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71
교랑의경 471화
정 이부인이 대성통곡하면서 말했다.
“형제끼리 돕고 살아야 한다고들 하잖아요. 저희도 알아요. 어머님께서도 몸이 편찮으시고, 아주버님도 크게 병이 나신 터라, 이노야가 여길 떠나 먼 경성까지 가 버리면, 집에 일이 생겼을 때 아무도 챙겨줄 사람이 없다는 걸요.”
정 노부인은 정 이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찻잔을 바닥으로 내던져 깨트려 버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내가 지금 기력이 펄펄 솟는 게 보이지 않느냐! 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내 아들이 내게 상을 안겨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게야! 첫째의 몸이 안 좋다고 해도, 우리 집에 사람이 없다더냐? 집안에서 하는 일 없이 놀기만 하는 손자가 수두룩해. 그것도 모자라 얼마 전엔 증손자까지 보았는데, 우리끼리 이 정씨 집안 하나 못 지켜낼까! 그리고 둘째가 경성으로 가는 게 어찌 자기 자신을 위해서냐? 다 우리 정씨 가문을 위해서지!”
부아가 치밀어 오른 정 노부인이 호통을 쳤다.
“첫째가 병을 앓더니 머리까지 어떻게 된 게야? 당장 첫째를 불러오너라!”
정 노부인의 말에 황급히 정 대노야를 부르러 달려나간 여종을 보며, 정 이부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정 노부인의 방 안에서는 반나절 내내 호통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 대부인은 문가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다. 정 대노야는 아직 병중이니, 제발 남편 대신 자신이 벌을 받게 해 달라고 울면서 빌고 또 빌었다.
“우리 둘째의 앞길을 막는 것은 곧 우리 정씨 가문의 앞길을 막는 것이니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어! 둘째가 네 친형제인데, 어째서 너는 둘째가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것이냐!”
“어머니, 저는 진심으로 아우를 위해서······.”
정 대노야가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들고 설명하려 했지만, 정 대부인이 다급하게 그의 소매를 붙잡고 애원했다.
“노야, 제발, 제발요. 제발 그만하세요.”
정 대부인이 바닥에 엎드린 채 서럽게 울었다. 정 대노야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정 대노야도 결국 포기했는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면서 사죄했다.
“소자가 어리석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어머니.”
정 노부인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둘째에게 여비나 두둑이 챙겨 주거라. 경성은 물가가 비싸 살기 힘들다던데, 이리저리 접대하려면 둘째한테 돈 나갈 곳이 많을 것이야. 우리 정씨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야지.”
반나절 내내 참고 있던 정 대부인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어머님, 집에 돈이 없어요. 게다가 이방 내외는 경성에 가면 더욱 돈 걱정이 없을 거고요. 교랑이······.”
이번에는 정 대노야가 정 대부인을 팔꿈치로 쿡 찌르며 말을 끊었다.
“예, 알겠습니다. 어머니. 집에서는 허리띠를 졸라맬지라도, 먼 길을 떠날 때는 돈을 충분히 챙겨야지요. 아우가 망신당할 일 없도록 소자가 잘 준비하겠습니다.”
정 노부인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물러가거라. 네 아우가 집을 떠나 그렇게 먼 곳까지 가는 이유가 뭐겠느냐. 다 우리 정씨 가문을 위한 일이야. 그건 다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한데, 어찌 그렇게 철없이 아우에게 불만을 품는 게야.”
정 노부인이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상경했다간 자신의 앞길만 망치는 게 아니라 정씨 가문까지 무너뜨릴 테니 걱정할 수밖에요.
정 대노야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정 노부인에게 그간의 일들을 납득시키기란 불가능했다. 정 대노야는 공손하게 알겠다고 대답한 후, 부인과 함께 군말 없이 물러났다.
“제수씨, 앞으로 무슨 일이 있거든, 내게 직접 말하십시오. 어머니께서 이해하지 못하시는 일도 있는 법이니까. 더 이상 어머니를 앞세우지 말란 말이오. 어머니께서 연로하시기도 하고, 더는 우리 형제지간의 일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소이다.”
정 대노야가 정 이부인에게 말했다.
“알겠어요. 역시 대노야께서 어머님 생각을 많이 하시네요.”
정 대노야는 정 이부인의 대답을 무시한 채 정 이노야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가 한 말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조금 더 기다렸다가 가는 게 좋을 거다. 최소한 새해라도 맞이하고 올라가는 게······.”
