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07
교랑의경 507화
이대작이 뒤돌아 걸어갔다. 하지만 이대작은 문가에 다다르자 결국 못 참고 걸음을 멈추었다.
“한 은공, 그러니까 제 말씀은, 우리 아씨는 좋은 분이란 겁니다.”
한원조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숙수가 여기 올 때, 그 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 이가 있진 않았습니까?”
이대작이 들켰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반근 낭자가 그러더군요. 긴말 섞지 말고, 용건만 말하라고요.”
이대작은 손을 모은 채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우리 아씨는 좋은 분이세요.”
한원조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좋은 사람이지요.”
한원조를 힐끔 보고 뒤돌아 나가려던 이대작이 또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아, 깜빡했습니다.”
이대작이 종종걸음으로 돌아와 손을 내밀었다.
“은공, 반근 낭자가 자신과 은공의 은혜도 이제 끝났다고 했습니다. 자신 역시 뜻이 다른 사람과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다며, 전에 드렸던 논어를 돌려달랍니다.”
한원조는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여인들이란······.
“이제 당분간 요사스러운 말로 백성을 현혹한다는 둥 하며 낭자를 비난할 사람은 없겠네요.”
겨울날의 오후. 진십삼은 정교랑의 대청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웃으며 말했다.
“난 애초에 그런 적도 없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십삼은 말없이 웃으며 찻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만약, 이무가 돌포탄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면요?”
진십삼이 물었다.
이번에 풍림에게 가한 반격에는 아무래도 이무가 만든 돌포탄의 공이 컸다. 정교랑의 불꽃놀이를 보고 만든 것이라고 한 덕이었다.
아무 상관 없는 듯 보이지만 상관이 있었다. 말하는 이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고, 행하는 이에겐 아무런 의도가 없었어도, 구경하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진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그래서 풍림이 우연 치고는 심하다고 딱 잘라 말했구나. 참으로 우연이라 하기엔 지나쳐.
만에 하나 돌포탄이 제때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또 만에 하나 이무가 불꽃놀이를 보고 가르침을 얻은 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둘 중 하나만 어긋났어도 큰일이 났을 터였다.
정교랑이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이 세상에 만약이란 없어요. 그러니 생각할 필요도 없죠.”
이 세상에 만약이란 없다. 만약 내가 다리를 고쳐 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내가 혼담을 꺼냈을 때 동의했을까?
진십삼이 눈앞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만약 당신이 내 원칙을 알았다면, 그래도 나더러 다리를 고쳐 달라고 했겠어요?
그러니까 괜히 이것저것 생각하며 근심할 것 없다고요. 세상에 만약이란 없어요. 그러면 그런 거죠.”
만약이란 없으니 가능성이 전혀 없단 말이로구나.
진십삼이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차를 따르며 탄식을 감췄다.
이 여인은 참······.
11월 말의 서북 용곡성은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굵은 눈발까지 휘날렸다. 관청에 화로를 들였는데도 딱히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주육낭은 벌써 탁자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먹물이 말라 가는데도, 붓을 손에 쥔 채로 머뭇거리기만 했다.
“대인, 서 대인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린 병졸의 목소리에 주육낭은 화들짝 놀라 붓을 떨어뜨렸다. 주육낭이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서찰을 황급히 접었다. 숨기긴 해야겠는데 어디다 숨겨야 할지도 모르겠고, 바닥에 떨어진 붓도 빨리 줍고 싶은 마음에 정신없이 허둥댔다.
서사근은 벌써 성큼성큼 들어와 있었다.
“주 대인, 말을 열 필 내어 달라고 하셨습니까?”
서사근이 예를 표하고 물었다. 주육낭은 손을 들어 코를 만지며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 위에서도 빠르게 질주할 수 있는 편자를 단 군마였으면 하오만.”
“열 필은 너무 많습니다. 여덟 필까지는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서사근의 말에 주육낭이 음 하고 대꾸했다.
