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72
교랑의경 472화
정 이노야가 강주를 떠나 경성으로 오고 있을 무렵, 경성에 있던 정교랑은 평소와 변함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는 활을 쏘고, 그 후에는 옥대교 앞에서 글씨를 썼으며, 오후에는 몸종 몇 명을 데리고 요리하고, 저녁에는 책을 읽었다.
“종일 하는 게 많긴 해도, 이 좁은 공간을 벗어나지 않으니 원.”
황씨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인들은 잦은 출타를 삼가야 한다지만, 저 나이 때엔 나들이도 자주 가 줘야 하는데.”
“밖으로 놀러 나가고 싶으세요? 어디로 갈까요? 내일 같이 가세요.”
지나가던 시녀가 중얼거리는 황씨의 말을 듣고 웃으며 다가왔다.
“이젠 경성에서 안 가 본 곳이 없는데 어딜 또 가겠니.”
황씨가 우스갯소리로 시녀에게 대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황씨는 옥대교 저택이 부쩍 편해졌다. 그러다 보니 말하는 것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본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시녀나 반근과도 편히 지냈다.
“에이, 벌써 경성을 다 돌다니요. 가 볼 곳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데요.”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두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사이, 누가 저택의 대문을 두드렸다.
“누가 왔나 보네, 나가 봐야겠다.”
황씨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손님을 맞이하러 나갔다.
신비궁이 세운 혁혁한 전공 덕에 신비궁의 수요는 폭증했다. 황제는 궁노원에서 장인 한 명이 신비궁을 매일 한 개씩 만들어 내기를 바랐다. 그 덕에 궁노원은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고, 범강림은 밤낮으로 당직을 서며 아예 궁노원에서 살게 되었다.
다행히도 황씨는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황실의 종친인 진안 군왕까지 보고 나니, 다른 사람을 맞이할 때의 마음도 한결 편해진 덕분이었다. 게다가 정교랑을 보기 위해 옥대교 저택의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문을 열어 보니, 사내 하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문이 열리자 문 앞에 서 있던 사내는 깜짝 놀란 기색이었다.
“저, 저는 정 낭자께 가르침을 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사내가 긴장한 모습으로 말을 더듬었다.
“아씨께서는 매일 여기 앞에서 글씨를 쓰세요. 글씨 때문이라면, 내일 아침에 이곳으로 오면 돼요.”
시녀가 말하자, 사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게 아니고, 저는······.”
사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덧붙였다.
“다른 것에 대해 가르침을 얻고 싶어서······.”
다른 것?
시녀가 뒤늦게 사내를 훑어보았다. 그의 옷차림은 확실히 서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신체 건장해 보이는 사내에게서는 서생의 단정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요리를 배우러 온 거예요?”
시녀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진십삼이 몸종 셋을 골라 정교랑에게 요리를 배우게 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저잣거리로 퍼졌다. 제2의 장반근이 되고 싶던 여러 집안의 몸종들이 옥대교 저택의 문을 두드렸지만,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일 수는 없었다. 정교랑이 그들의 청을 거절했기 때문이 었다. 집이 너무 협소하기도 하고 사람이 너무 많아지면 요리 과정을 자세히 볼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지금의 세 명을 다 가르친 뒤에 다시 찾아오라고 돌려보낸 것이다.
소식을 들은 권문세가들은 더욱 흥분했다. 찬모 몇 명이 요리를 배워 온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라, 이를 빌미로 정교랑과 친분을 맺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권문세가에서도 불시에 사람을 보내 언제쯤 자리가 빌 것 같냐고 묻는 일도 흔했다.
시녀의 말을 들은 사내는 잠시 제자리에 멍하니 있었다. 뒤늦게 시녀의 말뜻을 이해한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낭자와 거래를 하나 하고 싶어서요.”
거래?
시녀가 사내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누구신지?”
사내는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두 손으로 몸을 뒤적거렸다. 뭔가를 한참 찾던 사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손을 멈췄다.
