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55
교랑의경 455화
“이 사람이, 정말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거야?”
누군가가 배를 잡고 하하 웃었다. 무릎을 꿇었던 서생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비석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취했어.”
서생은 떨리는 손으로 비석을 매만지면서 그 위의 이름을 읊었다.
“서무수.”
취한 게 아니라, 뭐에 홀린 것 같은데?
주위에 있던 서생들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무릎을 꿇은 서생에게 괜찮냐고 물었지만, 그 서생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비석 위를 매만지면서 손가락으로 글씨를 따라 그렸다.
“서무수.”
무릎을 꿇은 서생은 끊임없이 같은 이름을 되뇌었다.
도대체 서무수가 누군데 그래?
의아해하며 비석으로 시선을 옮기던 서생들은 전부 그대로 얼어 버렸다.
“여, 여, 여긴 분명 무명 비석이었는데, 언제 글씨가 새겨진 거지?”
무덤을 발견했던 서생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비석을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서무수의 이름을 읊었다.
“서무수.”
다른 서생들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머지 비석 위의 이름을 외쳤다.
“범석두!”
“서납월!”
“서봉추!”
“범삼축!”
황공한 기색이 역력한 서생들은 비석 위의 이름을 외치면서 좌불안석한 모습으로 무덤 주위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서생 무리가 넋이 나간 모습으로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서 있자, 지나가던 행인들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왜들 저러는 거요?”
행인들은 서생들이 서 있는 곳이 무덤 앞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더욱 놀랐다. 한동안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 앞이 시끌벅적하긴 했지만, 술고래들이 독한 술 냄새라도 맡겠다며 무덤을 찾아왔던 것이 다였다. 하지만 술 냄새는 금세 사라졌고, 어찌 됐든 그들과는 연고가 없는 무덤이다 보니 더 이상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을 찾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저렇게 많은 사람이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 앞에서 저러고 있는 거지? 차림새를 보아하니, 술고래가 아니라 서생인 듯한데, 저러고 있는 모양새가 영 반쯤 미친 술고래 같단 말이지.
“설마, 귀신이 들렸나?”
서북 용곡성 관청 안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죄다 남루한 행색에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칙사가 진지하게 조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불안해 어쩔 줄 모르던 그들의 표정은 차츰 흥분과 희열로 바뀌었다.
“······이에 선절교위(宣節校尉: 관직명)에 봉하니, 군마를 관장토록 하라.”
조서를 다 읽은 칙사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서사근을 쳐다보았다.
“서사근, 명 받들겠나이다.”
서사근이 큰절을 올리고는 울먹거리며 조서를 받았다. 마당 가득 서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서사근을 에워쌌다.
“참 잘됐소. 참 잘됐구려!”
“또 진급한 거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서사근의 벗이오? 진급하는 사람은 서사근인데, 어째 당사자보다 더 감격스러워 보이네.”
주위에서 이 광경을 구경하던 사람이 물었다.
“아니오. 저 사람들은 임관보에서 도망친 병사들과 잡역부들이야. 강문원이 저들을 감옥에 처넣어 이제 곧 죽나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갑자기 풀려났지. 서사근이 진급까지 하는 걸 보니까,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저리들 기뻐하는 거 아니겠소.”
이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사람이 대답했다.
마당 안에 서 있던 사람들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관청 안에서 장수들 무리가 걸어 나왔다.
“이놈들, 죽는 것이 그리 두렵더냐!”
맨 앞에 있던 장수가 큰소리로 외쳤다. 우렁찬 목소리가 마당 안의 소란을 덮어 버렸다.
마당 안이 조용해졌는데도, 장수는 행여나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못 들었을까 싶어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외쳤다.
“죽는 것이 그리 두려우냐고 물었다!”
목숨을 건진 기쁨을 채 다 누리지도 못한 사람들의 안색이 다시금 창백해졌다. 사람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장수를 쳐다보았다.
종승포는 마당 안의 사람들을 경멸 섞인 눈빛으로 둘러보았다.
“당장 관청 밖으로 꺼지거라! 군복을 벗고, 네놈들의 가족을 챙겨 모조리 용곡성을 떠나거라. 냉큼 서북에서 꺼지라는 말이다!”