실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서사근이 공수의 예를 표하며 인사하자 주육낭이 또 음 하고 대꾸했다. 뒤돌아 밖으로 나가는 서사근을 보며 주육낭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꽉 쥐었다. 서사근이 문을 나가고 휘장이 내려지면서 시야를 가릴 때까지.
주육낭이 손을 들어 탁자를 쾅 내리치고 이를 갈며 혼잣말을 했다.
“그거 한번 물어보면 죽냐!”
주육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휘장이 들어 올려졌다.
“참, 대인.”
서사근이 다시 들어오자 주육낭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쳐다보았다.
“이제 곧 섣달입니다. 누이 쪽에 새해 선물을 보낼까 하는데, 누이한테 보내실 건 없습니까?”
서사근이 물었다.
있고말고!
“누이의 물건은 내 이미 보냈소만.”
주육낭이 무뚝뚝한 말투로 대꾸했다. 서사근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공수의 예를 표한 후 뒤돌아 나갔다.
“같이 좀 보내 달라고 하면 죽냐!”
주육낭은 이를 갈며 나지막이 읊조리고는 고개를 돌려 탁자 밑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낡고 오래된 함이 하나 있었다.
주육낭은 함을 집으며 깔개 위에 벌러덩 눕고는 함 속에서 작은 구리거울을 하나 꺼냈다.
“이건 오랑캐의 왕궁에서 쓰는 진품이라고.”
주육낭이 혼잣말을 하며 손에 든 구리거울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주육낭의 움직임에 따라 햇빛이 반사되어 얼굴에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구리거울의 뒤에는 평범한 구리거울과는 다른 꽃문양이 있어 고풍스러우면서도 품위가 있고 세련된 구석이 있었다.
“예쁘긴 한데 티가 안 나네. 아무튼 꽤 돈 나가는 거야. 돈? 하긴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닐 텐데.”
주육낭이 입을 삐죽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하긴, 그 무엇도 네 눈엔 아무것도 아니겠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주육낭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놓인 서찰을 들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십삼 말로는 정씨 가문에서 상경하기 시작한 게 벌써 한 달 전 일이라고 했어. 지금쯤이면 다들 당도했겠지? 성가시게 굴진 않으려나?”
혼잣말을 하던 주육낭은 이를 갈며 붓을 들어 먹물을 묻히다가 먹물이 굳은 걸 그제야 발견하고는 씩씩거리며 다시 먹을 갈았다.
주육낭은 먹을 갈고 나서 칼을 들 듯 붓을 들었다가 이를 갈며 도로 내려놓았다.
밖에 있던 위병이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걸 눈치채고 휘장을 들어 올리며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 바닥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주육낭이 보였다. 주육낭은 맥이 탁 풀린 듯 축 늘어진 채 앞에 놓인 구겨진 종이를 들어 근처에 있는 화로 속으로 하나씩 집어 던지고 있었다.
“대인, 웬 장난을 치십니까?”
위병이 놀라 물었다. 주육낭은 위병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남은 종이 뭉치를 화로 속으로 던졌다. 위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가끔 한 번씩 저런 이상한 짓을 한다니까.
“대인, 집으로 서찰과 새해 선물을 보낸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역참의 병졸들이 곧 경성으로 출발할 텐데, 제가 가져다줄까요?”
위병이 뭔가 생각난 게 있는 듯 물었다.
“보냈잖아. 뭘 더 보내?”
주육낭이 심드렁한 투로 친병의 말을 반박했다.
“빠뜨린 게 있다고 하시더니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쩝니까.”
친병이 투덜거렸다.
“대인, 대인, 종 장군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밖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주육낭은 벌떡 일어나 마지막 남은 종이 뭉치를 화로 속으로 던져 넣은 후, 옆에 걸어 둔 두봉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편 같은 시각 경성의 따뜻한 대청에 앉아 있던 진십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아버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진십삼이 물었다.
“정 낭자가 만든 간식을 먹고 용종을 가졌다고요?”
진시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궁에 그런 소문이 돌더구나.”
진십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또 진안 군왕이 말한 거예요?”
“군왕이 정 낭자에 대해 수시로 떠들고 있어.”
“좋은 뜻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고요!”
