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8
교랑의경 48화
밤의 어둠이 내릴 무렵, 경성에 있는 진소의 집에서는 드디어 돌아온 집사가 자세한 사정을 전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씨께서 그 계집의 이름을 불렀던 걸 누군가가 기억하셔서 그 이름을 댔더니, 운 좋게도 그 집 점원이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계집이 자기 집에서 음식을 가져와 점원이 씩씩거린 일이 있어 기억에 남았다더라고요.”
착한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고 했던가. 진소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우연이 있나, 우연에 우연이 겹치다니.
“그래서 어느 댁 낭자인지는 알아냈는가?”
“당시 별실에는 공자님만 두 분 계셨답니다.”
진소의 물음에 집사가 대답했다. 공자라고? 아버지 말씀으로는 그 계집이 낭자의 시중을 들었다고 했는데? 그것도 나이가 열네다섯 살쯤 된 낭자랬는데, 왜 갑자기 공자로 바뀐 거지? 진소는 미간을 찌푸렸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두 공자님께서도 경성의 유명 인사란 사실이지요.”
집사가 말을 이었다.
“한 분은 노섬 주씨 가문 공자님이고, 한 분은 다리를 저는 진 공자님이십니다. 반근이 두 분 중 누구의 몸종인지는 점원도 모른답니다.”
주씨 가문과 진씨 가문이라. 진소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렇다면 내 명첩을 들고 가 알아보면 되겠군.”
집사의 생각도 그와 같았다. 둘 다 평민 백성의 집안은 아닌지라 함부로 찾아가 몸종의 일을 묻는 건 곤란했다. 노야의 명첩을 들고 가면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집사는 네 하고 대답한 후 뒤돌아 나갔다.
술을 마시고 말까지 타다 돌아온 진 공자는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누워 쉬고 있었다. 밖에서 몸종들이 떠드는 소리가 진 공자 귀에 들렸다.
“방금 누가 누굴 찾았다고 했느냐?”
진 공자가 휘장을 들며 묻자 몸종들이 얼른 들어와 휘장 앞에 꿇어앉았다.
“공자님께 아뢰옵니다. 진소 상공 댁에서 사람을 보내 저희에게 반근이라는 이름의 몸종이 있는지 물으셨어요. 기이한 일인데 이유는 잘 모르겠고요.”
진 공자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구? 진소?”
진 공자가 이어 물었다.
“반근이라고?”
몸종들은 공자가 그런 어투를 쓰는 일이 드물었기에 흠칫 놀라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휘장을 들어올렸다.
“네, 진 상공의 명첩이에요. 반근이 저희 집 몸종이냐고 물었어요.”
몸종이 진지하게 말했다. 진 공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손을 뻗어 침상 옆에 있는 지팡이를 집어 들며 말했다.
“주씨 저택으로 가자.”
지금? 몸종들은 놀라 밖을 쳐다봤다.
한편 주육낭은 기력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부친의 부름을 받기 전까지 연무장에서 권법을 연마하고 있었던 터라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걸어왔다.
“바람이 찬데 풍한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주육낭의 모친은 걱정스러운 듯 말하며 몸종을 시켜 땀을 닦을 수건을 가져오게 했다. 주육낭의 부친이 성가신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다들 물러가라.”
주육낭의 모친은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몸종들과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주육낭이 입을 열었다.
“네가 데려온 아이가 보통이 아니더구나.”
부친의 말에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말투나 행동거지가 남다른 면은 있지만, 뜯어보면 별다를 것도 없습니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늘 화법이 직설적이었다. 말을 마친 주육낭이 부친을 쳐다보며 말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방금 진 상공 댁에서 사람을 보내 왔다.”
주육낭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런 고관대작 유학자가 주씨 가문을 찾아왔다고? 혹시 국본을 세우는 일 때문인가?
황제는 어느덧 연로했고 몸이 허약해 병치레가 잦아 태자 책봉은 시급한 문제였다. 황자 둘을 놓고 조정에서는 의논이 분분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화가 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다른 이들은 골치가 아프다며 피하려고 했지만, 주씨 가문은 이를 엄청난 기회로 여겼다.
