는 거요? 대체 뭘 조사했고, 뭐가 모함이란 거요?”
“서사근을 조사했지. 그자가 당사자니 그자를 조사해야 하지 않겠소? 그자는 전장에 나가지도 않았소. 직접 본 게 아니라 남한테 들은 말만 하고 있는데, 그게 유언비어로 모함하는 게 아니면 뭐요?”
주봉상은 어이가 없는지 도리어 웃음을 터트렸다.
“그자는 전장에 나가지 않았지만, 전장에 나간 이들도 있잖소. 직접 본 게 아니라서 유언비어라니, 그럼 직접 본 사람의 진술은?”
강문원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손으로 탁자를 쓸며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고 내가 다 물어봤소.”
강문원이 또 다른 서책 한 권을 꺼냈다.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부터 열까지 명명백백히 말했소이다. 어떤 정보를 받았고, 어떤 전술을 구사했는지.”
강문원의 얼굴엔 어느덧 웃음기가 걷혀 있었다. 강문원이 ‘전술’이라는 단어에 힘을 싣자 주봉상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참, 감찰 대인을 깜빡했군. 내가 물어보는 게 피차 불편하다는 건 대인도 잘 알 거요. 대인은 직접 써 주시구려.”
강문원이 손에 든 서책을 건네며 말했다.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직접 가서 물어보시든가. 누구에게든 가서 똑똑히 물어보시오.”
강문원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자, 주봉상이 굳은 표정으로 서책을 받았다.
“조언 고맙소이다.”
주봉상도 힘을 실어 천천히 말했다.
주봉상이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편청에서 기다리던 방중화가 들어와 불안한 기색으로 예를 표했다.
“대인, 소관은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방중화가 물었다.
“가 보게.”
강문원이 대답했다.
“그, 그런데 주 대인이, 소관에게 뭘 하문하진 않으실까요?”
방중화가 불안한 듯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주봉상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묻지 않을 걸세.”
강문원 역시 바깥쪽을 쳐다보며 냉랭한 웃음을 지었다.
“감히 못 묻겠지.”
“네, 대인. 묻고 말고 할 게 뭐 있겠습니까. 무슨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고······.”
방중화도 얼른 강문원을 따라 웃음을 지었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문원이 서슬 퍼런 눈길로 노려보았다. 방중화가 흠칫 놀라며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네가 성을 버리고 먼저 도망친 일 말이더냐?”
강문원의 냉랭한 말투에 방중화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썩 꺼져라. 또다시 나라에 불충한 마음을 품었다가는 군법이 용서치 않을 것이야.”
강문원이 혐오와 경멸이 담긴 눈길로 말했다. 방중화는 머리를 세 번이나 땅에 찧으며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올린 후 부랴부랴 일어나 자리를 떴다.
“전부 방중화 때문에 일어난 화인데······.”
옆에 있던 막료가 말했다.
“이게 어찌하여 화란 말인가?”
강문원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을 끊었다.
“저자가 명을 거역하기라도 했어? 임관보에 안 가길 했나? 후방에 제때 소식을 안 전하길 했나? 수하들을 데리고 성을 안 지키길 했나?”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막료들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자 때문에 일어난 화란 말인가? 저자가 전사하지 않은 게 죄란 말이야?”
강문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치열한 싸움 끝에 성을 지켰네. 사상자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지. 그 몇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산 자를 두고 겁박해도 된다는 말인가?”
막료들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모아 그럴 순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가 아는 이치지요. 우리처럼 변방을 지키며 직접 전장에 나가는 사람은 다 압니다. 하지만 경성에서 잠화를 머리에 꽂고 말이나 타고 다니며 거리를 노니는 문관 나리들은 모르죠. 그자들 보기엔 우리가 죄다 전사하는 게 당연하거든요.”
누군가가 말했다. 강문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리 같은 무장은 이겨도 공을 바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지면 바로 문책을 받네. 걸핏하면 탄핵하고 질책하지. 이번에 내가 인정해 봐. 앞으로 무슨 일만 있으면 죄다 경성으로 달려가 소란을 피울 텐데, 그럼 군영 꼴이 뭐가 되겠나!”
막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 감찰이 무원산 형제들을 두둔하는 것 같던데요.”
막료 하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뭐? 무원산 형제들 때문에 제 앞날까지 내팽개칠 수 있겠나? 당시 우리 쪽 정찰 실수로 계획이 어긋나 큰 화로 번졌고, 허둥지둥 적에 맞서다가 엄청난 손실을 초래한 끝에 승리했다고 해? 그런 일이 밝혀져 봤자 그자한테 좋을 게 뭐 있지?”
강문원은 냉랭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자가 나와 이렇게 오래 싸우고 있는 이유가 뭔가? 둘 다 서북에서 쫓겨나고 싶어서 그러겠어? 본인도 본인이지만, 다른 이들도 생각해야지!”
문관이든 무관이든 관직 사회에 발을 들이는 일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족쇄를 차는 것과 같았다. 평생에 걸쳐 높이,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기 마련이었다. 자신의 일생뿐 아니라 아들과 손자에게도, 대대손손 부귀영화가 이어지길 바랐다.
“가족을 위해 동산의 맹세까지 저버리다니, 주봉상이 제아무리 대단해도 사안(謝安: 동진東晉의 정치가. 동산東山에서 은거하다가 관직에 나가 크게 성공함)에 비할 순 없지 않겠나.”
강문원이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인! 대인!”
주봉상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유규가 얼른 달려갔지만, 주봉상의 측근들이 손을 뻗어 막았다.
“대인, 서사근을 위해 나서 주십시오.”
주봉상이 유규를 힐끔 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대인!”
유규가 격분하며 주봉상의 측근들을 물리치고 달려들었다.
“대인!”
주봉상이 걸음을 멈췄다.
“서사근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니며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민심을 어지럽혔으니 벌해야 마땅하다.”
“대인, 유언비어를 퍼뜨린 적 없습니다. 전부 사실입니다. 사실이라고요.”
유규가 소리쳤다.
“증거는?”
주봉상이 고개를 돌리고 유규를 보며 물었다. 유규는 얼른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증명할 수는 있고?”
주봉상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서사근은 임관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고, 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두 사람의 말을 어찌 믿지? 범강림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임관보 전투에 참여한 이천여 명 중 생존자는 불과 백여 명이다. 범강림 혼자 떠들 뿐 나머지 백 명은 말이 없어. 유규, 이래서야 조정을 어찌 설득하겠느냐? 백성들이 믿겠느냔 말이다.”
유규가 다시 입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우물쭈물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 세상에 그리 쉽게 가릴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나.”
주봉상은 다시 한번 유규를 힐끔 쳐다보고,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유규도 쫓아가지 않았다. 토기 인형처럼 거리에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 세상사가 그리 쉽진 않지······.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은 길가에 멍하니 넋을 놓고 선 사내를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고는 알아서 피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