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15
교랑의경 515화
경성 쪽에서 말 몇 필과 마차 한 대가 달려오더니 문 앞에 섰다.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여인 하나가 내렸다. 겨울에 마차에서 막 내린 탓에 모자를 쓰지 않아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햇빛이 좋은 날이었지만 세찬 겨울바람에 볼이 시렸다.
“교교.”
주 노야가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넌 여기서 기다리거라. 이 엄동설한에 십 리 밖까지 마중 나갈 필요 없다. 그자들은 느릿느릿 여기서 쉬고 저기서 쉬며 편히 오고 있지 않느냐. 새해를 경성에서 맞이하려고 이제야 길을 서두르는 게지.”
주 노야는 눈앞에 있는 식당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 안에 있던 풍림, 노정과 눈이 마주치자 주 노야 역시 안색이 싹 바뀌었다.
“그만 가자. 이 식당엔 재수 없는 놈이 먼저 와 있구나. 들어가선 안 되겠다.”
주 노야가 목청을 높이며 말을 이었다.
“서둘러라. 야외에 자리를 깔고 앉는 게 낫지, 여기 있다간 재수 옴 붙겠다!”
풍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지.”
노정은 손을 뻗으며 풍림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풍림은 어느새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 있었다.
주 노야의 호들갑에도 정교랑은 마차에 오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정 낭자, 외람되지만 이번 일식과 월식의 기현상을 어찌 보십니까?”
풍림이 하늘을 가리키며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인배 때문에 하늘이 노해 기현상이 일어났겠지요.
이는 대놓고 욕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뒤따라 나오던 노정이 그 말에 탄식하며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주 노야는 퉤 하고 침을 뱉었고, 반근 역시 분노로 안색이 싹 바뀌었다.
저번에 대문 앞에 한참을 서 있길래 내심 죄책감을 느끼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아씨를 그리 생각하고 있었네.
“본인의 결점을 잘 아네요.”
정교랑의 말에 이번에는 풍림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반면 주 노야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풍림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관지.”
노정이 얼른 풍림을 막으며 정교랑에게 예를 표했다.
“노정이 정 낭자를 뵙습니다.”
정교랑은 조용히 답례한 후 뒤돌아 마차에 올랐다. 주 노야는 얼른 정교랑을 뒤따르면서도 풍림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입을 삐죽이는 걸 잊지 않았다.
“관지, 해도 너무하는군.”
노정이 그래도 따라가려는 풍림을 막으며 말했다. 풍림은 벌써 마차 안에 앉은 여인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원. 떠나는 마당에도 재수 없게 구네. 저런 놈과 마주쳐 말까지 섞었으니 보통 재수 없는 게 아니야.
어서 가자. 마차를 제대로 몰아라. 아씨 놀라시게 하지 말고.”
주 노야가 허리에 손을 얹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정신없이 허둥대는 모습이었다.
저 여인의 외숙인가 본데, 하는 짓을 보면 꼭 시종 같군.
“사람이 사람답지 않으니 인륜과 천륜이 무너져 천도가 무질서해졌구나. 저 여인이 떠나지 않으면 필시 조정에 화가 미치리라.”
풍림이 느릿느릿 말했다. 새파랗게 질린 노정은 반사적으로 풍림을 잡아끌려 했지만, 풍림이 재빨리 피했다.
“풍림.”
노정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풍림은 노정의 생각처럼 주씨 가문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지 않고, 뒤돌아 자신의 말 쪽으로 걸어가 말에 올라탔다.
“관지.”
노정이 복잡한 심경으로 다가섰다.
“노 형.”
풍림이 말에서 공수하며 말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고, 초심을 잊지 마시게. 그럼 이 풍림은 이만.”
노정도 공수를 하고, 풍림이 말 머리를 돌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쪽에 있는 정교랑 일행도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풍림이 그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뜻이 다른 자와는 일을 함께 도모할 수 없는 법.
풍림은 그쪽을 향해 조용히 공수한 후 손에 든 채찍을 휘둘러 말을 타고 정교랑 일행의 옆을 바람처럼 지나갔다.
주 노야는 풍림의 뒤에 대고 다시 한번 침을 탁 뱉었다.
“배은망덕하고 속은 시커먼 놈 같으니라고. 군주까지 기만한 놈이니 폐하께서 목을 베어 하늘에 사죄하셨어야 했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장담컨대 마차에 탄 정교랑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주 노야가 멀어져 가는 풍림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는 마차가 다가왔다.
