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05
교랑의경 505화
한편 다른 곳에서는 장 노태야도 붓을 들어 병풍에 획을 추가하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장 노태야가 말했다.
“너무 작구나.”
장 노태야가 붓을 들어 획을 하나 추가했다.
“진소 것은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 크게 그려야지.”
옆에 있던 노복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풍림은 자청하여 외직으로 나갔습니다.
“이번엔 그래도 영리하게 굴었구나. 자청할 줄도 알고. 폐하께 쫓겨난 게 아니니 그래도 체면은 지킨 셈이야.”
장 노태야가 웃으며 붓을 내려놓았다.
“본성은 순박하고 양심적인 사람이다. 회계와 장부 관리에도 재능이 있고.”
노복이 웃으며 대꾸했다.
“유능한 신하기는 하나, 어사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삼사에 있었으면 딱 좋았을 텐데요.”
하나 이젠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번에 떠나면 다시는 경성으로 돌아올 기회가 없으리라.
“잘코사니지. 그러게 누가 재수 없게 그 여인을 건드리래?”
장 노태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 여인 손에 신세를 망치고 죽어 나간 사람이 몇이나 되나 세어 봐라. 아주 불운 덩어리야. 건드리면 무조건 다친다니까. 보기만 해도 사흘은 재수가 없어. 나도 그래서 안 보러 가는······.”
장 노태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총총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노태야, 노태야.”
장 노태야가 얼른 노복을 향해 쉿 하는 손동작을 했다.
“제 주인더러 불운 덩어리라고 한 걸 알면 사흘은 밥을 안 해 줄 거다.”
장 노태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노복은 어이가 없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으로 들어오는 몸종을 바라보았다. 몸종은 들어오자마자 털썩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노태야. 저희 아씨는 무사하세요.”
몸종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밝게 웃었다.
“무사하다고? 풀려났단 말이냐?
장 노태야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묻자, 몸종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노태야, 또 절 놀리시네요. 부인께서 인편을 통해 알려 주셨어요. 아씨께선 무사하시다고요.”
“나한테 고마워할 건 없다. 난 아무것도 도운 게 없거든.”
장 노태야가 웃으며 말했다.
“노야께 감사 인사 올리러 갈 거예요. 노야는 노태야의 아드님이시니, 노태야께도 감사 인사를 올려야죠.”
몸종은 인사를 올리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안에서 들려오는 장 노태야와 노복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몸종도 고개를 들고 눈물을 닦으며 다시 웃었다.
“나한테 뭐가 고맙단 말이냐?”
이제 막 조회를 마치고 서재로 돌아온 장순은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는 몸종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반근은 아씨를 지켜 주신 노야께 감사드려요.”
“내가 언제 그 여인을 지켜 줬단 게야?”
장순이 인상을 썼다.
“부인께서 말씀하셨어요. 노야께서 조당에 나가 아씨와 큰 도련님을 위해 말씀해 주셨다고요.”
몸종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장순이 책을 내려놓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언제 그들을 위해 말했단 말이냐. 난 조당에서 수다스럽게 떠드는 거 질색이다. 곧 서원 수업도 해야 하는데, 두세 마디면 끝날 일을 이러쿵저러쿵하며 끝도 없이 물고 늘어지니 원. 누가 그리 한가한 줄 알고!”
몸종은 그래도 머리를 조아렸다.
“관두자.”
장순이 몸종을 보며 도리가 없다는 듯 말했다.
“너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 해명하고 말 것도 없고, 해명해도 소용없어. 좋을 대로 생각하거라.”
몸종이 네 하고 대답했다. 뒷걸음질로 물러난 몸종은 문가에 다다라 다시 한번 예를 올렸다.
“소인에게 특별히 해명해 주신 노야께 감사드려요.”
인사를 마친 몸종이 물러갔다.
장순은 그 말에 멈칫하여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가,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계속해서 서책을 보기 시작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각자 이런저런 추측을 내놓고 있을 때, 정교랑은 아직 황궁에 있었다. 조회는 진작 끝났지만, 황제는 여전히 쉬지 못했다.