종승포의 말이 끝나자, 마당 안에 잠시 적막감이 흘렀다.
“냉큼 꺼지래도!”
종승포가 목청을 높여 호통쳤다.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서 몸을 떨었다. 그들은 더 이상 꾸물거리지 않고, 재빨리 관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서사근과 유규, 그리고 어떤 사내 하나만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꺼지지 않는 것이냐?”
종승포가 눈썹을 치켜뜨고 고함쳤다.
“대인께서 저를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니, 꺼지지 않았습니다.”
종승포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 사내를 쳐다보았다.
“왜 네놈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관청 밖으로 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걸음을 멈추고 뒤를 쳐다보았다. 어떤 사람은 작은 소리로 그 사내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간신히 건져낸 목숨인데, 저리 맹수같이 사나운 장수를 자극해서 뭐하냐는 생각에서였다.
사내는 미동도 없이 자리에 서서 대답했다.
“소인은 죽는 것이 두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너무도 당당한 남자의 태도에, 종승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사내를 쳐다보았다.
찰나의 정적이 흐른 뒤, 종승포의 웃음소리가 마당 안을 뒤덮었다.
“좋다. 얼마 전, 오랑캐들에게 우리의 성보 두 채를 빼앗겼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들이여, 나와 함께 이전의 치욕을 깨끗이 설욕하러 가겠는가!”
종승포가 한 손을 높이 들고 외쳤다. 마당 안에 서 있던 수위 병사들이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설욕하자!”
“설욕하자!”
병사들의 외침은 마당 안에서부터 관청 밖까지, 거센 파도처럼 끊임없이 휘몰아쳤다.
벌써 관청 문 앞까지 다다랐던 임관보의 병사와 잡역부들은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관청 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에라이, 누가 죽는 게 두렵대?”
“죽는 게 뭐가 두렵다고! 침상에 누워 뒈지는 것보다, 전장에서 전사하는 게 더 나아!”
“서무수 형제들은 죽음으로 공로를 맞바꿨는데, 살아 있는 우리가 공로 하나 못 세울까!”
종승포의 물음에 당당하게 대답했던 그 사내의 주위로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그들은 더더욱 목청을 높여 함께 설욕하자고 다짐했다.
마당 안의 광경을 보던 종승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관청 안에 앉아 있던 장수들도 사내들의 우렁찬 외침을 들었다. 연배가 있는 장수 몇 명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역시 젊은 사람이라 사기를 북돋는 재주가 있어.”
누군가가 말했다.
“종 장군이 아직 어리긴 어리군.”
옆에 있던 사람이 조용히 말했다.
감히 설욕하자는 말을 저렇게 쉽게 내뱉다니. 이전의 치욕? 전임자의 치욕을 말하는 것인가?
강문원은 아직 서북을 뜨지도 않았어. 그 일에 대해서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그런데 저렇게 서슴없이 강문원을 무시하고 짓밟아도 되는 거야? 저렇게 해서 좋을 게 뭐 있다고?
“생긴 것도 괜찮고, 말하는 것도 들어줄 만한데, 얼마나 일을 잘할지가 관건이군.”
연로한 장수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장수와 병사들이 거리 위를 뛰어다니며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대열로 집합했다.
이제 막 감옥에서 풀려난 유규는 세수할 겨를도 없이 다급하게 옷만 갈아입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유규를 불러 세웠다. 유규가 고개를 돌려 보니, 젊은 장수가 말 위에 올라탄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의 안장과 장비로 보아 족히 중급 장수는 되어 보였다.
이야, 저 칼이며 창 좀 보게. 게다가 활은 세 개씩이나.
유규가 감탄하고 있던 사이, 젊은 장수가 활 두 개를 그에게 건넸다. 유규는 눈을 끔뻑이며 활을 받지도 않고 젊은 장수만 빤히 바라보았다.
“범강림이 전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오. 하나는 서봉추의 삼석궁이고, 다른 하나는 조정에서 새로 제작한 신비궁이요. 궁수 부대에 가면, 신비궁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 줄 것이오.”
