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49
교랑의경 449화
대황자가 상소문을 내려놓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바마마, 내일은 아바마마의 탄신일이니, 일찍 쉬시는 건 어떻습니까.”
대황자가 말했다.
“맞습니다, 폐하. 요 며칠 계속 쉬지도 못하셨으니, 잠시 쉬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진안 군왕도 거들었다. 황제가 웃으며 눈을 떴다.
“그래. 하필이면 짐의 생일에 오랑캐가 짐에게 이리 큰 선물을 줬구나.”
황제는 웃고 있으면서도 냉랭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올리지? 경서나 사서에는 비슷한 사례가 있지 않았을까?
대황자는 전에 읽었던 서적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훑었다.
“생각해 보니, 폐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큰 선물인 줄도 몰랐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폐하께서는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갑옷을 입으셨는데, 오랑캐 왕족 따위가 어찌 폐하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진안 군왕을 쳐다보자, 진안 군왕은 턱을 들면서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였다. 황제는 그런 진안 군왕의 모습을 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그 일은 짐이 어려서 잘못했던 일이니라. 지금 언급할 일도 아니고, 영예롭게 여길 것도 못 돼.”
하지만 진안 군왕은 계속해서 존경과 흠모가 담긴 표정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남들 앞에서는 그 얘기를 꺼내지 말아라. 대신들이 죄다 입을 모아 훈계했어. 무릇 병기는 곧 흉기(兵子, 凶器也)고 어쩌고 하면서.”
황제는 진안 군왕을 나무라기는커녕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황제의 말을 들은 대황자가 눈을 반짝이면서 재빨리 황제의 말을 이었다.
“하여 진정한 군자는 부득이한 상황에서만 병기를 드는 법이지요(聖人不得已而爲之).”
그때 대신들은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황제에게 삿대질해가며 침이 마르도록 훈계를 했었다. 이미 수십 년이 지난 일이었지만, 황제는 아직도 그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대황자가 그때 들었던 말을 외쳐내니, 황제의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전 안에 괴이한 적막함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적막감에 대황자는 어쩔 줄을 몰랐다. 뭐라 말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대황자는 막막한 마음에 입술만 달싹거렸다.
“폐하, 여기 흥미로운 얘기가 있네요. 전 이제야 알았습니다.”
진안 군왕이 갑자기 나지막한 탄사를 뱉으면서 실내의 적막감을 깨트렸다.
“무엇을 말이더냐?”
황제가 물었다.
“말편자라는 거, 무원산 형제 중 한 명이 만들었던 거군요.”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무원산.
다소 좋아지던 황제의 안색이 다시금 굳어졌다. 황제는 자신의 앞에 꿇어앉은 진안 군왕과 대황자를 훑어보았다.
두 녀석도 참.
대황자는 자신의 말이 왜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는지는 몰랐지만, 황제가 싫어하는 무원산 얘기를 꺼낸 진안 군왕을 보고는 남몰래 고소하다는 눈빛을 지었다.
“짐이 피곤하니, 인제 그만 물러가거라. 쌓여 있는 상소문들을 당장 다 볼 순 없으니, 잠시 쉬어야겠다. 혹시 모르지, 짐의 생일이 지나면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황제가 말했다. 대황자와 진안 군왕이 서둘러 예를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내시 한 명이 상소문 하나를 들고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중서문하성에서 올린 보고입니다. 폐하께서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황제가 내시의 상소문을 받아 펼쳐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는 화가 나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거 참.”
황제가 상소문을 탁자 위로 던지면서 말했다.
“죄다 오기를 부리겠다고 난리구나.”
허리를 숙인 채 천천히 뒷걸음질로 물러나던 진안 군왕은 내시가 자신에게 입 모양으로 말하는 것을 곁눈질로 보았다.
정 낭자······.
“폐하, 무슨 일입니까? 또 강문원에 관한 논쟁입니까?”
진안 군왕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 대황자도 진안 군왕을 따라 걸음을 멈추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아바마마, 하루 이틀 안에 결론을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차차 논의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대황자가 재빨리 한마디 거들었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무원산 형제 중 하나인 범강림이 짐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는구나.”
황제가 비웃으며 했던 말을 반복했다.
“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선물이라.”
황제의 입가에 걸린 냉소를 본 대황자는 영리하게 입을 다물었다.
“말편자처럼 희귀한 물건일까요?”