근정전에서 청심환을 먹으며 간신히 노기를 가라앉히고 있던 황제는 이무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황제는 이번 일로 인한 조당의 풍파를 뒤로한 채, 새로 개발한 병기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정 낭자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이무는 이어서 정교랑에게 예를 표하고, 흥분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치 않습니다.”
정교랑이 허리를 숙여 답례했다.
“정 낭자, 이무에게 듣자 하니 그날의 폭죽은 다른 것과 달랐다던데, 그 역시 그대가 말한 일도의 이치 때문이냐?”
황제가 물었다.
“스승님께서 재미로 가르쳐 주신 잔재주에 불과할 뿐입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다른 이는 가지고 놀 수 없는 재미라면 대단한 재주지.”
황제는 감탄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눈치였지만, 아쉬워한들 도리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걸 소중히 여기는 수밖에. 황제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이무를 쳐다보았다.
“서두르면 이 돌포탄을 몇 개나 만들 수 있겠느냐?”
이무가 허리를 숙이고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폐하, 돌포탄을 만드는 건 쉬우나, 화약의 배합이 쉽지 않습니다. 품이 많이 들어서요.”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희색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필요한 게 있거든 편히 요구하거라. 세밑이 되기 전에 변방으로 보내면, 오랑캐 놈들한테 대단한 새해 선물이 되겠지?”
“시간이 부족할 듯싶습니다. 돌포탄을 다루는 게 워낙 위험해서요.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소인의 집에서 폭발이 일어나 큰불이 나지 않았습니까.”
위험하긴 하지.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본 광경을 떠올렸다.
“인화 물질을 채우려면, 병사들도 어느 정도 기술이 숙련되어야 하고요. 까딱 잘못하면 적을 쳐부수기도 전에 우리가 다칩니다.”
이무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돌포탄을 다룰 병사들을 특별히 양성해야겠구나.”
“네,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보셨겠지만, 소인이 발석거를 개조했사온데 효과가 신통치 않습니다. 두세 번 쓰고 나면 못쓰게 되죠. 이 속도라면 손실이 너무 큽니다.”
그거야말로 큰 문제지.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무의 말대로라면 돌포탄을 보급하는 것 자체가 적합하지 않았다. 마차 한 대를 말 열 마리가 끌어야 한다면, 아무리 튼튼한 마차라 해도 쓰지 않을 게 분명했다.
“발석거 말인가요?”
쭉 침묵을 유지하던 정교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내게 가르침을 얻었다고 말하고 날 스승으로 여긴다 했는데, 나도 그 말을 헛되이 할 순 없죠. 그렇다면 발석거를 어떻게 개조해야 그 돌포탄을 쓰는 데 적합할지 알려 줄게요.”
돌포탄에 적합하게 발석거를 개조할 방법을 알려 주겠다니!
황제와 이무가 크게 기뻐했다.
역시, 역시! 이래서 바라는 게 있어야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난다고 한 건가?
의형제가 말을 키우기 원하자 말편자를 주었고, 나라를 위해 적을 무찌르기 원하자 신비궁을 만들어 주었지. 이제 그 의형제가 없어진 지금, 이무가 튀어나왔어.
한 번 만나 조언 한마디 구한 일로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나서니, 이 어린 낭자가 보답하려는 게로군.
황제는 황성사에서 알아 온 정보를 떠올렸다. 당초 이 어린 낭자가 무원산 형제들과 결의를 맺을 때도 그 의형제들이 무심결에 잃어버린 사환을 구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겨우 그만한 일로 결의를 맺다니. 어디 그뿐인가. 태평거를 주고 오라버니로 대우했으며, 전장에 나가 싸우고 싶다고 하자 전장으로 보내 주었지.
당신이 날 영예롭게 해 준다면, 나 역시 당신에게 영광을 안겨 주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황제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이건 대체 무슨 보은이지?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면 좋은 일이 생기지만, 풍림처럼 은혜를 알고도 보답하지 않으면 끝장인 게로구나!
풍림 생각이 나자 황제는 울화가 치밀었다.
감히 짐을 혼군이라 욕해? 풍림 이 빌어먹을 놈! 굴러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차 버렸구나.
이무를 좀 봐라. 저 스스로 좋은 운을 개척하잖아. 그 누구도 제자로 들인 적 없는 이 낭자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어. 억수로 운 좋은 놈이지.