유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활을 건네받았다. 그가 막 입을 열기도 전에, 주육낭은 채찍을 휘둘러 말을 타고 자리를 떠났다.
“어이, 그 활은 놓고 가야지.”
누군가가 유규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
“뭐라고?”
“군에서 지급해주는 활이 있을 텐데, 누가 네놈에게 이런 활을 쓰라고 했나? 개인 장비를 쓰는 것은 군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당장 그 활을 두고 가.”
“퉤! 좋은 장비를 두고 쓰지 못하게 하는 경우는 또 처음이네. 군의 돈으로 장만한 것도 아닌데, 그런 법이 어디 있소?”
“좋은 장비? 네놈들 손에 좋은 장비가 있는 것 자체가 낭비다. 어서 이리 내놔. 그리고 내가 그런 법이 있다면 있는 것이지. 감히 상관 명령에 불복종하려는 것이냐! 네놈같이 위계질서를 무시하는 놈을 어느 장수가 데려다 쓰려 할까. 네놈은 잡역부로 쓸 수도 없겠어!”
활을 쥔 유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서봉추의 삼석궁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신비궁으로 시선을 옮겼다.
신비궁? 신비궁이 도대체 뭐길래?
“신비궁을 준비하라!”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말과 함께, 성문 위에 일렬로 서 있던 궁수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쇠뇌를 든 병사들이 그 자리에 배치됐다. 햇빛 속에서 바라보니 쇠뇌는 이미 장전되어 있었다.
성문 아래 참호에 몸을 숙이고 있던 유규가 고개를 돌려 성문 위를 올려다보고는 자신의 옆에 놓인 신비궁을 쳐다보았다.
“그냥 평범한 중노잖아?”
유규가 낮게 읊조리고는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조정 관리들이 또 어느 돈에 눈먼 놈한테 당했구먼. 몇 번 당했으면 이제는 정신 좀 차려야 하는 거 아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규는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셀 수 없이 수많은 적군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적군의 말굽이 땅에 닿을 때마다 지진 같은 진동이 만들어졌다.
유규는 손에 쥔 칼을 내려놓고 활을 집어 들었다. 잠시 멈칫하던 유규는 자연스레 서봉추가 자신에게 남겨준 삼석궁을 택했다. 유규는 화살을 올리고, 전방을 조준한 채 마음속으로 수를 셌다.
봉추, 잘 봐 둬. 내가 네놈의 활로 어떻게 오랑캐를 죽이는지.
더 가까이 와.
더 가까이.
더.
둥둥둥 북소리가 유규의 고막을 때렸다. 공격을 뜻하는 북소리에 유규는 반사적으로 힘껏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뭐야!”
유규가 잔뜩 화난 얼굴로 외쳤다.
“새로 온 놈이냐? 이렇게 먼 거리에서 어떻게 화살을 쏘라고······.”
유규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떡 벌린 채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시커먼 화살들을 올려다보았다.
박자에 맞춰 들려오던 적군의 발소리가 순식간에 어지러워졌다. 전방에서 들려오는 참담한 비명이 천둥소리가 되어 유규의 귓가에 내리꽂혔다.
유규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앞을 내다보았다. 말을 타고 있던 적군들이 베어지는 보리처럼 우수수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이렇게 먼 거리인데, 저렇게 강하다고?
가슴을 치는 북소리와 화살이 쏘아져 나가는 진동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유규가 고개를 들자, 억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화살이 머리 위로 한시도 쉬지 않고 날아갔다.
저렇게 빨리, 저렇게 많이.
유규는 온몸이 떨려왔다. 그는 삼석궁을 내팽개치고 신비궁을 잡고 허둥지둥 고리를 몇 번 밟았다. 궁수 부대의 설명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이 너무나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유규의 뒤로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우라질!”
유규는 조급한 마음에 욕을 내뱉으며 힘겹게 화살을 올렸다. 점점 더 가까워지던 적군이 썰물 빠져나가듯 퇴각하는 것이 유규의 눈에 보였다.
“안 돼! 이 몸이 죽일 놈은 좀 남겨 줘!”
유규는 포효하다시피 소리치면서 장전한 신비궁을 쏘아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