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27
교랑의경 527화
고능준은 일어나 앉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경성을 비우는 동안 자네들이 할 일은 딱 두 가지뿐일세.”
고능준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자리에 앉은 막료들과 측근들도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귀를 기울였다.
“첫째, 이번 재난 구휼을 기회로 진안 군왕을 경성에서 내보내게. 그리고 둘째, 3월이 되면 태자 책봉을 주청 올려야 하네.”
막료들과 측근들이 공손히 대답했다.
“대인, 정말 23일에 출발하려 하십니까?”
수하 하나가 고개를 들고 아쉬운 듯 말했다.
“입춘이 지나거든 가시지요. 이 엄동설한에 길을 재촉하다간 몸이 고달프실 겁니다.”
그러자 고능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남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면 내가 고달플 수밖에.”
고능준은 돌연 웃음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평왕과 궁에 계신 귀비마마를 잘 살펴야 하네. 마음이 안 놓이기로 따지면 그 둘이 더 걱정이야. 특히 마마 말일세.”
정월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능준은 재해 상황 보고를 지체하여 민란이 일어나게 했다는 죄로 좌천되어 경성을 떠났다. 고능준은 측근 몇 명의 배웅만 받으며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경성을 나갔다. 마차 한 대에 시종 몇 명이 따르는 게 전부였다.
“가엾소?”
황제가 물었다. 눈치 빠른 귀비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가엾긴요. 재해 때문에 떠도는 백성을 생각해 보세요. 가엾은 건 백성이죠. 떠들썩한 배웅을 받으며 떠나진 않은 걸 보면 그나마 양심은 있나 봐요.”
황제는 귀비의 말에 웃음을 짓다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한탄했다.
“민간에서 멀어져 높은 자리에 오래 있어서 그렇지.”
“맞아요. 이번에 밖에 나간 김에 견문 좀 넓히고 오라고 하세요. 민간의 어려움을 알아야 폐하의 고충도 알죠.”
황제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귀비도 참. 가족이 아니라 원수를 대하듯 말하는군. 귀비는 안타깝지도 않소?”
“폐하, 가족이기에 신첩이 더 분통을 터뜨리는 거예요. 고 전시는 신첩의 가족입니다. 신첩은 고 전시가 떳떳하게 잘되길 바라는데, 이런 일을 벌였지 뭐예요.
고 전시 체면뿐 아니라 신첩의 체면과 폐하의 체면까지 깎였어요. 폐하께서 너무 오냐오냐하신 탓이다, 폐하께서 능력에 상관없이 가까운 사람만 쓴다 어쩐다 하며 수군댈 거 아니에요. 애먼 사람한테까지 불똥이 튀게 됐으니 열이 받을 수밖에요.”
황제가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고 전시가 짐의 고충을 알아줘야 할 텐데.”
황제의 웃는 얼굴을 보며 귀비는 내심 마음이 놓였다. 순간 고능준이 떠나기 전 자신을 구명하기 위해 청을 올리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한 일이 떠올랐다.
내가 뭐 바보인 줄 알아? 언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 그동안 헛살았게?
황제가 평왕이 다녀갔는지 물었다.
“아니요. 뭐가 그리 바쁜지 모르겠어요. 사람을 시켜 다녀가라고 해도 매번 바쁘다면서 도리어 신첩을 원망하더라고요. 신첩이 법도를 지키지 않고 걸핏하면 궁으로 부른다나요. 신첩도 열이 받아서 그냥 내버려 두려고요.”
황제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융통성이 없는 녀석이라니까. 어쨌든 법도를 지켜서 나쁠 건 없지.”
그럼 법도를 안 지키는 이들을 주의 깊게 보셔야죠, 폐하.
귀비가 속으로 말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아마 황제도 내심 귀비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폐하께서 잘 가르쳐 주세요.”
“그래야지.”
황제의 기분이 좋은 걸 본 귀비는 옆에 있던 궁녀에게 눈짓을 했다.
“폐하, 마마, 저녁 수라가 준비되었습니다.”
귀비의 눈짓을 본 궁녀가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는데, 문밖에서 궁녀 하나가 급히 들어왔다.
“폐하, 안비마마께서 몸이 안 좋아 태의를 부르셨답니다. 폐하께서도 가 보시지요.”