편찮으신 어머니와 형님을 집에 두고 떠나게 되어서 송구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정 이노야는 정 대노야의 말에 또다시 부아가 치밀었다.
“형님, 그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새해가 되고 나서 상경하라고요? 대리시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저뿐입니까? 제가 가지 않으면, 그 자리를 메꾸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이 얼마나 많겠냐고요!”
“네 말대로, 대리시는 네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곳이야.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가거라. 경성 바닥은, 아무리 생각해도 영 꺼림칙해.”
정 대노야는 정 이노야가 분통을 터뜨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
“형님!”
참다못한 정 이노야가 펄쩍 뛰면서 소리쳤다.
“왜 그러는 겁니까, 도대체! 저는 조정의 명을 따라 경성으로 부임하러 가는 겁니다. 칼산과 불바다를 넘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 정씨 가문을 패망의 길로 이끌러 가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못 가게 막는 겁니까?”
정 이노야는 순간 아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런 말은 여인네들이나 하는 소리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였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 대노야의 모습에 정 이노야의 생각 또한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형님, 제가 형님보다 잘난 게 그렇게 싫습니까?”
“퉤!”
정 대노야가 곧바로 침을 뱉었다.
“이놈아, 네가 나보다 못났다 한들 그게 무슨 기뻐할 일이라고!”
“그런데 왜 경성으로 못 가게 막는 거냐고요!”
“경성은 칼산처럼 위험한 곳이야. 이대로 가 봤자 넌 도마 위에 오른 생선 처지밖에 안 돼!”
정 대노야가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게 깔고 호통치자, 정 이노야는 흠칫 놀라며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곧 실소를 터트리며 대꾸했다.
“형님, 그게 사실이라 해도 만천하의 사람들은 다 칼산으로 뛰어드는 길을 택할 겁니다.”
“하긴 그렇지. 온 세상이 죄다 관직을 얻어 출세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 말이야. 어찌 보면 꼭 맨발로 칼산 위를 거니는 것 같아.”
정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형님의 병세가 많이 심각해졌구나. 머리가 어떻게 된 사람 같네.
중얼거리는 정 대노야의 모습에 정 이노야는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짜증과 울화가 사그라들고 도리어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형님, 어서 가서 쉬십시오. 제가 벼슬살이를 한 지도 어느덧 십수 년입니다. 아직도 관직 생활에 대해 잘 모를까 봐서요?”
“관직에 오른 지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넌 이 일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말이냐?”
“그렇다니까요!”
정 이노야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빽 소리를 질렀다.
“생각해 보아라. 교랑이 우리를 그토록 증오했는데, 그 아이가 너를 경성으로 불렀을 것 같아? 교랑은 절대로 널 위해 상을 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폐하께서 상을 하사하겠다고 하셨어도, 교랑이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야.”
정 대노야의 말을 듣다 못한 정 이노야가 버럭 화를 냈다.
“그 계집이 어딜 감히요! 충효도 모르는 그런 자식은 필요 없습니다! 하늘이 용납하지 않아요!”
“하늘이 용납하고 자시고 간에, 일단 냉정하게 생각해 봐라. 교랑의 그 대단한 수완으로 황제 폐하께 못할 말이 있겠느냐? 그런데도 네 머리 위로 상이 떨어졌어. 누군가가 이번 일을 강행했다는 뜻이겠지. 이건 절대로 그 애가 원하는 일이 아니야. 그 애가 원하는 게 아니라면, 틀림없이 그 애와 원수지간인 사람이 저지른 일일 거다. 네가 이대로 상경하면, 교랑의 원수의 편에서 칼잡이를 자처하는 꼴이 돼!”
정 이노야는 세상에 이런 바보가 있나 하는 눈빛으로 미간을 찌푸린 채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형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정 이노야는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목청을 높였다.
“교랑은 제 딸입니다! 제가 낳은 친딸이라고요! 그런데 그 아이가 절 밀어낸다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 대노야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하자, 정 이노야는 그만하라며 손짓했다.
“형님, 지난번 일은 제가 형제지간의 의리를 저버린 게 아닙니다. 형님께서 너무 지나치셨어요. 그 혼수는 본디 그 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천륜을 거슬렀다고 볼 수는 없죠. 교랑이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은 형님이지 저와는 무관하단 말입니다.”