“노야, 정 이노야가 왔습니다.”
그 마차의 일행 속에서 눈에 익은 얼굴을 발견한 사환이 얼른 큰 소리로 외쳤다. 주 노야는 또다시 침을 퉤 뱉었다.
“시간대 한번 기가 막히는구먼. 시끌시끌하고 재수 없는 일이 다 마무리되니까 이제야 편히 즐기러 오나 보네. 참 하늘도 무심하시지.”
주 노야가 욕을 해댔다.
정 이노야가 저지른 잘못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미 풍림이 쫓겨났고 돌포탄으로 큰 공까지 세운 후였다. 말하는 이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는 법이라는데, 누가 감히 그 여인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을까.
따라서 정 이노야는 상경한 후 대리시에 들러 일을 마무리하기만 하면 되는 터였다.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하거나 아예 역참에 있던 다른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면 그만이었다. 한 귀로 듣고 흘릴 훈계나 몇 마디 듣고 나면 예정대로 승진도 하고 돈도 벌 수 있었다.
그게 다 훌륭한 딸을 둔 덕분이지!
주 노야는 또다시 욕지거리가 올라오는지 이쪽으로 다가오는 마차를 씩씩거리며 쳐다보았다.
“칠랑, 저기 좀 보렴. 저기가 바로 경성이야.”
정 이부인이 휘장을 들어 올리고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감격스럽고 흥분한 표정이었다.
정칠랑이 차창에 엎드려 밖을 쳐다보았다. 겨울의 희뿌연 시야 사이로 거대한 성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차가운 바람이 훅 불어와 흥분을 가라앉혔다.
“어머니, 추워 죽겠어요. 찬 바람에 얼굴까지 상할 거 같아요.”
정칠랑이 볼을 부여잡으며 외쳤다. 정 이부인은 그런 정칠랑을 품에 안았다. 옆에 있던 어린아이도 어머니의 품을 파고들었다.
“겁낼 게 뭐 있어. 우린 이제 경성에 입성하잖니. 칠랑, 경성에 있는 연지분이며 고약은 이 세상에 최고로 좋은 거야. 네가 원하는 건 다 있어. 어미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꾸며 줄게.”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는 말에 정칠랑은 신이 나서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세 사람이 차창 밖을 쳐다보는데,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무리가 보였다.
“봐, 네 언니가 마중 나왔잖니.”
정 이부인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언니······.
정칠랑은 입술을 삐죽이며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마차에 탄 여인은 내리지 않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에 탄 채 공수의 예를 표했다.
“걸음이 참 느리기도 하시오. 난 또 늦게 와서 조왕신께 제사도 못 지내려나 했네.”
정 이노야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애들이 어린데 겨울에 먼 길을 오려니 여간 고생이 아니구려. 누구처럼 경성에서 마음 편히 지내는 게 아니라.”
마음 편히 지내?
주 노야는 울컥해서 욕을 한바탕 퍼붓고 싶은 걸 꾹꾹 눌러 참았다.
누구 때문에 경성에서 목이 달아날 뻔했는데! 네놈이 불러온 화 때문 아니더냐!
담비 모피를 걸치고 전혀 고생하지 않은 얼굴로 혈색 좋게 나타난 꼴을 보아하니 정 이노야는 경성까지 오는 내내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은 모양이었다. 주 노야는 절로 이가 갈렸다.
그래, 네놈도 한번 우리처럼 마음 편히 지내 보거라!
돌연 손을 쳐든 주 노야는 짐짓 단정한 모양새로 여유롭게 앞쪽을 내다보는 정 이노야에게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모처럼 가족이 상봉했으니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할 재회 현장에 처참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 이노야는 무장 출신의 주 노야에게 따귀를 맞고 그대로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말이 놀라 히이잉 소리를 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정 이부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난 조정을 망쳐 놓고 군주의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놈을 때린 것이다!”
주 노야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 우뚝 선 채 말을 이었다.
“이놈을 체포해라! 어사대로 압송하겠다!”
정칠랑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부친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귓가에는 모친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다시 고개를 들어 앞쪽을 쳐다보자 경성은 여전히 어렴풋하고 희미하게 보였다.
