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66
교랑의경 466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십팔랑, 어서 문 좀 열어 봐.”
방문 너머로 진소 부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가 정 낭자랑 말다툼했어요! 막 정 낭자한테 소리 지르고! 정말 무례했어요!”
진단랑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진십팔랑은 아예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벽 쪽으로 돌아앉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문밖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문 앞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진십팔랑은 천천히 두 손을 내려놓고 무릎을 껴안은 채 그 속에 고개를 파묻었다.
“십팔랑, 네가 괜찮은지 물어보러 왔단다.”
문밖에서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십팔랑은 흠칫 놀랐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진 노태야였다. 진십팔랑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대답했다.
“괜찮아요.”
문밖에서 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 스스로 괜찮다는 것을 알면 됐다.”
진 노태야의 발걸음 소리가 문가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내가 알면 됐다, 나 자신이 알면 됐다! 왜 다들 자기 자신만 신경 쓰라는 거야!
진십팔랑은 몸을 벌떡 일으키고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진 노태야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전 모르겠어요. 정 낭자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지 전 정말 모르겠다고요. 정 낭자는 왜 항상 높은 곳에서 남을 내려다보며, 짓밟고 지나가는 거죠? 왜 저를 웃음거리로 만드냐고요!”
진십팔랑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진 노태야는 어두운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정 낭자는 그 이유를 모르지만, 너는 알지 않느냐.”
진 노태야가 말했다.
“할아버지!”
진십팔랑이 소리쳤다.
“아무도 너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 없다. 널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 자신뿐이야!”
진 노태야가 호통쳤다.
“정 낭자는 왜 그러는 건데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요!”
진십팔랑이 울부짖었다.
“정 낭자는 의지가 있고 그것을 해낼 능력도 있는 반면, 너는 의지도 없고 해낼 능력도 없으니까! 십팔랑, 무의미한 시기와 질투를 거두고 너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똑바로 봐라. 네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잘 해내려면, 우선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부터 알아야 하느니라. 할 능력이 있지만 의지가 없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해낼 능력도 없이 원하기만 한다면 헛되이 미혹된 것이다. 진소, 너는 어리석음에 도달하기도 전에 미혹부터 됐어! 헛되이!”
“아니에요. 전, 전 그렇지 않아요. 저는 단지, 인정할 수 없는 것뿐이에요.”
진십팔랑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눈물을 흘렸다.
“인정할 수 없다고?”
진 노태야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더니 눈을 번쩍 뜨고는 호통쳤다.
“십팔랑, 고작 2년의 글씨 연습이 고생이라고 생각하느냐?”
고생······.
진십팔랑은 아랫입술만 꾹 깨물 뿐, 진 노태야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넌 네가 충분히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겠지.”
진 노태야가 말을 이어 갔다.
열심히······.
진십팔랑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 입술을 움직이지 못했다.
“십팔랑, 너는 왕희지가 글씨 연습을 몇 년 동안이나 한 줄 아느냐?”
진 노태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채자, 진십팔랑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팽팽하게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 순간을 멈추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을 진십팔랑은 알고 있었다.
“십팔랑, 네가 그 자리를 얻게 된 것은, 네가 열심히 연습하고 고생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건 네가 그 자리를 얻게 된 이유 중 절반밖에 되지 않아! 나머지 절반의 이유를 왜 모르느냐? 그건 바로 네 성이 진씨인 덕분이다. 네 아비가 진소고, 네 아비가 진 상공인 덕분이야!”
진 노태야가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고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받은 그 총애는 황제의 성은이고, 그건 황제가 진 상공의 체면을 봐준 것뿐이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런 게 아니라고요!
진십팔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등이 문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춰 섰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은 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할아버지, 왜 그렇게 모진 말을 하세요? 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거냐고요!”
창백한 얼굴의 진십팔랑이 눈물을 쏟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진십팔랑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 노태야는 진십팔랑을 다정하게 타이르고 훈계했지만, 마지막 한마디는 진십팔랑의 뼈를 때리는 것만큼이나 아팠다. 촉촉한 보슬비가 내리나 싶더니 별안간 매서운 찬바람이 불어와 오장육부로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거의 혼절 직전인 진십팔랑의 모습을 보고, 진 노태야는 속으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난 누구지?