정 이노야는 정 대노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발걸음을 돌렸다.
“형님, 전 내일 떠날 겁니다. 오늘은 짐을 챙겨야 하니, 송별 연회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형님은 몸조리나 잘하세요. 전 관청 사람들과 인사 나누러 가겠습니다.”
정 이노야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큰 소리로 외치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뭐? 혼수 때는 내가 지나쳤다고? 네놈과 무관하다고?”
정 대노야는 열이 받기도 하고 기가 차기도 했다.
“그래, 내가 지나치긴 했지. 너와도 무관한 일이라고 치자.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하거라. 경성에 가거든 절대 그 아이에게 지나친 일을 해선 안 된다. 그럼 그 아이가 천륜을 거스른다 해도 도리가 없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정 대노야가 흠칫 놀랐다.
천륜을 거스른다?
“설마 이것 때문인가?”
정 대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뭐 때문이라고요?”
정 대부인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건 협박이오.”
정 대노야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의심쩍은 부분이 무엇인지 알아낸 정 대노야는 정 이노야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정 이노야는 밤늦게 술에 떡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술도 깨지 않은 채 기어이 마차에 몸을 싣고 식구들과 함께 도망치듯 강주를 떠났다. 집안사람들이 배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떠난 것이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정 대부인은 괘씸하기도 하고 울화가 치밀어 아예 배웅할 생각조차 안 했지만, 정 대노야는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 자녀들을 데리고 부랴부랴 성 밖으로 쫓아가 그들을 배웅했다.
“정말 복이 많은 집안이야.”
“칠랑 아씨는 나중에 경성에서 좋은 사람한테 시집가시겠지?”
“듣자니 교랑 아씨는 황제 폐하와도 아는 사이래. 이부인의 말을 들어보니까, 칠랑 아씨는 잘하면 황실과 연을 맺을지도 모른다던데?”
“이야, 그럼 우리 가문도 황실의 종친이 되는 거야?”
마당에서 몸종들과 여종들이 수군거리며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육랑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창가에 있던 꽃병을 마당으로 내던졌다.
“다 꺼져! 시끄러워 죽겠으니까!”
날카로운 정육랑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여종들과 몸종들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정육랑이 창가에 서자, 국화꽃 향을 품은 바람이 연꽃 연못을 지나 정육랑의 온몸을 휘감았다.
황금빛 가을인 10월이 됐으니, 며칠만 더 지나면 이 집에서 국화꽃 시회를 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모두 떠났어. 다 그 경성의 바보를 언니라고 부르며 쫓아갔다고.
정육랑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걘 나쁜 사람이야! 그 바보는 나쁜 사람이라고! 너희들은 조만간 그 바보한테 당하고 말거야!”
정씨 저택의 문 앞에는 더는 구경꾼이 모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저잣거리는 정 이노야의 진급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북정의 떠들썩함에 비해, 남정의 저택은 몹시 쓸쓸해 보였다.
“이야, 댁의 아씨가 참 대단한 사람이더군요.”
정평이 오색깃발을 돌돌 말며 강가에서 시선을 거두고 감탄했다.
“그야 당연하지.”
조 집사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어도, 부모의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죠.”
정평이 얄밉게 웃으면서 비꼬았다.
“그 댁 아씨가 경성에서도 감히 패도(覇道: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난폭하게 행동함)를 일삼을지 모르겠습니다그려?”
조 집사가 정평을 흘겨보면서 대답했다.
“패(覇)는 우리 아씨와 무관한 말이야. 아씨는 오직 도(道)만을 행하시는 분이지.”
정평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조 집사를 보면서 손뼉을 쳤다.
“조 집사, 날 허투루 따라다닌 건 아니군요. 드디어 도를 깨우쳤으니.”
정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 집사가 정평의 모자를 탁 하고 쳤다.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부잣집에 가서 풍수나 봐 줘. 여태 백 문도 못 모았으니, 원. 고생해서 벌었으면 아껴 쓰기라도 하든가. 고작 사흘 만에 먹고 마시는 데 다 쓰면 어쩌자는 거야?”
조 집사가 정평을 나무라며 타박하자, 정평은 헤헤 웃으면서 모자를 바로 썼다.
“급할 거 없습니다. 급할 거 없어요. 모든 일에는 정해진 수가 있는 법이니.”
조 집사가 또 그를 때리려고 손을 치켜들자, 정평은 실없이 웃으며 잽싸게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