정칠랑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맞은편에 있는 마차였다. 마차 안에선 시종일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내리는 사람도 없었다. 아래로 드리워진 마차의 휘장이 정칠랑의 눈에는 시커먼 동굴처럼 보였다. 사람을 잡아먹는 야수가 금방이라도 그 안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경성은, 정말 무서운 곳이야.
정칠랑은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 앉은 정칠랑은 어느새 날이 밝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곳은 마차 안도, 역참이나 술집도 아니었다. 이름도 못 외울 관원들의 사택은 더더욱 아니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장식들로 배치된 방은 봄처럼 따스했다.
그곳은 정칠랑이 어제부로 들어와 살게 된 경성의 저택이었다. 바보 언니가 마련해 준 집.
저택은 으리으리하고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그냥 쓱 훑어보기만 해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죄다 정교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어제 갑작스레 일어난 일들 때문에 다들 집이나 감상하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심지어 정칠랑은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정칠랑이 일어나 앉는 소리를 들었는지 휘장 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칠랑 아씨.”
여종들이 급히 들어와 정칠랑을 다독여 주었지만, 정칠랑은 그들을 밀어내고 창가 쪽으로 가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훅 들어오자 정칠랑은 몸을 움찔거리며 마당을 쳐다보았다. 정원은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자신에게 익숙한 남방과는 다른 호방함이 엿보였다.
이곳이 경성이구나. 그 바보 언니가 있는 경성.
“칠랑 아씨, 일어나자마자 찬 바람을 쐬면 못써요.”
여종들은 얼른 정칠랑을 잡아끌며 창문을 도로 닫으려 했다. 그때 정칠랑이 돌연 손을 뻗어 막으며 소리쳤다.
“넷째 오라버니.”
정칠랑은 얼른 옷을 갈아입고 쪼르르 뛰어나갔다. 대청에서 기다리던 정사낭이 웃으며 인사했다.
“서원에 가 있느라 오늘에서야 왔네. 누이, 여기는 지낼 만해? 난······.”
정사낭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정칠랑이 으앙 울음을 터트렸다.
“넷째 오라버니, 아버지가 잡혀갔어요!”
정사낭이 멋쩍어하며 정칠랑을 위로했다.
“아냐, 잡혀가신 거 아니야. 이건, 그러니까, 가시나무를 지고 스스로 죄를 청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정 이노야가 상경하자 그 딸과 딸의 외숙인 주 노야가 직접 마중을 나갔다. 성문 밖으로 나간 주 노야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정 이노야를 꾸짖고, 친히 어사대로 압송해 갔다.
어사대로 가는 길에 주 노야는 남들 눈을 피하지 않고 보란 듯이 거리를 가로질러 갔다. 따라서 소문은 벌써 경성에 쫙 퍼진 터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의도는 정 이노야를 위함이었다. 어쨌든 풍림이 정 이노야를 탄핵하고 나서지 않았던가. 풍림은 떠났다지만 그 일까지 함께 해결된 건 아니었으므로 언제 누가 또 그 일을 꺼내 공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 깔끔하게 매듭을 짓는 편이 나았다.
죄를 자청하는 것은 더없이 좋은 태도였다. 주 노야의 표현 방식에 다소 과장된 면은 있었지만 말이다.
물론 정칠랑은 그런 이치를 몰랐고,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 뿐이었다.
“그 계집이 일부러 아버지를 해친 거예요. 아버지를 죽이려 드는 거라고요.”
정사낭의 귀에는 그 말이 거슬렸다.
“칠랑,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숙부님이 그런 일을 벌여 하마터면 네 언니가 죽을 뻔한 건 알아? 죽자고 달려드는 사람까지 있었어. 그건 엄연히 숙부님 잘못이야. 남에게 꼬투리 잡힐 일을 하신 거잖아. 그리고 어사대에서 나온 사람한테 잡혀가는 것보다는 주 노야의 손에 이끌려 어사대로 가는 게 나아.
그리고 네 언니도 어사대에 있었어. 게다가 네 언니는 잡혀갔던 거야.
너도 시시비비는 가릴 줄 알아야지. 어떻게 네 언니를 욕해?”
정사낭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정칠랑은 놀란 눈치였다. 대청 안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오라버니는 날 안 좋아하는구나. 그 계집만 좋아하는 거죠?”
정칠랑은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정사낭은 어이없어하면서도 다시 정칠랑을 달래 주려 했다. 그때 몸종 하나가 기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노야께서 돌아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