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23
교랑의경 523화
해가 어슴푸레 밝아올 무렵, 정 이노야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화장대 앞에 앉아 장신구를 들여다보던 정 이부인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노야, 벌써 일어나셨어요?”
정 이노야가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당신도 일찍 일어났으면서.”
정 이부인이 웃으며 다가와 앉았다.
“노야, 오늘도 연회가 있거든요. 어떤 금비녀가 나한테 어울릴지 골라 봐요.”
정 이부인은 손에 든 비녀 다섯 개를 정 이노야 앞으로 내밀며 흔들었다. 각기 크기는 달라도 전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비녀였다.
정 이노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 눈엔 다 예뻐 보여서요. 근데 이렇게 함부로 쓰면 안 될 것 같아요. 몇 개는 남겨 뒀다가 칠랑 시집갈 때 혼수로 줘야죠.”
시녀가 아무렇게나 던져 준 후진 비녀 몇 개를 내 딸의 혼수로 남겨 주겠다고?
“그따위 물건이 마음에 든단 말이오?”
정 이노야는 벌컥 화를 내며 손을 들어 비녀를 내던졌다.
“취향 한번 천박하군!”
정 이부인이 얼른 주우며 못마땅한 투로 따졌다.
“왜 화를 내고 그래요? 내가 본 적이 없어서 그러네요. 나한테 이런 거 사 준 사람도 없고. 난 가난한 서생 집안 출신이라 돈만 보면 눈이 벌게지거든요.”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는, 이런 거 사 준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 정 이노야의 귀에 박혔다. 어쩐지 귀에 거슬리는 말이었다.
그동안 집에서 쓴 물건이 그리 형편없었단 말인가? 일개 시녀가 준 것에도 못 미칠 정도로?
무엇보다도 정 이부인의 ‘가난한 서생’이란 말이 정 이노야의 심기를 확 뒤틀어 놓았다.
“죽으려고 환장한 여편네 같으니라고!”
정 이노야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순간 울컥한 정 이부인도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왜 정초부터 저주를 하고 난리예요? 하나 죽은 것도 모자라 이젠 후처까지 죽었으면 좋겠어요?”
정 이노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차마 때릴 수는 없고 욕을 하자니 벌써부터 밖에서 수군대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 욕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체통을 지키시오!”
정 이노야는 하는 수 없이 옷소매를 뿌리치며 밖으로 나갔다.
쾅 닫히는 문소리를 들으며 정 이부인은 입을 삐죽였다. 그러고는 손에 든 금비녀를 다시 집어 들어 밝아오는 새벽빛에 비추어 보았다.
“내가 어디 여기서 만족할 줄 알아? 물론 이런 사소한 것도 기꺼이 챙겨야겠지만.”
정월의 관청은 여느 때보다 훨씬 한산한 분위기였다.
“오늘은 일찍 마치고 동문으로 양고기탕 먹으러 가세. 오후엔 금전 골목으로 놀러 가고.”
말단 관리 하나가 옆에 있던 관리에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관리는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찍 가긴 그른 것 같네. 저녁은 돼야 할 걸세.”
“무슨 일로?”
먼저 얘기를 꺼낸 관리가 이해 안 간다는 투로 묻자, 그 관리가 턱짓으로 관청 쪽을 가리켰다.
“근면 성실한 대인께서 아직 바쁘시잖나.”
근명 성실한 대인?
말단 관리가 멈칫하며 관청 쪽을 쳐다보았다. 열린 문틈 사이로 굳은 표정을 한 채 밖을 쳐다보는 관원의 모습이 보였다.
“이보게, 경조부에 가서 이 문서들을 찾아오게.”
관원이 큰 소리로 명하자, 말단 관리는 옆에 있던 말단 관리를 향해 거 보라는 듯 혀를 날름거리고 얼른 대답하며 다가갔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 목록을 받은 다음 부랴부랴 걸음을 옮겼다.
두꺼운 서책들이 탁자 위에 놓였다. 그러잖아도 무질서하던 탁자가 더욱 어수선해 보였다.
“대인, 말씀하신 서책들을 경조부에서 빌려왔습니다.”
말단 관리의 말에 정 이노야는 음, 하고 대꾸한 후 서책을 받아 펼쳐 보았다.
“대인, 앞으로도 날은 많으니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말단 관리가 아첨하는 투로 말했다.
다들 이 정동이라는 자는 저 멀리 별 볼 일 없는 고을을 전전하다가 황제의 상을 받아 대리시로 부임했다고 했다. 이 경성의 관청이 어디 그리 만만한 곳이던가.