그건 정수리에 세찬 일침을 가하는 말일 게야. 무시무시한 무기이기도 하고. 그러니 정 낭자도 하마터면 혼수상태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뻔했지.
하지만 별수 있나? 침을 맞으려면 피를 봐야 하고, 낫지 못할 병이라면 독한 약을 써야 하는데.
“십팔랑.”
진십팔랑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진 노태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그리도 두려우냐.”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그렇게 두렵냐고? 난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지?
진십팔랑은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진십팔랑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녀가 아둔하여, 조부님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진십팔랑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진십팔랑의 방 안.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았다. 몸종이 따뜻하게 데운 수건으로 진십팔랑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향긋한 차를 우려 두 사람 앞에 가져다 놓았다.
진단랑이 잠시 문 앞을 기웃거렸지만, 여종이 서둘러 진단랑을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정 낭자가 귀비의 청을 거절한 것은, 바로 정 낭자가 비석에 새긴 행서 때문이다. 비석의 글씨로 인해 정 낭자가 명성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정 낭자가 어떤 마음으로 그 행서를 썼는지 아느냐?”
진 노태야가 물었다. 진십팔랑이 찻잔을 내려놓고 진 노태야의 말을 경청했다.
“의형제 다섯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본래 그 형제들의 것이어야 할 공로까지 빼앗겼다. 어리고 힘없는 여인의 몸으로, 감히 천자와 내기까지 감행하고 나서야 비로소 공로를 되찾을 수 있었지.
잘 생각해 보아라. 그간의 일에서 정 낭자가 감당해야 했던 ‘만에 하나’가 얼마나 많았겠느냐? 만에 하나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면, 정 낭자가 했던 모든 일은 전부 물거품이 됐을 것이야.
어디 그뿐이더냐? 폐하를 비롯하여 조정 관리들이 전부 정 낭자를 사정없이 물어뜯었겠지. 겉으로 보기에는 비가 내린 뒤 맑게 갠 날씨처럼 보인다만, 정 낭자의 사방에는 아직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십팔랑, 우리 진씨 가문은 그래도 명문가 반열에 속하니, 너와 네 형제자매는 어렸을 적부터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런 너희에게는 바늘에 손이 찔려 피가 찔끔 나는 정도가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일 게야.
그런데 어찌 그런 마음가짐을 정 낭자와 비교할 수 있느냔 말이다.”
진십팔랑이 고개를 숙였다.
“정 낭자가 웃는 걸 본 적 있느냐? 그리고 정 낭자가 왜 말하기를 싫어하는지 아느냐?
정 낭자에게 이 세상은 너무도 무정하여 웃을 일도, 이야기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십팔랑, 너도 알다시피, 사람들은 그 비석의 글씨가 대단하다고, 천하제이 행서라고 칭송한다. 한데 그 글씨가 왜 그토록 좋은지 아느냐?
말로 이루 표현해낼 수 없는 비통함이, 글씨의 매 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 힘겹게 써 내려간 글씨를, 어떻게 감상을 위한 글씨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가슴이 찢어질 듯한 비통함으로 쓴 글씨 덕에 얻은 명성을, 정 낭자가 자랑스러워하겠느냐?
아마 정 낭자는 쓰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글씨들을 영원히 쓰지 않기를 택했을 것이다.
십팔랑, 그래도 그런 글씨를 써낸 정 낭자가 부러우냐?
십팔랑, 내 말하지 않았느냐. 늘 자비심을 품고, 세상 사람들 눈에 정 낭자의 무엇이 좋아 보이는지, 그 명성을 어찌 얻은 것인지 보란 말이다.
정 낭자는 자신이 쓴 글씨를 누가 가져가든 상관없다고 하지. 그 이유인즉슨, 자신의 글씨가 좋지 않다는 정 낭자의 생각과는 달리, 모든 사람이 정 낭자의 글씨를 좋은 글씨라고 생각하고 낭자가 쓴 글씨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 낭자가 그 사람들을 설득시켜야 하겠느냐? 정 낭자가 감당해야 할 사람이, 자기 자신 말고도 더 있어야 해?