진십삼은 소리치며 벌떡 일어서려고 했다.
“십삼, 그건 네가 틀렸다.”
진시강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으며 진십삼을 제지하고, 의미심장한 투로 말했다.
“좋은 뜻으로 그런다는 건 폐하도 알고 계셔.”
“그래 봤자 군왕 자신을 위해서겠죠!”
진십삼이 부친에게 건성으로 예를 표한 후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던 진십삼은 막 안으로 들어오던 진 부인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오자마자 또 어딜 가려고?”
진 부인이 아들의 팔을 잡아끌며 물었다.
“정 낭자한테 그렇게 가고도 부족해?”
진십삼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장난치지 마세요. 중요한 일입니다.”
“누가 장난을 쳐. 정 낭자의 일인데 장난이라니.”
진 부인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진십삼은 헤헤 웃으며 모친을 향해 예를 올리고, 뒤돌아 자리를 떴다.
“또 무슨 일인데요?”
진 부인이 대청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정 낭자의 신기한 비술이 또 하나 늘었소.”
진 시강이 서책을 들며 대답했다. 진 부인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황궁에 계신 분이 회임했다더니, 그게 설마 정 낭자의 공이에요?”
진 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진짜 보통 재주가 아니네. 자식을 낳게 해 주는 낭자라니. 혼담을 넣으려 드는 이가 또 얼마나 늘어날지 모르겠네.”
진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누가 감히 혼담을 넣어?”
진 시강이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태후 입에서 나온 평가와 귀판관을 쓰러뜨린 일이며 신비궁과 돌포탄까지. 모두가 원하는 여인이지만, 누가 감히 데려갈 수 있겠는가.
“우리 가문이요.”
진 부인의 대답에도 진 시강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음, 하지만 상대가 우리 가문과는 혼인하지 않는다잖소.”
그 말에 진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시집을 안 올까요? 우리 십삼이 그렇게 잘해 주는데, 정말 조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그렇겠지. 원칙이 있잖소. 이미 공언한 것이니 지키는 수밖에. 군자는 언행이 일치해야 하오.”
진 시강은 부인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책 속에 담긴 내용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진 부인이 서책을 홱 낚아챘다. 진 시강이 고개를 들자 눈썹을 치켜세우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 방법을 강구해야죠! 정 낭자가 시집 안 가면, 십삼도 장가 못 든다고요!”
“진 공자님, 또 오셨어요? 세밑까진 안 오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커다란 두봉을 걸친 채 막 대문을 나서던 시녀가 웃으며 물었다.
“난 너희 낭자가 아니잖느냐. 한번 내뱉은 말이라고 무조건 지킬 필요는 없지. 난 언제든 주워 담을 수 있어.”
진십삼의 말에 시녀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저쪽에 있는 반근은 벌써 문을 활짝 열며 예를 표하고 있었다.
“그때 경왕부에 가서 간식 만들어 줬어요?”
진십삼이 물었다. 차를 우리던 반근은 그 말에 진십삼을 힐끔 쳐다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일어나 옆에 있던 간식을 밀어 주었다. 진십삼이 반근을 흘끔 보고 웃었다.
내가 그렇게 속 좁고 먹을 것만 밝히는 사람이더냐?
“아니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십삼은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요. 또 그자일 줄 알았습니다.”
진십삼이 정교랑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자가 폐하께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정교랑이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폐하께 간식을 올리면서, 낭자가 만든 거라고 했답니다.”
진십삼의 말에 정교랑이 아, 하고 대꾸했다.
“황궁 비빈이 임신을 하자, 다들 낭자의 간식을 먹은 덕분이라고 한대요.”
진십삼이 말했다. 그러자 정교랑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간식 점포라도 하나 더 열까요?”
정교랑이 말했다.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늘 웃고 있던 진십삼의 얼굴에 웃음기가 보이지 않았다.
“농담하는 거 아니면 뭔데요?”
늘 웃지 않던 정교랑이 얼굴에 미소를 띠고 물으며, 간식 하나를 집어 소매로 입을 가리며 몸을 돌리고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