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70
교랑의경 470화
주 노야가 생각을 바꾸며 한숨을 쉬었다.
“속이 뒤집히는 건 차치하고, 난 정 이노야 그놈을 아주 잘 알아.”
주 노야는 속이 시커먼 부부란 말 대신, 이노야를 콕 집어서 말했다. 주 노야의 그런 잔꾀를 정교랑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원래부터 허풍만 가득한 놈이야. 학문도 썩 뛰어난 건 아니고, 관직에서도 일 처리에 뛰어난 건 아니었어. 그게 아니라면 4년 전에 진급했지 지금껏 있었겠느냐.”
주 노야의 말을 듣던 정교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다가 금세 사라졌다.
왜 웃는 거지? 그래도 친부랍시고 그때의 분함은 다 잊고, 다시 부녀의 정을 이어 나가고 싶은 거야?
멈칫했던 주 노야가 말을 이었다.
“경성에서 관직을 얻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야. 심지어 대리시 같은 곳이라면 더욱 힘들지. 그놈이 일을 못 한다는 이유로, 교교 너까지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을까 근심이구나.”
“무려 조정에서 임명한 건데, 안 올 수는 없잖아요.”
정교랑의 말에 주 노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역시 교교도 그놈이 경성으로 오는 것을 원치 않는 거야!
“조정의 명이긴 하다만, 본인이 사양할 수도 있잖아.”
주 노야는 그 말을 내뱉고는 곧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아니다. 그놈이 퍽이나 사양하겠군.”
주 노야는 미간을 찌푸린 채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해요, 외숙부님. 기왕 이렇게 된 이상, 마음을 편히 가지는 게 낫겠죠(既來之, 則安之 – ).”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아니면 이렇게 하자꾸나.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사는 건 어떠니? 그러면 그놈들이 널 괴롭히려 들 때, 내가 나서 줄 수 있으니 말이다. 난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거 겁 안 난다. 외숙이 나서겠다는데, 누가 감히 나더러 뭐라 하겠느냐.”
주 노야의 말에 정교랑은 입꼬리를 올리고 다시금 감사의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숙부님.”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바른 자세로 앉은 뒤에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주 노야가 뭔가 더 말하려는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문으로 들어선 사람은 다름 아닌 정사낭이었다.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온 듯 고생이 묻어나는 정사낭의 모습에 반근이 깜짝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넷째 공자님께서 갑자기 이곳엔 어쩐 일로?”
방에 있던 정교랑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숙부님이 경성으로 올 수도 있대.”
정사낭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올 수도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명이 떨어졌어요. 공자님, 설마 이 소식을 알리려고 강주에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반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이 소식을 알리려고 강주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 그건 너무 터무니없잖아.
정사낭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아버지께서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물어보라고 하셔서. 참, 그리고 누이에게 이 말을 전해 달라고 하셨어.”
아버지라면 정 대노야?
대청에 있던 주 노야가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아버지께서 하셔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정사낭이 말했다.
이 빌어먹을 정가 놈이! 또 나랑 한판 해보자는 게야?
우리 집 교교를 빼앗기 위해, 이젠 친동생까지 제물로 바치겠다는 것이냐!
가만 보니, 아주 바보는 아니로군. 드디어 우리 교교가 제 동생보다 값지다는 걸 알아차렸으니 말이야.
정사낭이 경성에 이르러 정교랑의 집에 도착했을 무렵, 조정에서 내린 직첩은 아직 강주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다. 하지만 정 이노야가 경성의 대리시로 영전해 간다는 소식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쿵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정육랑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누군가가 커다란 상자를 정육랑의 눈앞에 턱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정육랑이 득의양양한 정칠랑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열 살이 다 되어가는 정칠랑은 키가 훌쩍 자라 있었다. 따라서 바닥에 앉아 있던 정육랑은 고개를 들어 정칠랑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그런 각도로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정육랑은 정칠랑의 얼굴이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설단 기분이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 여인의 모습이 살짝 비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복동생이어도 서로 닮은 구석은 있는 건가.
