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47
교랑의경 447화
못 본 지 2년이나 지났지만, 정 낭자는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정 낭자는 여전히 말수가 적지만, 그 옆에는 항상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붙어 있어.
“우리는 친하지 않으니까, 내가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진단랑이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나도 그래요.”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나무라는 말 대신, 자신과 똑같다는 말을 들은 진단랑이 눈을 반짝거렸다. 진씨 가문의 여종들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웃었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솜씨가 제법이네.
“그래도, 말하다 보면 우리가 할 얘기가 생길걸요?”
진단랑이 활짝 웃고 정교랑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사실 어려울 것도 없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되니까.”
정교랑이 진단랑의 말에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진십팔랑은 한 발자국 뒤에서 다 큰 소녀와 어린아이가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게 어딜 봐서 친하지 않다는 거야. 예전이랑 똑같은데 뭘.”
진십팔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중얼거렸다.
정교랑이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정교랑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 진십팔랑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정 낭자, 반드시, 다 잘 해결될 거예요.”
“네, 다 잘 해결될 거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마차가 떠나가는 것을 하염없이 보던 진십팔랑은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옆에서 재잘대는 진단랑을 따돌리고 혼자 진 노태야의 거처로 왔다. 진소도 진 노태야와 함께 있었다.
“아버지, 정 낭자가 도움을 청하러 온 건가요?”
진십팔랑은 다짜고짜 질문을 던지고는 진소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애원하는 말투로 부탁했다.
“아버지, 정 낭자 좀 도와주세요.”
진소는 진십팔랑의 말에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정 낭자가, 나를 도우러 온 것이다.”
진십팔랑은 뭔가를 잘못 들은 것처럼 멈칫했다.
“아버지를 돕는다고요? 정 낭자가 아버지에게 무슨 도움을 주는데요?”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를 치하할 수 있게 하는 것.
진소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이 일을 진십팔랑에게 말해 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게 도대체 누가 누구를 돕는단 말이지?
“그래. 정 낭자가 너를 도와주는 것이지.”
진 노태야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진소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때로는 도와줄 기회를 주는 게, 가장 큰 도움이기도 한 법이야.”
도와줄 기회가 제일 큰 도움이 된다고? 무슨 뜻이지?
진십팔랑이 의아한 얼굴로 진소를 쳐다보았지만, 진소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소원한 관계가 될 테지.
“이게 무엇이오?”
근정전 안. 상소문을 올리는 진소를 보며 황제가 물었다.
“무원산 다섯 형제의 포상에 대한 안건입니다.”
진소가 대답했다. 한쪽에 꿇어앉아 있던 진안 군왕과 대황자가 진소를 쳐다보았다. 대황자의 표정에서는 놀라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지금 이 시국에 그 얘기를 꺼내?
황제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상소문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알겠소.”
황제의 대답을 듣고도 진소는 물러나지 않았다.
“폐하, 중서문하성에서 이미 심의된 안건이니, 부디 윤허해 주시옵소서.”
“정녕 그리 급하단 말인가!”
진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제가 목청을 높여 호통쳤다.
“은혜를 갚는 일이, 한시도 지체할 수 없을 만큼 급한 일이냐고 물었소.”
대전 안에 적막이 흘렀다. 황제가 격노하는 모습을 본 진안 군왕과 대황자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섰다.
“폐하, 당초 정 낭자가 부친의 병을 치료한 뒤, 신이 집 한 채를 치료비로 지불했습니다.”
진소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는 황제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도, 사죄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 낭자에게 신세 진 게 없단 말이오?”
황제가 냉소를 보이며 물었다.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정 낭자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의원이니 병을 치료했을 뿐이고, 신은 병자를 위해 상응하는 치료비를 지불했으니, 각자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하였사옵니다.”
황제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 낭자가 그런 말까지 했다고? 그대의 눈에도 그 낭자는 보통내기가 아니겠구려.”
비꼬는 듯한 황제의 말에 진소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가엾기도 합니다.”
가엾다고?
황제는 냉소를 지을 뿐, 진소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절망이 극한에 달한 게 아니라면, 어째서 다른 사람을 믿지도, 남에게 의지하지도 않겠습니까?”
진소가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치를 뻔히 꿰뚫고 있으면서도 내려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정 내려놓을 수 있으려면 더 이상 퇴로가 없다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했다.
진소의 말을 들은 진안 군왕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폐하께서도 정 낭자에 대해 들으신 얘기가 있을 겁니다. 선천적으로 바보로 태어난 탓에, 집안사람들은 정 낭자를 물에 빠뜨려 익사시키려고 했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지만, 모친을 여의고 부친에게 버림을 받았지요. 바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정 낭자를 기피했습니다. 정 낭자는 집과 가족이 있음에도 홀로 외로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천하에 가엾은 사람이 어디 그 낭자뿐이란 말이오? 아무리 가엾다고 한들, 그게 소란을 피우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법이지. 그대가 자비심을 베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나, 국법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잖소.”
“맞습니다. 신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은 정 낭자에게 빚진 게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갚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은혜를 갚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진소가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다. 황제는 여전히 언짢은 듯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면서도, 진소의 말을 막지는 않았다.
“2년 전 탈영병 사건 때, 정 낭자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바로 신이었습니다.”
진소가 한숨을 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폐하, 신은 그 일을 도울 수 없었습니다.”
2년 전의 일을 잊고 있었던 황제는 진소의 말을 듣고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는 진소가 정 낭자를 돕지 않았지.
