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77
교랑의경 477화
고능준이 귀비의 손을 보며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마마, 걱정이 지나치신 듯합니다. 신이 전에 말했잖습니까. 바보였던 사람의 말을 믿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지.
귀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능준이 말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평왕의 안정입니다. 평왕이 학문에 얼마나 통달했는지는 중요치 않아요. 더욱 중요한 건 평왕의 품행이지요. 반대로, 군왕은 사람이 좋으면 좋을수록 상황이 나빠질 겁니다. 종친 주제에 그리 눈에 띄는 게 꼭 좋다고만 볼 순 없지요.”
귀비는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지만, 오늘 일을 생각하니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럼 이제 난 어떡하지요? 폐하께서는 나를 의심하고, 더 이상 체면도 지켜 주지 않으시는데, 내가 무슨 낯으로 살아요.”
귀비가 흐느끼면서 말했다.
“마마는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됩니다. 평소처럼 지내십시오. 대신 이것 하나만은 명심하십시오. 마마께서 개의치 않는다면, 남들도 개의치 않을 것이고, 마마께서 신경 쓰면 쓸수록, 남들 또한 신경 쓸 것입니다.”
고능준이 말을 끝낸 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마께서는, 오늘처럼 늦은 시간에 경솔하게 신을 부르지 마십시오.”
고맙다는 말을 하려던 귀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상공 자리에 앉지도 못하면서, 야밤엔 입궐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진소 대접을 받고 싶은가 보네.”
고능준이 실소를 터트렸다.
“마마께서 황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도 조심해야지요.”
평왕이 제위에 오르더라도, 황후가 태후에 오르는 것이 이치에 합당했다. 태후는 천자를 훈계할 수도, 후궁을 처벌할 수도 있는 자리였다. 귀비가 천자의 생모라고는 하나, 일이 생길 경우 조정 대신들은 귀비 편에 서지 않을 것이었다.
따라서 귀비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해 줄 수 있는, 남의 계략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을 대신들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훗날 고능준이 조정에 남아 있지 않더라도, 고능준이 키운 세력이 남아 있다면 귀비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 주리라.
고능준이 무슨 뜻으로 저 말을 했는지 귀비 자신도 잘 알았기에, 귀비는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고능준은 재빨리 자리를 떴다.
해가 지고, 또다시 새로운 날이 밝았다.
“십삼, 십삼.”
방 안에서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회랑 아래서 새장을 구경하고 있던 진십삼은 서둘러 대답한 뒤 안쪽을 쳐다보았다. 대청 안에는 벌써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갑니다, 가요.”
진십삼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탁자 위에 오른 요리는 평소보다 가짓수가 많았다.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진십삼이 예를 올렸다. 대청 분위기가 부쩍 밝아졌다.
“우리 진호가 또 한 살을 먹었구나. 축하한다.”
진 시강이 웃으면서 말했다. 형제자매들이 진 시강을 따라 술잔을 높이 들자, 진십삼도 술잔을 들고 답례를 하며 모두와 함께 잔을 비웠다.
진십삼의 나이가 아직 어린 탓에 따로 생일 연회를 열지는 않았다. 대신 집에서 식사하되 평소보다 가짓수를 늘려 다양한 요리로 생일을 축하했다.
진십삼은 형제자매들이 준 선물을 가득 안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진십삼의 방 안에는 이미 선물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옆에 있던 사환이 선물을 하나하나 짚으며 각 선물이 어디에서 온 건지 설명했다.
“주육낭은 뭘 선물했느냐? 설마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
진십삼이 곧바로 물었다.
“오늘 아침에야 도착했습니다.”
사환이 웃으면서 선물 더미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냈다. 진십삼이 미소를 보였다.
오늘 아침에 도착했다면, 일부러 시간을 계산해서 보낸 거로군.
진십삼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조잡하게 만들어진 단도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건 또 어느 재수 없는 놈한테서 뺏어 온 건지 모르겠네.”
진십삼이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단도를 손에 들고 몇 번 돌려보았다.
“공자님께서 주 공자께 선물하신 것보다 못한 거네요.”
사환이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공자님께서 언제 물건이 귀한지 아닌지를 따지셨어? 중요한 건 마음이야.”
다른 사환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십삼이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는 단도를 사환에게 던져 주었다.
“서재에 걸어 두어라.”
사환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재빨리 서재로 향했다. 진십삼은 잠시 주변을 서성이다가 주육낭이 준 상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정 낭자의 것은?”
