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89
교랑의경 489화
경성에 들어오기 전 한 대인은 관청 일로 바빴고, 한원조는 책에 머리를 파묻고 공부에 매진하느라 정교랑에 관한 소식을 알지 못했다. 한원조 부자도 풍림처럼 그날 역참에서 들은 이야기를 통해 정교랑과 관련된 일들을 알게 되었다.
두 부자는 이번에 경성으로 들어온 김에 태평거의 행수를 만나보고자 했다. 상대가 조정 중신일 수도 있으니 만나기 힘들 수도 있다고 예상은 했지만, 뜻밖에도 상황은 두 부자의 예상과 사뭇 달랐다.
“내 생각에는, 정 낭자가 그렇게 사리사욕이 많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때 네가 행한 사소한 일조차도 큰 은혜로 여기는 이가 아니더냐.”
한 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아버지, 사람의 사리사욕은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게 아닙니다. 신분과 지위에 따라 달라지곤 하지요.”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던 한 대인은 한원조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우리는 정 낭자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지 않느냐. 다 남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지.”
두 사람은 거기서 잠시 대화를 멈추고 주위 사람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튼, 나는 정 낭자가 좋은 사람 같아. 풍 판관이 정 낭자를 죽이느니 마느니 할 필요까지 있어? 까놓고 말해서, 정 낭자가 뇌물을 받았어? 국법이라도 어겼어?”
“어딜 봐서 좋은 사람인데?”
어딜 봐서 좋은 사람이냐는 질문이 나오자마자, 주위에서 왁자지껄하게 정교랑에 관해 떠들기 시작했다. 신의 낭자, 무원산 술, 차정사 글씨, 신비궁 등등.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던 한원조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정 낭자의 손에서 기사회생한 사람들의 목숨값은 천금에 가깝고요. 그러다 보니, 정 낭자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병을 치료해 주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겠죠. 그리고 실제로도 자신이 원했던 목적을 달성해 신의 낭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고요.
술로 말할 것 같으면, 노제를 지내 의형제의 영을 기리기 위해 빚은 술이지만, 어쨌든 간에 그 술을 마시는 사람은 산 자입니다. 그러니 산 사람인 경성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던 거고요.
글씨는 정 낭자가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단지 쓰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 준 것뿐이며, 신비궁은 정 낭자가 원하던 바를 이루고 난 후에야 조정에 바친 겁니다. 단순히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려는 이유로 바친 게 아니지요.
아버지, 사람들이 말하는 정 낭자의 좋은 일들을 하나씩 곱씹어보아도, 모두 정 낭자가 사심을 품고 한 일들입니다.
아둔한 백성들은 이 일을 그저 흥밋거리로 소비하겠지만, 조정의 대신들은 다릅니다. 정 낭자의 손에 놀아나는 것도 잠시지, 평생 이렇게 정 낭자를 방관하지는 않을 겁니다.
정 낭자의 행실에 대해 불만을 품은 자가 한둘이 아니겠지요. 폐하께서도 분명 정 낭자에 대해 꺼리시는 게 있을 거고요. 태후께서 정 낭자의 혼사에 대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아버지도 아시잖습니까. 정 낭자에게 사심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심이 있고, 황제 폐하에게도 당연히 사심이 있으나, 서로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음에 사심이 없는 풍림이 나타나 버렸으니······.”
한원조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끝을 흐렸다. 한 대인은 한원조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구나. 참으로 안타까워.”
“안타깝다고? 뭐가 안타깝다는 게요?”
풍림이 상소문을 탁 하고 내려놓으면서 반대편에 앉은 노사안을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중승, 그래도 정 낭자가 가진 재능이 출중하거늘,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니오?”