새로 부임한 관리는 의욕에 차 이것저것 시도하면서 수하에 있는 경험 많은 이들에게도 본때를 보여 주려고 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공무와 여러 해 동안 해결되지 않은 안건들을 전부 처리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대로 못 하면 웃음거리가 되고 우쭐했던 기세도 한풀 꺾일 수밖에.
정동 역시 그와 같은 상황을 대비하는 듯했지만, 그건 공연한 걱정이었다. 귀한 분께서 난처하게 하지 말라며 친히 귀띔해 주시기도 했거니와 그 귀한 분이 아니었더라도 정씨 성에 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사내, 정 낭자를 딸로 둔 이 사내를 만만히 볼 사람은 없었다.
높으신 대인들조차도 깍듯하게 대하는 분을 난처하게 하기는!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이 아닌 이상!
그런 이는 풍림 하나로 족하지!
말단 관리가 어지러운 생각들을 떨치려 하는데 저쪽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동이 탁자를 내리친 것이었다.
“찾았다!”
정동이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고개를 든 정동은 어리둥절해하는 말단 관리를 보고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그만 나가 보게.”
말단 관리를 내쫓고 난 정 이노야는 심호흡을 하고, 더 빨리 서책을 넘겨 보았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서책들은 하나둘 밀려나 끝내 네다섯 권만이 남았다.
실내가 어두컴컴한지라 시야도 다소 흐릿해졌지만, 문서 위에 쓰인 ‘정씨 교랑’이라는 네 글자는 정 이노야의 눈에 또렷이 들어왔다.
“역시······. 본인의 이름을 남겨 놓았군. 주씨 가문이 아니라.”
정 이노야는 탁자를 다시 한번 무겁게 내리쳤다.
“실로 아둔한 바보로구나!”
정 이노야가 소리쳤다.
“조부모와 부모가 생존해 있는데 호적을 따로 만들어 재산을 나누는 불효를 저지를 경우, 도형(徒刑 – 강제노동형) 3년에 처한다(祖父母, 父母在, 別籍異財, 不孝, 徒三年 – ).
이럴 수가! 툭하면 남한테 질책을 당하고 공격을 받더니만, 저 스스로 꼬투리 잡힐 일을 남겨 놓았군!”
엄한 말투였지만 정 이노야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아슬아슬했는데 실로 다행이야. 내가 제때 돌아온 데다 적절한 때에 귀띔해 주는 이까지 있었어. 까딱 잘못했다간 누가 또 이를 빌미로 일을 만들었을지 모르겠군.”
정 이부인이 대문 안으로 들어오자 여종들과 몸종들이 얼른 나가 맞이했다.
“교교, 어서 가서 쉬어야······.”
정 이부인이 무언가 생각난 듯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뒤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벌써 갔어요. 어머니가 걱정 안 해도 된다고요!”
정칠랑이 손을 홱 뿌리치며 앞장서 들어갔다. 하지만 정사랑과 정오랑, 그리고 나머지 두 첩실은 정 이부인이 먼저 들어가도록 공손히 기다린 후에야 따라 들어왔다.
“부인, 술을 드셨나 봐요.”
첩실 하나가 차를 따르며 말했다.
“응. 살갑게 구는데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정 이부인이 차를 받으며 웃었다.
“누구 때문에 그리 살갑게 구는지도 모르시면서!”
정칠랑이 말했다.
“누굴 위해 살갑게 굴든 무슨 상관이야. 나한테 잘하고, 우리 정씨 가문에 잘하면 됐지.”
정칠랑은 입술을 삐죽인 후 입을 다물었다.
“누구 때문에 그리 살갑게 굴든 시시콜콜 따질 게 뭐 있니. 아무튼 난······.”
정 이부인은 자리에 앉아 팔걸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정 이부인이 자신을 치며 말했다.
“이제 경성에서 자리를 잡게 됐어. 그리고 너희들도······.”
정 이부인은 정사랑과 정오랑, 정칠랑을 손으로 가리켰다.
“너희 자매들도 좋은 짝을 맞이할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정사랑과 정오랑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고, 두 첩실은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부인, 누가 혼담을 넣었어요?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빠르긴? 안 빨라. 행여 놓칠까 안달이지. 요 며칠 사이에 벌써 세 가문에서 의사를 전했어. 사랑과 오랑은 물론이고 벌써 칠랑 얘기까지 꺼내더라니까. 노야께서 잘 알아보신 다음에 얘기해야지.”