애석하게도 무장은 지위가 낮았고 주씨 가문의 관직 역시 무장 중에서도 낮은 축에 속했다. 조부의 선견지명으로 경성에 올라와 일거에 명성을 얻지 않았다면 이 넓은 경성 바닥에서 주씨 가문에 대해 아는 자는 이미 없었을 것이다. 이들을 포섭하고자 손을 내미는 이가 없는 마당에 무턱대고 찾아가 각오를 다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먼저 찾아와 주다니, 그것도 그런 엄청난 거물이.
“진 상공께선 선택을 하신 겁니까?”
주육낭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눈을 빛냈다.
“누구를 따른답니까?”
금방이라도 옷소매를 걷고 누가 됐든 일단 달려들어 덤빌 태세였다. 자고로 부귀영화는 위험 속에서 얻는 법이라고 했다. 앞뒤를 살피고 이것저것 재며 몸을 사리는 게 꼭 안전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크게 한바탕 붙고 나면 성패가 어찌 되든 속은 시원할 터였다.
주육낭의 부친은 아들의 모습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동시에 집사가 가져온 명첩을 받아들 당시 자신의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육낭, 괜한 생각을 하는구나.”
부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진씨 가문에서 그 몸종에 대해 물었다.”
멈칫했던 주육낭이 물었다.
“반근이요? 무슨 일로요?”
주육낭의 부친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내가 물으려던 참이다.”
그 계집이 진 상공을 알았단 말인가? 말하지 않은 일이 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그저 영리하고 기민한 덕에 그 바보를 데리고 천 리 길을 이동해 집까지 데려다줬다고 여겨 딱히 더 묻지는 않았건만.
“제가 가서 물어보겠습니다.”
주육낭은 곧장 뒤돌아 나갔다. 문밖에서 집사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노야, 진 상공께서 오셨습니다.”
명첩을 보내 확인하자마자 이렇게 빨리 직접 찾아왔다? 주씨 부자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토록 중요한 계집이었단 말인가? 주씨 부자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객청으로 나가 맞이했다. 두봉(斗篷: 머리 부분을 덮는 쓰개가 달린 옷) 차림의 진 상공은 벌써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고 있었고, 여자아이를 안은 노복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진…….”
주육낭의 부친이 얼른 허리 굽혀 인사하며 진 상공을 맞이했다. 인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진 상공이 두봉을 벗으며 맞절을 했다.
“귀댁의 낭자께 목숨을 구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목숨을 구한다니? 주육낭의 부친은 영문을 몰라 하며 물었다.
“어느 낭자 말씀이십니까?”
주씨 가문 3형제 슬하에 있는 7남 8녀 중 딸 다섯은 이미 출가한 상태였고 집에는 셋이 남아 있었는데, 막내는 아직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였다. 그런 딸에게 진 상공의 목숨을 구할 능력이 있다고?
“반근이란 계집이 시중을 드는 낭자 말입니다.”
진소가 말했다. 반근이 시중을 드는 낭자?
“반근은 우리 육낭의 시중을 드는데요.”
주육낭의 부친은 말하면서 객청 밖을 내다봤다.
“아, 저기 오는군요.”
진소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두 몸종이 등을 들고 한 몸종을 안내해 급히 걸어오고 있었다. 주육낭도 회랑 아래까지 나가 있었다. 여자아이는 급히 걸어오는 몸종을 보고 신이 나서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언니.”
반근은 흠칫 놀랐다. 이 집에서 저 아이를 또 볼 줄이야.
“너는…….”
막 입을 열려던 반근은 공자와 노야가 한자리에 있는 걸 보고 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언니, 우리 할아버지가 언니를 봐야겠대.”
여자아이가 달려와 반근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반근 낭자, 큰비가 내리던 날 사당에서 낭자의 아씨가 술을 나눠 주며 병세를 물었던 노인을 기억하시오?”