진안 군왕은 황제의 비꼬는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호기심 담긴 말투로 물었다.
말편자라······.
뭐라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황제의 눈빛에 변화가 생겼다.
“말편자가 뭐 희귀하다고.”
대황자가 언짢은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진안 군왕이 대황자를 쳐다보면서 웃었다.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전하, 보기에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말편자 덕분에 말굽이 상해서 버려지는 말이 매년 천 필 이상 줄었습니다. 군에서 버려지는 말이 준다는 것은 곧 매년 천 필 이상의 군마를 거저 얻는다는 뜻이지요.”
“천 필이라 한들, 말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대황자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됐다. 그만하고 물러가거라.”
황제가 입을 열었다. 대황자와 진안 군왕은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 빠르게 물러났다.
대전 안이 조용해지자 황제가 탁자 위에 놓인 상소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원산 형제 중 한 명이 말편자를 만들어 낸 거라고? 그때 말편자를 만들어 낸 사람의 이름이, 이름이, 뭐였더라?
말편자라······.
황제가 상소문을 펼쳤다.
경왕의 궁 안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당 안에서 여럿이 축국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 끌리지 않는 짧은 옷을 입은 진안 군왕이 소매를 동여매고 외쳤다.
“육가아, 육가아! 이쪽으로, 이쪽으로, 나한테 줘!”
공을 차면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던 경왕은 당연히 진안 군왕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혼자서 공을 굴렸다. 그런데도 진안 군왕은 환하게 웃으며 경왕의 뒤를 따라 뛰어다녔다.
한참을 뛰던 경왕이 육중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육가아, 이리 와서 좀 더 놀자.”
진안 군왕이 이리저리 뛰면서 외쳤다. 하지만 경왕은 진안 군왕의 말을 무시한 채 바닥에 드러누워 아무렇게나 발을 휘둘렀다.
결국 진안 군왕은 경왕을 어르고 달랜 끝에 어렵사리 욕탕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어떻게 됐느냐?”
진안 군왕이 경왕의 몸에 따뜻한 물을 끼얹어 주며 내시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윤허하셨습니다. 내일 범강림이 선덕문 앞에서 폐하를 알현하기로 하였습니다.”
내시가 조용히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육가아, 그 여인이 폐하께 어떤 선물을 할지 궁금하지 않아?”
목욕통 안에 앉아 있던 경왕은 진안 군왕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장난감을 쥐며 물장구를 쳤다.
“아마 무시무시한 살인 병기일 거야.”
진안 군왕이 경왕의 머리카락을 묶어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직접 볼 수 없는 게 참 아쉽긴 한데, 뭐 아무렴 어때.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텐데.”
진안 군왕이 수건을 가져와 경왕을 돌돌 감싸자, 궁인들이 힘을 합쳐 경왕을 안고 나갔다.
“내일이,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진안 군왕이 중얼거렸다.
동이 틀 무렵, 이른 시간임에도 진십팔랑은 자매들과 진소 부인에게 둘러싸여 대청 안에 앉아 있었다. 대청 안은 여인들의 웃음소리와 잡담 소리로 떠들썩했다.
“옷이 너무 칙칙한 거 아니야? 좀 화사한 옷으로 바꿔 입는 건 어때?”
“비녀도 그렇고. 머리 장식이 너무 적어.”
“머리 장식 하나만 더 달자.”
자매들이 진십팔랑의 옷과 장신구를 보면서 재잘댔다.
“박양 군주를 따라가는 것뿐이니, 이 정도면 충분해. 어쩌면 폐하의 용안을 못 뵐 수도 있는걸.”
진십팔랑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진십팔랑이 입은 옷은 2년 전에 입었던 양식 그대로 지은 옷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치맛자락과 허리춤에 금색 꽃을 수놓아 생동감 있으면서도 단아한 미가 돋보인다는 것이었다.
이 옷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힘이 있어.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진십팔랑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면, 나한테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일지도.
“이제 가야겠다. 군주께서 날 기다리게 할 수는 없잖아.”
진십팔랑이 몸을 일으키고 자매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문을 나섰다.
이제 난 준비됐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궁금해지네.
해가 중천에 뜬 시각, 황제가 대신들을 데리고 선덕문 앞에 멈춰 섰다. 미리 나와 질서정연하게 황제를 기다리고 있던 문무백관과 멀리서 들려오는 백성들의 환호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환호 소리를 듣는 일이 일 년에 한 번 정도로 드문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황제는 환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무척이나 기뻤다.