딸들을 좋은 가문으로 시집보내는 건, 두 첩실이 평생의 소원을 이루는 일이었다. 두 첩실은 정 이부인의 말에 합장하며 염불을 외웠다.
“다 부인께서 저희를 위해 애써 주신 덕분이죠.”
두 첩실은 빨리 감사 인사를 올리라며 정사랑과 정오랑을 재촉했다. 두 딸이 수줍은 듯 머뭇거리며 모친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난 걔 덕에 시집가는 거 필요 없어요!”
잠자코 있던 정칠랑이 더는 못 참겠는지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두 첩실이 얼른 따라가 정칠랑을 달래려 했다.
“내버려 두게. 아직 어려서 그런지 철이 없어.”
정 이부인은 정사랑과 정오랑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칠랑은 아직 급할 게 없으니 더 기다려도 돼. 한 오 년 기다리면 혼기가 차겠지. 그땐 우리 가문도 그 애한테 기대지 않아도 될 거야.”
두 첩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세요.”
“칠랑은 기다릴 수 있지만, 사랑과 오랑은 지체할 수 없어. 그렇다고 너무 서둘러서도 안 되겠지만 말이야. 우리가 잘 골라 보세.”
정사랑과 정오랑은 부끄러워 더는 못 듣겠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예를 표한 후 물러갔다.
정 이부인의 처소를 나온 두 자매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이 저택에서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낯선 기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새집 같으면서도 고아한 정취가 묻어나도록 세심히 공들여 보수한 저택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해 봤어? 우리가 그 애 덕에 좋은 혼처를 구할 날이 올 거라고?”
정사랑의 물음에 정오랑은 한숨을 쉬고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 일은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이어진다니까.”
정오랑이 걸음을 멈추고 한쪽 옆을 바라보았다. 정사랑도 따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쪽엔 정교랑의 거처가 있었다.
정 이부인의 처소엔 여종이며 몸종이 많이 있었지만 이쪽은 한산해 보였다. 심지어 정사랑, 정오랑 자매 곁에 있는 여종들과 몸종들의 수가 더 많아 보일 정도였다.
물론 몸종들과 여종들이 이곳을 꺼리고 기피하여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아니, 다들 이곳에서 일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큰 아씨께선 얼마나 조용한 분인지 몰라.”
“책을 읽거나 글씨 연습을 하거나 활쏘기 연습만 하셔.”
“우리는 시중을 들고 싶어도 어떻게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니까. 얼간이처럼 마당에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지.”
아랫사람들로서는 정교랑의 거처에 남아 시중을 들고 싶어도 그러기가 어려웠다. 큰일은 측근인 시녀와 반근이 죄다 처리하고, 청소나 심부름 같은 사소한 일은 어린 두 몸종으로 충분했으니까.
“아씨.”
뜨거운 차를 올리던 반근은 집에서 입는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정교랑을 보자 속이 상했다.
“고단하지 않으세요? 매일 출타하시려니.”
“고단하지 않아. 밖에 나가나 집에 있으나 별다를 것도 없어. 생각하기 나름이지. 기쁜 마음으로 하면 고단하지도 않아.”
“아씨께서 가고 싶어 가시는 거예요?”
반근은 더욱 놀란 눈치였다.
“안 갈 이유가 없잖아.”
정교랑이 대꾸했다.
아씨께서는 출타를 싫어하지 않으시는구나. 아니, 아니야. 아씨는 출타를 좋아하지 않으셔. 그렇다면······.
시녀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너도 참. 괜한 생각 마.”
시녀가 손에 든 장부를 펼쳐 보며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반근은 화롯불을 보며 영문을 모르겠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씨는 단순하신 분이야. 저들이 초청하니 아씨께서 응하시는 거지. 아씨는 누굴 위해 억지로 무언가를 하는 분이 아니야. 아씨께서 가신다면, 그건 아씨께서 원해서 가시는 거지.
저들이 초청하고, 아씨께서 가시는 게 전부야. 괜한 생각 마. 왜일까 하는 이유 같은 건 더더욱 생각하지 말고.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건 생각하지 마.”
시녀의 말에 반근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난 그냥, 아씨께서 저 사람들한테 너무 잘해 주시는 것 같아서 그래. 그럴 가치 없는 사람들이잖아.”
시녀가 웃으며 손을 내려놓았다.
“잘해 주신다고? 때로는 좋은 일도 나쁜 일이 되고, 나쁜 일도 좋은 일이 되기 마련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