노사안의 말에 풍림이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재능이 출중하다 하였소? 마음가짐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그 출중한 재능은 언제든 조정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그 출중한 재능이 의형제의 억울함을 푸는 일과 가족의 이득을 챙기는 일에만 쓰이고, 감히 천자를 어지럽힌다면,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설령 정 낭자에게 사심이 있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소. 도리어 조정이 강문원와 같은 무능한 장수들을 유능한 장수로 물갈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 그것만 봐도, 정 낭자가 큰 공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지 않소?”
노사안이 말했다.
“큰 공?”
풍림이 상주문을 다시 집어 들고 천천히 말했다.
“왕망(王莽: 중국 전한의 정치가.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를 빼앗아 국호를 신(新)으로 명명함)도 한나라의 권력을 찬탈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왕망을 칭송하고 큰 공을 세웠다며 치켜세웠지.”
풍림의 말에 노사안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중승이 정 낭자를 왕망과 같은 선상에서 논한다는 것만으로도 정 낭자는 충분히 만족하겠군.”
노사안의 말을 듣고 나서야, 풍림은 자신이 뱉었던 말을 되새겼다.
내가 어찌 일개 여인네와 왕망을 비교했단 말인가. 도가 지나쳤군.
풍림도 헛웃음을 터트렸다. 실내의 긴장된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풍림과 노사안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서로 3년 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둘 다 어사대로 부임하며 재회하게 된 터라 그들은 더욱 기뻐했다.
“관지(寬之), 자네 참 많이 변했어.”
노사안이 직접 우린 차를 풍림에게 건넸다. 풍림이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시고는 여운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한 곳을 바라보았다.
“내 목숨이 지금껏 붙어 있는 이유는, 다 운 덕분일세. 운이 아니었다면, 난 벌써 새까맣게 타서 한 줌 재가 되었을 것이야.”
풍림이 말했다.
3년 전, 역참에서 풍림이 불에 타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는 노사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니, 노사안도 잠시 감상에 젖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살아 있다고는 하나, 내 목숨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닐세. 그때 날 도와줬던 분은 내 감사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어. 그러고는 내가 나 스스로를 구한 것과 다름없다고 말해 주었지. 그때 나는 결심했네. 앞으로는 결코 생과 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이 내게 준 여생을 가치 있게 보낼 거라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이 한 몸 다 바쳐 그 은인께 보답하겠다고.”
풍림이 말했다.
노사안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풍림이 그날 어떻게 목숨을 건졌는지는 노사안도 잘 알았다.
“그분은 내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관리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뼛속 깊이 새길 교훈까지 주셨다네.”
풍림이 이어서 말했다.
차를 들이켜던 노사안은 갑자기 사레가 들린 건지 연신 기침을 해댔다. 노사안이 소매로 입가를 닦으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관지! 자네가 언제부터 그런 농담을 할 줄 알았나?”
“농담이 아닐세.”
풍림이 진지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날 내가 반 시진 남짓한 시간 동안 보고 듣고 느낀 건, 일생의 수확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어.”
단호한 풍림의 모습에 노사안이 웃음기를 거두었다.
“알겠네, 알겠어. 어쩐지 자네가 3년 사이에 딴사람이 된 것 같다고 했더니만. 이게 다 한 번의 마주침에 값진 가르침을 준 스승 덕분이었군.”
풍림이 노사안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그 스승이 여인이라지?”
노사안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고로 스승이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는 법일세.”
풍림이 엄숙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노사안은 그런 풍림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은인도 여인이고, 정 낭자도 여인이고.”
“감히 내 은인을 누구와 비교하는 것인가? 내 은인은 대의에 초연한 분이야. 귀신을 운운하며 백성을 현혹하는 여인과 비교하다니!”
풍림이 노사안의 말을 끊고는 버럭 화를 냈다.
시녀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도 반근은 여전히 눈물을 쏟고 있었다. 시녀가 반근의 앞에 앉으며 반근을 다독였다.
“그만 울어. 태평거에서 돌아오는 내내 울었잖아. 아씨께서도 화를 안 내시는데, 네가 이러면 어떡해.”