밤낮없이 국사를 돌보고 조정에서 대신들과 끊임없이 논쟁하는 것도 모자라 변방에서도 골치 아픈 일이 쉼 없이 밀려 들어오는 천자의 자리지만, 천하를 손아귀에 쥐고 다스리는 느낌은 늘 사람을 도취시켰다.
“진 상공도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도 안 나오다니.”
뒤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리는 소리에 황제의 미소가 살짝 굳어졌다.
황제는 이미 두 번이나 진소의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소는 계속 집에서 칩거하며 황제의 탄신일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게 다 그 신의 낭자니 뭐니 하는 여인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협박의 이점을 만백성이 맛봤으니, 죄다 따라 하려 드는군.
짐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선물을 준비했다?
이 몸이 만백성 앞에서 너희에게 장단을 맞춰 줘야 한단 말이더냐?
황제가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고 하자, 대신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폐하, 선물을 준비한 사람을 보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말씀을 번복하려 하시옵니까.”
중서문하성의 대신이 황제에게 직언을 올렸다.
그리고 이놈의 중신들도 그래. 어째 점점 더 엇나가는 것 같군. 중서문하성만 해도, 짐의 조서를 반려하는 일이 수없이 늘었어.
“진 대인이 오지 않았는데도 중서문하성의 관리들이 본분을 다하네.”
누군가 무심코 수군거리던 소리가 황제의 귓가로 들어왔다. 황제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래, 좋다. 네놈들 연극에 짐이 끝까지 장단을 맞춰 주마.
미간을 찌푸린 황제가 몸을 돌리고 천천히 말했다.
“범강림을 부르거라.”
성문 위에서 한 사내가 내시의 안내를 받으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성문 아래에 있던 백성과 관리들은 그를 보지 못했지만, 성문 위에 있던 황족 종친들과 대신들은 그를 눈여겨보았다.
박양 군주의 뒤에 서 있던 진십팔랑은 ‘무원산’이라는 세 글자를 듣자마자 놀라 고개를 들고 성문 위를 올려다보았다.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는 사내는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보잘것없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겨우 저런 사람을 위해서 정 낭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키운 거라고?
범강림이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황제가 자신과 말도 섞고 싶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아는지, 그는 큰절을 올린 직후에 곧바로 입을 열었다.
“소인, 폐하의 은덕에 감사드리옵니다. 소인은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죽음을 불사하겠습니다.”
범강림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이쿠, 그러지는 말아라. 네놈들 목숨이 얼마나 값진 것인데, 죽기에는 아깝지.
황제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물론 명색이 천자인데 만백성 앞에서 일개 평민에게 인상을 쓸 정도로 소인배는 아니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애로운 미소를 짓자, 내시들이 서둘러 범강림에게 물러나라 손짓했다. 하지만 범강림은 다시 한번 큰절을 올리며 물러나지 않았다.
“폐하, 소인은 몸이 불편하여, 폐하를 위해 전장에 나가서 적군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하여 소인이 폐하께 올릴 선물을 하나 준비했사옵니다. 부디 폐하께서 소인의 선물을 받아주시어, 폐하의 위세를 떨치게 해 주시옵소서.”
황제는 곁눈질로 범강림의 두 손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뭘 선물하려는 거야? 만수무강하라는 시라도 한 수 지어 왔나? 아니면 그 신의 낭자한테 복이 들어오는 점괘라도 알아 왔나? 그것도 아니면, 짐이 불로장생할 수 있는 묘약이라도?
황제가 속으로 한껏 비웃으면서 말했다.
“그리하거라.”
“소인이 폐하께 올리는 선물은 무기이기에, 폐하의 윤허 없이는 감히 올릴 수 없습니다.”
무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황제는 갑자기 머릿속에 말편자가 떠올랐다.
“어떤 무기더냐?”
황제가 주저하다가 물었다.
“쇠뇌입니다.”
범강림이 대답했다. 그 대답에 같잖다는 표정을 짓는 이도 있었고,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었다.
“대단한 성인께서 쓰셨던 쇠뇌인가?”
“에이, 신선이 썼던 거겠지.”
성문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범강림을 비웃으며 나지막이 농담을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