“아, 정 낭자의 선물도 도착했습니다.”
사환이 대답하고는 선물 더미를 뒤적거렸다. 진십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따로 빼놓을 것이지.”
진십삼이 선물을 찾느라 분주한 사환들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찾았습니다!”
사환 하나가 명첩이 붙은 선물 하나를 높이 들고 기쁘게 외쳤다. 사환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며, 진십삼은 사환이 왜 그 선물을 한참 찾아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진십삼이 매해 받는 선물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붓, 먹, 종이와 벼루고, 다른 하나는 옥대나 향낭 따위,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주육낭이 선물한 잡동사니 같은 물건이었다.
사환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첫 번째 선물 더미에서 꺼낸 것이었다. 매년 제일 많이 받는 종류다 보니, 선물 더미 속에 파묻힐 수밖에.
진십삼이 손을 뻗어 선물을 받아왔다. 정교랑이 보낸 선물은 네모난 벼루였다. 꽤 값나가는 경성의 명품 벼루로 진십삼이 받은 다른 벼루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선물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분명 바쁘신 반근 관리인이 손수 고른 것일 테지. 반근은 선물을 아주 신경 써서 고르니까.”
11월이 되자 경성 날씨는 부쩍 서늘해졌다.
이른 아침부터 먹구름이 몰려오나 싶더니, 급기야 찬바람이 불어 행인들은 잔뜩 움츠린 모습으로 갈 길을 재촉했다.
성문 가까이에 있는 저택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서자, 쪽문에서 대화하던 두 여인이 마차를 바라보았다.
“반근.”
시녀가 마차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비단 치마를 입은 몸종이 마차에서 내리더니 손을 들어 너울을 쓰며 환하게 웃었다.
좀 전까지 시녀와 대화하고 있던 어린 몸종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자리를 피했다.
“어? 아직 얘기 다 안 끝났는데?”
놀란 모습으로 뛰어가는 어린 몸종의 뒷모습을 보며 시녀가 외쳤다.
“나중에 볼일 있으면 점포로 와. 집으로 찾아오지 말고.”
시녀의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다급하게 뛰어간 어린 몸종은 모퉁이를 돌아 종적을 감췄다.
“새로 산 몸종이야? 나 때문에 놀랐나? 왜 도망가지?”
몸종이 시녀의 시선을 따라 길가를 내다보며 웃었다.
“그러게. 장씨 댁 찬모가 워낙 유명하니 놀랄 만도 하지. 새로 산 몸종은 아니고, 사공자를 찾아온 애야. 참, 너랑 고향이 같아. 강주 출신이라던데?”
시녀가 몸종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우리 강주 사람이라고? 누군데?”
몸종이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 아이도 평범하진 않네. 경성 제일 화괴 주 낭자의 시녀거든.”
시녀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몸종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언니, 함부로 말했다가는 큰일 나. 사공자께서 어떻게 기방 여인과 친분이 있어?”
“누가 강주 선생 댁 몸종 아니랄까 봐, 이젠 군자의 도까지 배웠네.”
시녀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언니, 이 얘기가 퍼져나간다면 사공자께 좋을 게 하나도 없어. 언니가 그걸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몸종이 진지하게 말했다.
“알아, 알아. 사공자께서 주 낭자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몸종이 자주 찾아오는 것도 아니야. 강주에서 납치되어 인신매매로 팔려 온 몸종인데, 2년 전에 우연히 사공자와 마주쳐 알게 된 사이래. 평소엔 딱히 왕래가 없었는데, 이번에 사공자께서 경성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날 찾아온 거야.”
시녀가 말했다. 몸종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그 어린 몸종이 뛰어갔던 길을 내다보았다.
“근데 왜 날 보는 게 겁나서 도망친 것 같지?”
몸종이 물었다.
“너 무서워서 도망간 거라니까.”
시녀가 가볍게 대꾸하고는 몸종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며 화제를 바꿨다.
“오늘은 어쩐 일로 한가한가 봐?”
“갑자기 경성에 반근이 무더기로 생겨나는 바람에, 이 장반근은 쓸모가 없어졌지 뭐야. 돈도 못 벌게 됐으니, 언니네 와서 밥이나 한 끼 얻어먹을까 하고.”