네 말대로라면, 정 낭자는 자신의 비통함을 표하고자 비석에 글씨를 쓰는 것도 안 되고, 한바탕 우는 것도 안 된다는 게야? 정 낭자는 아무리 슬퍼도 어딘가에 숨어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냐? 정 낭자가 한 일은, 남들 앞에서 글씨로 눈물을 흘린 것밖에 없다. 세상이 정 낭자의 글씨를 높이 추켜세웠을 뿐이야. 너는 그걸 보고도, 정 낭자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예를 낚아챘다고 여기느냐?
집 앞에 돗자리를 깔고 글씨를 쓰는 것은, 정 낭자의 마음에 거리낄 게 없어서다. 그 글씨를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고, 마침 자신은 항시 같은 시간에 글씨를 쓰니, 못 보여 줄 것도 없겠지. 정 낭자는 떳떳하고 부끄러울 게 없기에 마음 가는 대로 편히 행동했을 뿐이야. 그럼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 정 낭자가 살피고 고민해야 한단 말이냐? 자신의 행동으로 누가 기뻐하고, 또 누가 기뻐하지 않는지까지 살피라고? 다른 이가 싫어할까 봐 자신이 하던 일까지 멈추란 말이더냐?
십팔랑, 사람을 업신여겨도 너무 업신여기는구나!
십팔랑, 천도(天道)는 무정하다지만, 사람이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는 법이다. 자비를 베풀어야 해.”
진십팔랑이 허리를 숙인 채 바닥에 엎드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조부님, 제가 틀렸어요. 당장 가서 사죄할게요.”
진십팔랑이 감정을 추스르고 몸을 일으켰다.
“갈 필요 없다.”
진 노태야가 진십팔랑을 불러 세웠다.
“죄는 죄야. 사과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진 노태야의 말을 듣자, 진십팔랑은 걸음을 멈추고 또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진단랑과 함께 다녀오마.”
진 노태야가 문을 나서면서 진단랑을 불렀다.
진십팔랑은 문가에 가만히 서서 앞을 내다보았다. 기다리다 지칠 지경이었던 진단랑이 진 노태야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정 낭자 댁에 가는 거예요? 잘됐네요. 이게 다 언니 때문이에요. 정 낭자한테 요리도 마저 배워야 하는데.”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어린아이라서 정말 좋겠다. 아무런 잡생각 없이, 순수하게 정 낭자를 존경하고 감동할 수 있으니까.
조부님, 제가 남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두렵지 않아요.
제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건, 저보다 못한 사람이 절 앞선다는 사실이죠.
태사국이 길일로 택한 10월 18일, 평왕은 궁을 나와 왕부로 거처를 옮겼다. 이튿날, 진십팔랑은 출타할 채비를 했다.
“십팔랑, 평왕부에 가는 거니?”
진소 부인이 확신 없는 말투로 물었다.
“어머니, 평왕께 글씨를 가르칠 시간이 됐어요.”
진십팔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했다. 진소 부인과 함께 서 있던 자매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십팔랑, 귀비마마께서 그런 말씀까지 하셨는데, 어찌······.”
진십팔랑의 언니 중 하나가 말끝을 흐렸다.
귀비가 정교랑에게 평왕의 글씨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할 때, 누군가가 귀비의 옆에서 완곡하게 진십팔랑의 글씨도 꽤 괜찮다며 폐하께서 직접 고른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자 귀비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 글씨 좀 쓰는 게 뭐 대수라고. 천하에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더냐? 내가 원하는 것은 천하제일이야.
귀비의 그 말은 내시와 궁녀들의 입을 타고 저잣거리까지 흘러나왔다. 그래서 박양 군주 댁에서 봤던 두 소녀가 진십팔랑에게 ‘글씨라고는 일절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이라는 말로 조롱한 것이었다.
“폐하께선 저한테 전하께 글씨를 가르치라고 하셨어요. 이제 안 가도 된다는 말씀은 없으셨고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게 제가 할 일과 무슨 상관이죠?”
진십팔랑이 미소를 보이며 말하자, 자매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 부인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따스한 눈빛으로 진십팔랑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평왕은 어제 막 왕부로 들어갔어. 며칠 더 있다가 가는 건 어때?”
진소 부인의 말에 진십팔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전하는 무척 열심이신 분이에요. 오늘은 관두고, 당장 어제도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으셨을걸요.”
천부적인 재능이 없어도, 우리처럼 이렇게 열심인 사람들을, 하늘이 속일 리가 없겠지. 아니, 속여서는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