“아씨께서 화내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아씨 대신 화내고, 아씨 대신 울 거야. 아씨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하셨다고, 다들 아씨를 이렇게 대하는 거지?”
반근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아씨는 그들에게 위협이 되니까.”
시녀가 대답했다.
“무슨 위협이 됐는데? 아씨가 그 사람들 돈을 뺏은 것도 아니고.”
반근이 대꾸했다.
“돈이 아니라 신념의 문제지.”
시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신념? 그깟 신념이 뭐길래!”
반근이 눈물 고인 눈으로 시녀를 쳐다보았다. 시녀가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신념은 별건 아니지만, 돈보다도 더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사실 이번 일도 예전 일들과 다를 바 없어. 두칠, 유 교리, 정 대노야 때와 똑같은 일이야.”
똑같은 일이라고?
반근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시녀가 반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똑같아.”
대놓고 잘잘못을 가리며 서로 삿대질하는 일보다 더 엄중하고 속상한 일이지.
반근이 정교랑의 방으로 들어설 때, 정교랑은 탁자 앞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아씨, 속상하시죠?”
반근이 정교랑 앞에 꿇어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속상할 게 뭐 있어. 내가 말했잖아. 사람들이 널 좋아하지 않는 건 이상할 게 없고, 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행운이라고.”
정교랑이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씨가 잘못하신 게 없잖아요.”
반근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정교랑이 책에서 시선을 떼고 반근을 바라보았다.
“그건 남들과는 무관한, 네 생각일 뿐이야.”
반근이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옳고 그름은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정교랑은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어갔다.
“네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해서 옳은 게 아니야. 물론, 그들이 옳다고 한다 해서 옳은 것도 아니지. 그러니까,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바에만 집중해. 남들의 인정과 감사를 얻을 생각은 하지 말고, 네가 원했던 목표를 달성했는지를 봐. 그랬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야.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해.”
“하지만 아씨, 이번에는 풍림과 한 공자님이잖아요.”
반근이 고개를 푹 숙이고 울먹였다.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를 게 있어? 다 똑같지.”
정교랑이 대답했다.
“다르죠. 그들이 아씨를 도와준 적도 있고, 아씨가 그 사람들을 도와준 적도 있잖아요. 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아씨는 서로 어떤 은혜를 베풀었는지 알고 계시고요. 지금 그들이 이러는 게, 아씨의 등에 칼을 꽂는 것과 뭐가 달라요? 아씨, 많이 아프시죠?”
반근이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갑자기 정교랑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교랑이 이렇게 크게 웃는 건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웃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어서, 반근은 화들짝 놀라 우는 것도 잊은 채 놀란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어리석긴. 그 사람들이 뭐라고, 그 정도에 내가 아프겠어? 그건 아프다고 하기도 민망하지.”
정교랑이 웃으며 말했다. 눈물로 흐릿해진 반근의 시야에 정교랑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가려운 축에도 못 들어.”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했다. 정교랑의 얼굴에는 차츰 웃음기가 걷히고, 희미한 미소만이 걸려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것?
반근이 눈물을 닦으며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지?
황제가 손에 쥔 상소문을 내려놓으며 한쪽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짐의 차를 얻어 마시려고 입궁한 것이냐?”
황제가 물었다.
“에이, 그럴 리가요. 폐하, 오늘은 대조회가 있는 날 아닙니까. 신이 정정당당하게 폐하의 용안을 뵐 수 있는 날이니, 폐하 곁에 오래 머무르려고 그러죠.”
진안 군왕이 능청맞게 대꾸하자 황제가 퉤 하고 침 뱉는 시늉을 했다.
“허영심만 가득한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그런 것만 배웠더냐. 네가 정정당당하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 뭘 하든 정정당당한 것이니라.”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한 뒤,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말없이 진안 군왕을 바라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정 낭자를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건 아니고?”
황제의 물음에 진안 군왕은 고개를 들어 놀란 표정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폐하, 무슨 말을요?”
“좋은 말 말이다.”
황제가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