몸종이 장난스럽게 한탄하는 시늉을 했다. 시녀가 배를 잡고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굳게 닫힌 저택 문 너머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퉁이 벽에 숨어 있던 춘령이 조심스레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춘령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창백했다. 춘령은 가슴께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저 반근은 그때 날 봤을 거야. 몇 년이 흐르긴 했지만, 날 알아볼 수도 있어.
춘령의 심장이 요란스럽게 쿵쾅댔다. 춘령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열두 살인 지금은 어릴 때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때 모습이 남아 있을 테니 조심해야겠어.
반근이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그 표독한 여인은 분명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날 죽여 버릴 거야. 우리 두 자매의 살길을 끊어 버렸던 것처럼, 똑같이 날 죽이려 들겠지.
죽는 건 무섭지 않아. 아무 의미도 없이 죽는 게 두려울 뿐이지.
춘령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저택 앞에 세워진 마차와 굳게 닫힌 대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때 춘령의 머리 위로 차가운 물기가 느껴졌다.
눈이 내리네.
춘령은 옷깃을 여미고 저잣거리 속으로 빠르게 몸을 감췄다.
“눈 온다!”
정칠랑이 마차 휘장을 들어 올리고 신이 난 모습으로 외쳤다.
“어서 휘장 내려라. 추워 죽겠다.”
정 이부인이 정칠랑을 확 잡아당기며 휘장을 내렸다. 정 이부인의 손에는 손난로가, 발치에는 화로가 놓여 있었지만, 여전히 온몸을 덜덜 떠는 정 이부인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정말 사서 고생이야!”
정 이부인이 다시 휘장을 들어 올리고 소리쳤다.
“역참까지 얼마나 남았느냐?”
“부인, 아직 대여섯 리 남았습니다.”
시종이 대답했다.
아직도 대여섯 리나 남았다고?
정 이부인은 초조해하며 마차를 끄는 야윈 말을 쳐다보았다.
“그러게 내가 좋은 말로 바꾸자고 했잖아요. 내 말은 듣지도 않지! 어른도 이렇게 추운데 아이들은 오죽하겠어요!”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두꺼운 겨울용 두봉을 두른 정 이노야는 아들을 품에 안고 있었다. 두 부자는 머리만 바깥으로 내놓은 채 장난을 치며 웃었다.
“지금 누굴 탓하는 거요? 누가 당신더러 돈을 그리 조금 챙겨 오라고 했소? 그 푼돈으로 경성까지 어떻게 버티라고. 지금 와서 좋은 말로 바꿀 만한 돈도 없고.”
정 이노야가 콧방귀를 뀌면서 대답했다.
“내가 돈을 적게 챙겼다고요? 형님이 돈을 안 주는데, 그럼 내가 소매 걷어붙이고 돈이라도 빼앗아 왔어야 한단 거예요, 지금?”
정 이부인은 말을 하다 보니 울화가 치밀어 더욱 목청을 높였다.
“그리고 당신 딸도 그래요. 우리가 경성에 가는 걸 빤히 알면서 돈도 한 푼 안 보내 주고. 그 조 집사란 놈도 평소에는 우리 돈을 물 쓰듯이 하면서, 이번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잖아요!”
“그놈은 나중에 제대로 손봐 줘야지. 주씨 가문에서 바보를 좌지우지하니까, 조 집사 놈도 그 뒷배를 믿고 설치는 거요. 우리가 경성에서 자리를 잡으면, 주씨 가문 따위가 대수겠소?”
정 이노야의 말에 정 이부인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역참에 도착하면, 좋은 역마로 바꿔요. 돈 나가는 일도 아닌데.”
정 이부인의 말에 정 이노야가 고개를 저었다.
“허튼소리. 우리가 어찌 역마를 쓸 수 있단 말이오?”
정 이노야는 더 이상 정 이부인을 상대하지 않고, 품에 안고 있던 아들을 바라보았다.
“어이구, 착하지 우리 희가아. 말 타고 경성에 가면 사탕도 먹고 큰 저택에 살 수도 있을 게야.”
어린아이가 정 이노야를 쳐다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정칠랑도 서둘러 정 이노야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아버지, 저도 큰 저택에 살래요. 새 옷도 사고, 장신구도 새로 사고요.”
“그래, 그래. 다 사자, 다 사. 이 아비가 다 사 주마. 너희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도 사 줄 수 있어.”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정 이노야가 기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 이부인이 세 사람을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정 이노야의 발치로 화로를 슬며시 밀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