“이건 내가 쓰던 책이랑 자수야. 난 곧 부모님이랑 경성으로 갈 건데, 짐이 너무 많아서 못다 가져간대. 그래서 너 주려고.”
정칠랑이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거 다 엄청 좋은 것들이야. 내가 싫어해서 버리는 게 아니라고.”
“난 이딴 거 필요 없어. 그냥 네가 갖고 있어.”
“갖고 있어 봤자 뭐해.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우린 이번에 경성으로 가면 다시는 강주로 안 돌아올 거래. 그리고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거라면 경성에 있는 우리 언니가 뭐든 다 사 줄 거라고 하셨어.”
정칠랑이 우쭐한 모습으로 손짓을 해가면서 말했다. 그런 정칠랑의 모습에 정육랑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 언니? 그럼 넌 이제 정팔랑이겠네?
– 나한테 언니가 생긴다고? 내가 적장녀인데?
– 싫어, 싫어! 그런 바보 언니라니, 창피해서 사람들 얼굴을 어떻게 봐.
– 내가 왜 정팔랑이야! 나 정팔랑 하기 싫어!
정육랑의 귓가에 과거 정칠랑이 울부짖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육랑이 정칠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직 앳된 모습의 어린아이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우쭐함과 기쁨이 가득했다.
“언제부터 네가 바보 언니를 둔 걸 자랑스럽게 여기게 됐을까?”
“우리 언니는 황제 폐하도 알현했던 사람이야!”
바보라는 호칭이 싫었는지, 정칠랑은 잽싸게 반박했다. 정칠랑이 정육랑을 흘겨보면서 말했다.
“뭐, 괜찮아. 내 친언니이자 네 사촌 언니기도 하니까, 너한테도 언니긴 언니지.”
정육랑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렸다.
“미안한데, 나는 충효도 모르는 바보 언니를 둘 엄두가 안 나.”
정육랑이 정칠랑이 가져온 상자를 팍 하고 엎었다.
상자가 엎어지자, 그 안에 들어있던 자수와 금은으로 된 비녀 등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정육랑이 흠칫 놀랐다.
정칠랑이 가져올 물건이라고는 기껏해야 꽃을 수놓은 손수건이나 장난감에 불과할 줄 알았는데, 저런 장신구까지 들어 있을 줄이야. 그토록 인색했던 정칠랑이 장신구까지 주다니.
이제 돈 많은 언니가 하나 생기니, 전에 쓰던 건 하나도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네.
“네 언니는 친해지기 쉬운 사람이 아니던데, 이것들 잘 챙겨 두는 게 좋을 거야. 나중에 그 집에서 쫓겨나면 전당포에 맡겨 강주로 돌아올 경비나 마련하렴.”
정육랑이 콧방귀를 뀌고는 무심코 그러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바닥에 널브러진 비단 손수건을 밟고 지나갔다.
정칠랑은 정육랑의 발에 밟힌 손수건을 보고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정칠랑은 정육랑을 밀쳐내고 울면서 잡동사니를 다시 아무렇게나 상자에 담아 품에 안고 뛰쳐나갔다.
두 자매가 매일같이 싸우는 게 익숙했던 몸종과 여종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던 일을 계속했다.
정육랑이 뒤늦게 몸을 돌려 밖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갔지만, 정칠랑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운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자 정육랑은 귀가 찢어질 듯 아팠다.
“무슨 일이야?”
정육랑이 두 귀를 막은 채로 물었다.
“조정에서 내리는 이노야의 상이 당도했대요.”
여종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어떤 몸종들은 재빨리 폭죽 소리가 나는 곳으로 구경하러 달려갔다.
왔구나.
정육랑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회랑 아래에 섰다.
“곧 성지를 받아야 하잖아요. 아씨께서도 어서 옷을 갈아입으셔야죠.”
여종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소리쳤다.