“제, 제가 이번에 관직을 잃어 명, 명첩이 없습니다. 저, 저는 이씨 가문 사람이고, 이름은 무라고 합니다.”
사내가 창피해하며 말했다.
“이무?”
정교랑이 손에 쥔 책을 내려놓고 바른 자세로 앉았다.
“네. 이씨 가문의 사람이에요. 보름 전에 경성에 불을 냈던 그 사람이요.”
시녀가 조용히 귀띔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앞에 꿇어앉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댁에서 이미 날 찾아왔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무원산 형제들의 장례를 치르던 날, 이씨 가문 사람들이 선물을 한가득 가지고 옥대교 저택을 찾아왔다. 그때 그들은 장사나 협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난 이것으로 장사할 생각이 없어요.”
정교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무가 알겠다고 대답하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주위에 앉아 있던 몸종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입을 열려 하다가도 끝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시녀는 정교랑이 자신에게 남아 있으라는 눈짓을 하지 않은 것을 알아채고, 곧바로 어린 몸종들을 데리고 밖으로 물러났다.
“낭자, 저는 낭자와 우리 가문 간의 폭죽 장사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무가 소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을 꺼내 정교랑의 앞으로 밀었다.
“저는 이것을 거래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무가 내민 것은 쇠로 만들어진 볼품없는 상자였다.
반근이 상자를 받아 정교랑 앞에 가져다 놓자, 정교랑이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언제나 변함없던 정교랑의 담담한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나 싶더니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게 뭐지?
반근이 목을 빼고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상자 안에는 기다랗게 돌돌 말린 종이통 하나가 들어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종이통의 표면은 울퉁불퉁했고, 상자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성씨가 뭐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잠시 멈칫하던 이무는 용기를 내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는 정교랑의 눈가에 찰나지만 놀라움이 스친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확신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교랑은 상자에 담긴 물건에 관해 묻지 않고 자신에 관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름을 묻는 것도 아니고, 성씨가 무엇인지만 물으니 퍽 우스운 질문이었다.
“성은 이고, 이름은 무라고 합니다.”
이무가 대답했다.
아까도 말했었는데, 이 여인이 내 말을 흘려들었나 보네.
“이씨 성이라······.”
정교랑이 혼잣말을 하고는 이무를 잠시 쳐다보았다.
“원래부터 이씨였나요? 아니면, 나중에 성씨를 바꿀 계획이 있다든가.”
이무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살다 살다 저런 질문은 또 처음 들어보네.
내가 우리 이씨 가문을 멸족할 놈이라고 욕하는 건가? 설마, 그건 아니겠지? 내가 이 여인과 원수를 진 것도 아닌데, 초면부터 이렇게 심한 욕을 할 리 없잖아?
그게 아니라면, 그냥 바보라서 저렇게 묻는 건가?
이 여인이 어렸을 때 바보였다는 소리를 듣긴 했어. 아무리 명사께 가르침을 얻고 신묘한 비술을 많이 터득했다 한들, 역시 보통 사람과는 다른가 보네.
이무는 바보를 상대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바보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여섯 살배기 딸아이가 있는 그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법에는 능숙했다.
어린아이와 대화할 때는, 아이가 묻는 대로 대답하거나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원래부터 이씨였습니다. 저는 폭죽 장사를 하는 이씨 가문 대방의 일곱째 서자입니다. 앞으로도 성씨를 바꿀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천륜을 어기는 대죄를 지어 족보에서 제명당하지 않는 한요.”
이무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족보에서 제명당한다면 무슨 성씨를 가지고 싶어요?”
정교랑이 곧바로 물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반근은 저도 모르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다가, 이무가 걱정되어 그의 안색을 살폈다.
부아가 치밀어서 까무러치거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면 어떡하지? 우리 아씨를 처음 대하는 사람은 아씨의 언행이 조금 버거울 수도 있을 텐데.
“족보에서 제명된다고 해도 저는 이씨일 겁니다.”
이무가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면서 대답했다. 정교랑이 아, 하고는 다시 이무가 건넨 상자로 눈을 돌렸다.