황제가 이무를 쳐다보았다. 이무 역시 정교랑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는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이무가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다.
“제자로 거두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님.”
이무는 정교랑이 뭐라 대꾸할 틈을 주지도 않고, 쿵쿵 머리를 찧으며 절을 올렸다. 행여 조금이라도 망설였다간 이 낭자가 자신의 말을 번복할까 겁난다는 듯이.
“그럼 다음에 누가 또 교활한 술수로 농간을 부린다고 질책할 때,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도 되겠죠.”
정교랑의 말에 황제가 실소를 터트렸다.
역시 아직 어린 여인이야. 뒤끝이 있네.
불과 한나절 만에 황성사에서는 이무에 대해 샅샅이 조사했다. 확실히 정교랑과는 왕래가 없었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성문을 지켰던 병사들까지 찾아 조사한 결과, 그날 이무는 성벽에서 불꽃놀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비웃음까지 샀다고 했다.
불꽃놀이를 봤다고 병기를 떠올리다니 갸륵한지고. 저런 자에게 관직을 내렸던 것 역시 짐의 혜안이로다.
황제는 당시 자신이 직접 인재를 발탁한 게 아니라 그저 관직을 내렸을 뿐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한 듯했다.
불을 냈다고 관직을 박탈한 것은 그저 밑에 있는 관료들이 눈이 어두워 인재를 알아보지 못한 탓이야. 그렇다면 이무는 짐이 먼저 발탁한 후, 정 낭자가 제자로 들인 게 될 테지.
황제는 우쭐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정 낭자, 염려 마라. 말하는 이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지. 행하는 이에겐 아무런 의도가 없었어도, 구경하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는 법이고. 또다시 그대를 질책하려는 자가 있거든, 무슨 마음으로 그러는 건지 잘 생각해야 할 게다.”
황제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내시가 종종걸음을 걸으며 기쁜 얼굴로 들어왔다.
“폐하.”
내시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경하?
황제가 멈칫했다. 또 무슨 기쁜 일이?
내시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방금 안비(安妃) 마마께서 몸이 안 좋아 태의를 불렀는데, 용종을 가지셨다 하옵니다.”
황제가 깜짝 놀랐다.
그, 그 말이 참이더냐?
“정, 정 낭자, 마침 잘됐구나. 같이 가 보자.”
황제의 말에 정교랑은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폐하, 소녀는 갈 수 없습니다. 소녀는 죽을병에 걸린 사람만 고칠 수 있습니다.”
황제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이무와 정교랑을 물린 뒤 서둘러 상황을 알아보러 갔다.
“태맥이 확실하옵니다.”
태의가 다시 한번 확신에 찬 투로 말했다. 황제는 태의가 물러간 후에도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폐하.”
안비가 침상에서 간드러진 목소리로 황제를 부르며 황제의 옷소매를 잡아당기고는, 황제에게 기대며 부끄러운 듯 말했다.
“10월 24일 그때였네요.”
10월 24일이라.
황제는 멍하니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기억이 나는구나. 그날 안비의 처소에 머물렀어. 그날 무슨 일이 있었지?
진안 군왕이 입궁했던 날이로구나. 간식까지 싸 들고 와서 정 낭자를 편드는 말을 늘어놓았지.
– 이건 정 낭자에게 대접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냐?
– 아닙니다. 정 낭자를 위해 만들었던 건 벌써 다 먹었고, 이건 폐하와 마마들께 드리기 위해 새로 만든 겁니다. 거기에 정 낭자가 알려 준 조미료를 더 넣었으니, 폐하께서 한번 맛을 보십시오.
간식!
“그날 짐이 가져온 간식을 그대도 먹었소?”
황제가 돌연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래, 그때 다 먹을 수 없어서 안비에게 오는 길에 가져다주었지.
안비가 멈칫했다. 오래전 일이다 보니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나진 않았지만, 황제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는 잘 아는 안비였다. 안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먹었죠. 폐하께서 특별히 가져다주신 거잖아요. 아까워서 다른 사람은 맛도 못 보게 했어요.”
진안 군왕, 송자동자, 칠현금 연주와 액막이, 정 낭자가 알려 준 대로 만든 음식, 기도, 도교 이 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