죽어도 가기 싫지만,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육랑이 여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고 앞마당에 도착했을 무렵, 대문 근처에는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병환으로 일절 바깥출입이 없던 정 노부인마저 지팡이를 짚고 나와 맨 앞에 서 있었다. 정 노부인은 골골 앓던 병자의 얼굴 대신, 생기 넘치는 얼굴로 문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번에 정씨 가문에서 성지를 받들고 상을 받았을 때가 기억나는구나. 죽기 전에 이런 광경을 또 보다니, 지금껏 산 보람이 있어.”
이가 빠져 발음이 새는 노인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서서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
“정씨 가문은 과연 복을 타고났네. 더는 안 되겠다, 안 되겠다 싶다가도, 또 이렇게 재기하다니.”
누군가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감탄했다.
“무슨 관직을 얻은 거래?”
정 이노야가 하사받은 관직에 흥미를 보이는 이도 있었지만, 백성 대부분은 구경거리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폭죽을 구경하고, 질서 유지를 위해 나온 관졸들을 구경하고, 북적대는 인파를 구경하고, 어명을 받들고 경성에서 내려온 칙사 일행을 구경했다.
어쩌다 관직을 받았든 무슨 상관이랴. 구경꾼들에게는 훗날 자신의 후손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고, 얼마나 떠들썩했는지만 기억하면 될 일이었다.
정씨 저택의 마당 안에서 칙사가 성지 낭독을 마치자, 정씨 가문 사람들은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성은에 감사를 표했다.
“대인께서는 편한 날짜를 택해 상경하십시오. 급할 것 없습니다.”
칙사가 겉치레로 말했다. 아들을 경성으로 느긋하게 보낼 생각이 없었던 정 노부인이 목청을 높였다.
“아유, 무슨 소리를. 빨리 가야죠, 빨리. 채비는 다 끝냈으니까, 지금이라도 출발할 수 있어요.”
정 노부인의 모습에 정 대노야와 정 이노야는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 대부인과 정 이부인이 서둘러 정 노부인을 부축하여 자리를 피했다.
“왜들 그러냐. 내 말이 틀려? 더 기다릴 게 뭐 있어? 어서 경성으로 가서 공을 세우고, 나도 상 하나 받게 해 줘야지. 이번에는 어떻게 된 게 내 건 없고, 죽은 주씨한테만 상이 내려졌느냔 말이야.”
정 노부인은 목청을 높여 투덜대면서 두 며느리의 부축 속에 뒷마당으로 걸어갔다. 정 대노야는 정 이노야가 칙사를 잘 모시고 나자, 정 이노야를 한쪽으로 불렀다.
“이번 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
정 대노야가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일을요?”
싱글벙글한 표정의 정 이노야는 대청 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정 이노야의 머릿속에는 당장이라도 들어가 동료들과 축하주를 기울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상을 사양하거라.”
정 대노야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정 이노야는 뭔가를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을 지으며 정 대노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웃음을 지었다.
관리들은 조정에서 내린 상을 받을 때, 그 상을 사양함으로써 더 높은 관직을 달라는 일종의 시위를 하곤 했다. 보통은 두세 번 거절한 뒤 관직을 받아들이거나, 황제가 다른 관직으로 바꿔 주는 일이 많았다. 물론, 일이 잘못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을 때나 가능한 거절이었다. 어차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겉치레일 뿐이니까.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형님. 제가 이제 막 관직을 얻은 신출내기도 아니잖습니까. 아니, 이제 막 관직을 얻었다 해도, 그 정도는 알죠.”
정 이노야는 정 대노야가 자신을 너무 어린아이 취급한다는 듯한 눈빛을 보이며 웃음을 지었다.
“그게 아니라 경성으로 가지 말라고. 다른 곳으로 바꾸거라.”
정 대노야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정 이노야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형님, 미쳤습니까?”
저게 어딜 봐서 미친 거야? 고의로 우리의 앞길을 막으려는 게지!
이야기를 들은 정 이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짐 정리를 하다 말고 정 노부인의 거처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