“이 거래는 하지 않겠어요.”
정교랑이 상자를 이무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해서도 안 되고요.”
해서도 안 될 거래라.
맞아. 이 여인과 내 생각이 일치한 거라면, 이게 해서는 안 될 거래이긴 하지.
반근이 자신을 배웅할 자세를 취하자 다급해진 이무가 물었다.
“낭자, 낭자께서는 이 물건을 아시는 거죠?”
아씨는 저 물건을 자세히 보지도 않았고, 뭔지 물어보지도 않으셨는데, 어째서 저 사람은 아씨가 저걸 아신다고 확신하지?
반근이 의아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요.”
역시 솔직한 사람이었어!
이무가 다소 흥분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은 채 몸을 앞으로 다가갔다.
“아, 아무리 만들어도 저는 이걸 맞게 만든 건지를 모르겠습니다. 낭자, 저, 저는 도저히 왜 그런지 이유를······.”
“저걸로 뭘 만들고 싶은데요?”
정교랑이 이무의 말을 끊고 물었다. 이무는 흠칫 놀라며,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반근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또 무슨 말이람. 뭘 만들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저걸 저렇게 만들어 왔다고?
반근이 이무를 쳐다보았다. 이무의 표정은 어딘가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길을 잃은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이무의 표정을 보고, 반근은 그가 정말로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걸로 뭘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면서, 맞게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고, 될지 안 될지는 어떻게 알겠어요?”
정교랑의 말에 이무는 또 한 번 멈칫했다.
“사실, 뭘 만들려는지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은······.”
이무는 뭔가를 말하고는 싶은데, 말로 표현해 내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는 두 손을 허공에 대고 이리저리 휘저으면서 무언가를 설명하려 했지만, 여전히 헤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던 그가 돌연 손을 허공에서 멈추고 눈을 반짝거렸다.
“맞아. 저걸 어떻게 써야 할 줄을 몰랐던 거야. 그래서 계속 잘못 만들었구나.”
이무가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람처럼 사라졌다.
방 안에 있던 반근과 마당에 서 있던 시종들은 우당탕 소리를 내면서 문밖으로 사라진 이무 때문에 깜짝 놀랐다. 놀란 기색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무가 다시 우당탕 소리를 내면서 회랑 아래로 뛰어 들어왔다.
“낭자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이무가 새빨개진 얼굴로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당치 않아요. 솔직하게 물어본 것뿐이에요.”
정교랑이 자신 앞에 있던 상자를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거, 놓고 갔어요.”
이무가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면, 부디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무가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정교랑에게 큰절을 올렸다.
“낭자께서 만드신 폭죽을 보고 생각해 낸 겁니다. 예로부터 이런 말이 있잖습니까. 한 글자의 가르침으로도 스승이 된다고요. 제가 감히 낭자의 제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절대로 스승님의 가르침을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
제자?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이무를 쳐다보았다.
본인이 생각해도 자신의 행동이 허무맹랑했는지, 이무는 얼른 몸을 일으키고 걸음을 옮겼다. 문가에 다다른 이무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정교랑을 향해 물었다.
“낭자, 그 사람의 성은 무엇입니까?”
밑도 끝도 없이 대뜸 묻는 이무의 질문에,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지? 누구를 말하는 거야?
의아한 얼굴로 서 있던 사람들과는 달리, 정교랑은 이무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진(陳)씨예요.”
이무가 허리를 숙이고 마지막으로 정교랑에게 예를 올렸다.
“이 이무가 꼭 기억하겠습니다.”
이무가 큰 소리로 외친 뒤 쏜살같이 문 앞에서 사라졌다. 옥대교 저택이 다시 평소처럼 조용해졌다.
반근이 이무가 남겨둔 상자를 들고 정교랑에게 물었다.
“아씨, 이건 보관해 둘까요?”
정교랑이 반근에게서 상자를 받아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상자를 바라보았다.
“아씨, 이건 뭐라고 불러요?”
반근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