진소는 자신의 딸과 반근이 서로 아는 듯한 낌새를 보고 구면이라 확신한 후 지체하지 않고 물었다. 반근은 갑작스레 다시 나타난 여자아이 때문에 혼란스럽던 찰나에 낯선 사내로부터 그 일에 관한 질문을 받자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
그날, 큰비, 낡은 사당, 마차, 화로에 데운 술, 고단했던 여정. 아씨는 병으로 지난 일을 금세 잊으시고 자신은 이제 아씨 곁을 지키지 않는다. 그런 지난 일을 다시 언급할 이는 평생 없을 줄 알았기에, 순간 왈칵 눈물이 나왔다.
“그런데 누구세요?”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소는 자신의 질문을 인정하는 반근의 대답에 내심 크게 기뻤다.
“그 노인이 바로 내 부친이시오. 그 아씨의 혜안을 부친께서 미처 모르셨던 것 같소. 병환이 깊어 병석에 앓아누우셨는데, 부디 아씨께서 구해 주셨으면 하오.”
진소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극진한 예를 표했다. 일개 몸종에게 이런 예를 표하다니, 진소가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주씨 부자는 영문을 모르겠는 눈치였고 반근 역시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노인, 병환, 아씨, 그 모든 게 머릿속에 윙윙 울렸다.
“아씨요? 어느 아씨요?”
반근은 멍한 채로 중얼거렸다. 때마침 도착한 진 공자는 그 대화를 듣고 순간 모든 걸 깨달았다. 그동안 뭔가 이상하다고,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의문이 단숨에 풀려 버렸다.
“네게 간식 만드는 법을 알려 준 그 아씨 말이다. 그 아씨도 차를 싫어한댔지. 너와 천 리 길을 함께 해 집으로 돌아간 그 아씨 말이야.”
진 공자는 앞에서 부축하던 시종들을 제치고 지팡이에 의지해 절뚝거리며 직접 걸어왔다.
* * *
곁방 안. 주육낭과 진 공자는 앞에 꿇어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반근을 쳐다봤다.
“그때 길에서 만났는데 아씨께서 어르신의 병을 빨리 치료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진료비를 받겠다고 하자 그 어르신께서는 웃으며 아씨의 말을 믿지 않고 가 버리셨죠. 그런데, 그런데 정말 병이 나셨네요.”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주육낭은 머릿속이 어지러운 듯 반근의 말을 끊었다.
“아씨의 말, 아씨의 말이라니. 어느 아씨가 말했단 말이냐?”
진 공자는 한숨을 쉬었다.
“육낭, 믿지 않으려고 하지 마. 어느 아씨인지 뻔히 알잖아.”
주육낭은 그래도 고집스럽게 반근을 쳐다봤다.
“우리 집 아씨요.”
반근이 주육낭을 보며 대답했다.
“그 바보?”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그 바보가 병을 치료한다고?”
“우리 아씨는 바보가 아니에요. 병에 걸리셨던 건데 조금씩 나아지고 계세요.”
반근이 절절한 말투로 대답했다.
“네, 아씨는 병을 볼 줄 아세요. 엄청 대단하시죠, 대단하세요.”
주육낭은 놀란 눈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허튼소리! 황당하군!”
주육낭은 옷소매를 뿌리치며 소리쳤다. 일개 바보가! 일개 바보가!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반근은 주육낭의 호통에 놀라 몸을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반근.”
진 공자가 말을 받아 반근을 보며 물었다.
“내가 묻겠다. 병주에서 강주까지 어떻게 돌아왔지?”
반근이 진 공자를 쳐다봤다.
“가다가 쉬었다가 하면서 돌아갔어요.”
처음 데려왔을 때 물어봤던 건데? 대답도 했잖아?
“여비 말이다. 여비는 어찌 구했고?”
진 공자가 물었다.
“그게, 아씨께서 병을 치료하며 마련하셨어요.”
반근이 대답했다.
“허튼소리!”
주육낭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대체 무슨 저의를 품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너희 여비는 내 조모님께서 남겨 주신 돈이 아니었느냐?”
그래서 안 물어봤던 거다. 물어볼 필요도 없으니까! 뻔한 일을 뭐 하러 물어? 이 계집이 감히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반근은 당황하여 주육낭을 쳐다봤다. 공자님이 왜 이렇게 분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알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