그 말을 들은 귀비는 안색이 싹 변해 황제를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잘 지내다가 왜 또 몸이 안 좋아?”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서둘러 가마를 대령하라고 분부했다. 내시들과 궁녀들이 황제를 따라 우르르 나갔다. 오늘 밤 황제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아는 귀비는 열이 받아 금잔에 들어있는 차를 바닥으로 휙 뿌렸다.
“수법이 매번 똑같잖아. 말이 씨가 되는 수가 있으니 조심 좀 하지?”
귀비가 투덜거렸다.
“마마, 태의가 안비의 용종은 황자라고 했대요.”
궁녀의 말에 귀비는 콧방귀를 뀌었다.
“황자면 뭐? 본궁도 황자를 가졌었어. 그땐 황후께서 육궁을 통솔하셨지만, 본궁은 안비처럼 안 굴었다고.”
“아휴, 안비를 어찌 마마와 비교하겠어요.”
귀비를 달래던 궁녀가 갑자기 뭔가 은밀한 말을 하려는 듯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망설였다.
“할 말 있으면 할 것이지, 수상쩍게 왜 이래?”
귀비가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자, 궁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마, 누가 그러는데 안비가 황자를 가진 게 범상치 않대요.”
귀비는 실소를 터트렸다.
“황자고 용종이야. 당연히 범상치 않을 수밖에. 여염집 여인도 아니고 황궁에서 그런 수작을 벌이려 하다니, 참······.”
“마마, 안비가 용종을 잉태할 때 태백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답니다.”
태백성을 품었다······.
귀비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에 들고 있던 금잔을 탁자 위에 탁 내려놓았다.
“어허!”
귀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어디 감히 그런 말을!”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안비가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안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황제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폐하, 정말 신첩이 말한 거 아니에요.”
안비가 목멘 목소리로 호소했다.
“신첩은 그런 말 한 적 한 번도 없어요. 신첩의 몸이 허약해 용종을 가지고도 사흘에 한 번씩 몸이 안 좋다 보니, 그런 유언비어가······.”
“몸이 허약하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다니!”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름다운 안비의 얼굴과 어느덧 제법 부풀어 오른 배를 보고는 안비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일어나시오.”
안비는 흐느껴 울며 감사를 표하고 일어났다.
“신첩의 몸이 너무 약하니까 뒤에서 신첩더러 아주 귀하신 몸이라고 비아냥거리나 봐요. 신첩이 가진 아이도 금처럼 귀하다며 태백성에 빗대는 유언비어를 지어냈나 본데, 폐하, 신첩은 감당할 수 없어요.”
감당하지 못할 건 또 뭔가. 짐의 혈통인데 하늘의 별이 내려오지 못할 것도 없지.
황제의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물론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는 말이지만.
“알았소. 남들은 몰라도 안비 처소의 사람은 단속할 수 있잖소. 일단 여기 사람들부터 제대로 단속하면, 밖에 떠도는 유언비어는 자연히 수그러들 거요.”
황제가 안비를 토닥여 주자, 안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신첩한테 화 안 나신 거죠?”
애교가 뚝뚝 묻어나는 안비의 목소리에 황제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일로 뭐 화낼 게 있나.”
황제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안비의 배를 어루만졌다.
“짐의 혈통인데 금처럼 귀하고말고!”
“신첩의 생각도 그래요.”
안비도 황제의 말에 활짝 웃으며 손으로 복부를 쓸었다.
“애가 얼마나 까탈스러운지 몰라요. 신첩을 얼마나 못살게 구는지.”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안비가 저녁 수라를 들라 명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저녁 수라를 들며 황제는 술도 두어 잔 마셨다. 황제가 한창 기분이 좋던 그때, 밖에서 내시 하나가 허둥지둥 뛰어 들어왔다.
“폐하, 폐하, 급보입니다.”
내시가 중서성의 인장이 찍힌 급보를 황제한테 바쳤다.
이 시간에 급보라니?
“어디에서 온 것이냐?”
“무평입니다.”
황제의 물음에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무평!
순간 황제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좋지 않은 일임을 직감한 황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어 급보를 받았다. 급보를 펼친 황제의 안색이 확 변했다. 순간 황제의 몸이 기우뚱하나 싶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폐하!”