“심지어 신은 국법과 군율은 거역할 수 없는 지엄한 것이라고 하며 정 낭자를 나무라기까지 했습니다. 비록 폐하께서 그 일에 대해 현명한 판단을 내리셨지만, 신은 지금까지도 탈영병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진소가 고개를 들면서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 황제는 진소가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가도록 두었다.
“당시 신이 정 낭자의 청을 거절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정 낭자가 경성을 떠나게 되어, 신은 보은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되었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2년이 흐른 지금 정 낭자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고, 이번에도 정 낭자는 가장 먼저 신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 역시 신이 정 낭자 편에 서서 도울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신은 정 낭자의 청을 받고, 몹시 놀랐습니다.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신중, 또 신중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은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수하에게 서북에 관련된 일을 몇 마디 묻기만 했습니다. 나중에 천천히 조사해 볼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노정이 신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조사를 시작했지요. 그다음의 일들은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들이고요.
폐하, 신은 이번에 정 낭자의 청을 들어주기는커녕,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폐하께서 그 낭자가 등문고를 쳐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고, 백성들을 선동해 일을 키운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정 낭자를 벼랑 끝으로 몰아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시끄럽게 키운 장본인은 바로 신입니다. 모든 것이, 신이 낭자의 청을 거절했던 탓이지요.”
진소가 소매 안에서 상소문 하나를 더 꺼내어 허리를 숙이고 황제에게 바쳤다.
“신, 사직을 청하옵니다.”
사직?
진안 군왕과 대황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진소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진안 군왕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조정 대신이 사직을 청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렸지만 거절당하여 오기를 부릴 때라든가, 어사에게 탄핵을 받아 자존심을 세울 때라든가, 관직의 품계를 올려 달라고 시위를 할 때라든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시인하고 사죄할 때라든가.
물론, 이런 경우는 모두 보여주기식에 불과했다.
하지만 진소는 조정에 들어온 이후, 단 한 번도 사직을 청한 일이 없었다. 보여주기식으로도 그러지 않았다. 사직을 청하기는커녕, 어사에게 탄핵을 받을 때조차도 진소는 자리를 피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당당하게 조회에 참석했다.
– 성은을 입었으니, 나랏일에 정성을 다하고,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이는 당초 전시(殿試)에서 황제의 낙점을 받은 후, 황제를 알현하던 자리에서 진소가 올렸던 말이었다. 진소는 조당에 발을 들인 이후로, 지금껏 꾸준히 그 말을 지키며 강직하고 태산같이 굳건한 모습을 보였다. 나랏일에 대해서는 결코 옳은 결정을 포기하거나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황제는 서서히 표정을 누그러뜨리더니 작은 탄식을 뱉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허리를 숙이고 있는 진소를 잠자코 쳐다보았다. 기세가 드높고 의기양양하던 과거의 진소가 아닌, 구레나룻이 하얗게 센 진소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사직을 하기 전에, 폐하께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를 치하해 주실 것을 청하옵니다. 서북의 다른 일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일은 증거와 증인이 엄연한 안건이기에 폐하께서도 윤허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니 신은 국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그 낭자를 위해 작게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이는 국법과 규율을 어기지 않고, 폐하의 명을 거스르지도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진소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진소가 앞서 올렸던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 치하에 관한 상소문을 펼쳤다.
잠시 후, 진소가 사직을 청했다는 소식이 온 황궁에 퍼졌다.
“개도 급하면 담장을 뛰어넘는다지만, 이렇게까지 떼를 쓰면서 행패를 부려? 대전이 코앞이거늘, 장수를 바꾸는 일이 얼마나 사기를 떨어트리는 일인지 몰라서 저러는 게야? 국사를 뒷전으로 내팽개치고 그딴 수작으로 폐하를 위협하다니. 쥐꼬리만 한 재간마저 바닥이 난 모양이구나.”
고능준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대인, 서북에 관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듣기로는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 치하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수하가 가까이 와서 말했다. 고능준이 흠칫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그 일 때문이라고? 그럴 리가 있나? 이 시국에 그런 사소한 일을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다고?”
“정말 그 일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도 즉시 치하하라고 명령하셨고요.”
수하가 덧붙여서 설명했다.
진소 그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고능준이 인상을 쓰면서 생각했다.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째 최근 들어 진소 그놈의 행적이 영 괴상하단 말이야. 관직이 높아질수록 진소와 대면할 일이 잦아지는데, 생각할수록 낯선 사람처럼 이상해. 차라리 예전엔 더 파악하기 쉬웠던 것 같아.
알면 알수록 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인 건가?
“이번 싸움은 자신이 필패란 사실을 알고 있으니, 자신이 정 낭자와 작당한 일을 폐하 앞에 툭 까놓고 인정하려는 건 아닐까요? 폐하께 옛정을 생각해서 이번엔 너그러이 넘어가 달라고 말입니다.”
막료 하나가 말했다.
정말 그뿐일까?
고능준은 수염만 쓰다듬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 불안함이 남아 있었다.
이미 진소에게 예상치도 못하게 한 방 먹었어. 천만다행으로 하늘이 내 편이었으니 망정이지······.
“대인, 누가 이번 전투를 일부러 일으킨 것도 아니니, 어차피 부인할 순 없잖습니까. 어찌 됐든 폐하께서도 이런 때에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생각은 없으실 테고요. 주봉상이나 진소나 일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일 겁니다.”
막료가 말했다.
이치대로라면 그렇지.
고능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심히 지켜보게.”
고능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마디 보탰다.
“그리고 그 강주 바보도.”
강주 바보 따위가 고 시제(侍制)의 걱정거리가 되고, 진 상공과 같은 선상에서 논의되다니. 강주 바보는 조상님의 은덕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해.
막료가 속으로 생각하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