대경실색한 안비가 얼른 손을 뻗으며 부축했다. 옆에 있던 궁녀들과 내시들도 우르르 달려왔다.
가까스로 자리에 앉은 황제가 괜찮다는 의사를 표하고자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입을 연 황제는 울컥 피를 토했다.
비명 소리가 황궁의 밤하늘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어가를 달리는 긴박한 마차 소리에 정월 말 겨울밤의 분위기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번엔 누구지?”
궁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마차를 정탐하던 이들이 속삭였다.
“평왕의 마차야.”
“방금 전엔 진 상공의 마차가 지나갔는데.”
그때 저쪽에서 또다시 다급히 달려오는 마차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번 마차는 궁문 앞에서 막히고 말았다.
“군왕, 폐하의 전교 없이는 야밤에 입궁하실 수 없습니다.”
황궁을 지키는 금군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차의 휘장이 들어 올려지자, 주변을 밝히던 등불이 젊은 군왕의 얼굴을 비추었다. 모두의 시선이 군왕에게로 향했다.
“경왕은 되겠지?”
진안 군왕이 뒤에 있는 경왕을 가리키며 물었다. 한참 단잠에 빠져 있던 경왕을 흔들어 깨워 데려왔는지, 경왕은 마차에서 또 잠들어 있었다.
금군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저하는 기색조차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무엄하구나. 경왕이 어찌 입궁할 수 없단 말이냐?”
진안 군왕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전하, 경왕은 입궁하실 수 있지만, 전하는 안 되십니다. 경왕께서 기어이 입궁하셔야겠다면, 전하는 마차에서 내려 기다리십시오.”
금군 대장이 느릿느릿 말했다.
“경왕께서 어찌 혼자 입궁하신단 말이오!”
진안 군왕의 마차 옆에 있던 내시가 따지고 나섰지만, 돌아온 것은 금군의 더 삼엄한 경계일 뿐이었다. 황궁의 경계는 황제에게 일이 생겼을 때 가장 삼엄해지기 마련이니까.
진안 군왕은 육중하게 닫힌 궁문을 바라보았다. 겨울밤 궁문 안은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진안 군왕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휘장을 내렸고, 마차는 천천히 말 머리를 돌려 반대 방향으로 질주했다.
“잠시 좀 걷고 싶구나.”
마차 안에서 갑자기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를 깼다.
“전하, 지금은 아니 되옵니다.”
내시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 창밖을 쳐다보는 진안 군왕을 보며 나지막이 고했다.
“응, 안 되는 거 안다. 그냥 해 본 말이야.”
진안 군왕이 말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갑자기 병이 나시다니!
그때 뒤에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휘장을 쥐고 있던 진안 군왕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무탈하시다 하옵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말소리에 진안 군왕은 천천히 눈을 감고 긴 한숨을 토했다.
“사실, 무탈하실 줄 알았다.”
진안 군왕이 불쑥 입을 열자 내시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궁에서 정 낭자를 안 불렀잖느냐.”
그러니 죽을병은 아니셨던 게지.
“전하, 지금은 농담하실 때가 아니옵니다.”
내시가 입을 삐죽거리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진안 군왕은 잠시 미소를 짓다가 표정을 수습하고 천천히 말했다.
“이번엔, 좀 늦긴 했어도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다음번엔?”
“다음번에도 가능할 겁니다. 우리 사람은 충분합니다.”
내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하지만, 소식을 안다 해도 우리가 들어갈 수 없지 않느냐.”
그랬다. 그건 궁에서 나온 대가였다. 황궁은 낡고 진부하여 숨 막히고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곳이었다. 그 안에 있을 땐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을 치지만, 일단 나오고 나면 그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일보다 어려웠다.
진안 군왕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려 마차 안에 잠든 경왕을 바라보았다.
“전하, 겁먹지 마십시오. 괜찮을 겁니다.”
내시가 또다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겁먹지 말라고······.
진안 군왕이 웃음을 지었다. 실은 너무나도 무서웠으니까.
그랬다. 소식을 들은 그 순간부터 진안 군왕은 무서웠다. 특히 궁문 앞에서 막혔던 그 순간엔 더더욱.
이번엔 괜찮다지만 다음번엔? 그땐 누가 장담하지?
마차는 어둠을 헤치며 흔들흔들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