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3
교랑의경 53화
노태야가 찻잔을 들자 유박과 이노야는 눈치 있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두 사람이 공손히 말하자 노태야는 그러라고 했다.
이노야와 유박이 장씨 고택에서 나왔다.
“형님, 이번엔 정말 큰 신세를 졌습니다.”
유박이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
“옥곤 아우, 당치 않은 말씀일세.”
이노야는 다소 굳은 표정이었지만 억지로 웃어 보였다.
“길을 서둘러야 해서 회포를 풀긴 어렵겠군요. 언제 기회가 되면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 봅시다.”
유박은 손을 뻗어 이노야의 어깨를 탁탁 쳤다. 유박은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혔다. 도중에 장순의 문하로 들어가긴 했지만 글공부를 하면서도 무예를 놓지 않았다. 이노야는 유박의 손힘에 아파 이를 악물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이번 일로 이제 동주 유씨 일족과 연줄이 생기게 됐군. 특히 유박은 떠나기 전 이노야가 어디로 부임하는지 꼬치꼬치 캐물었고 대답을 들으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딱히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헤어질 때도 웃는 낯이었다.
“된 거예요?”
이부인은 남편이 벗은 웃옷을 받으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유옥곤 그자가 거칠기는 해도 세심한 면이 있으니 필시 숙부님께 서찰을 쓸 거요. 스승님의 천거에 유 학사의 조력까지 더해졌는데도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벼슬 관두고 농사나 지어야지.”
이노야가 웃으며 말하자 이부인은 기뻐했다. 성사됐으면 됐다. 장차 남편 덕에 고명 부인(誥命夫人)이 될 꿈을 꾸는 이부인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잘됐네요. 장 노태야께 감사드려야겠어요.”
이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 얘기가 나오자 이노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장 노태야께서 체면을 보아 안으로 들어가게 해 줬으니 고마운 일인가? 하지만…….
“노태야께선 내 체면을 봐주신 게 아니오.”
이노야가 자리에 앉으며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듯 말했다.
“우리 집의 시녀 덕이지.”
당시 문지기는 그 시녀가 ‘노야’라고 부르는 걸 보고 표정이 급변했다. 그러더니 이노야가 인사드리러 왔다고 하자 전처럼 한마디 툭 내던지고 문을 닫는 게 아니라 들어가 여쭙겠다고 했고,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이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이노야는 알고 있었다. 그 시녀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걸.
“시녀요?”
이부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노야가 사건의 경위를 들려주자 이부인은 좋아 어쩔 줄 모르겠는 표정을 지었다.
“그땐 나도 누구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소.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이노야가 말을 이었다.
“집에 있는 아랫것들을 모조리 불러 보시오. 대체 누군지 알아내야지.”
“우리집 시녀가 어떻게 함부로 바깥을 나다니겠어요. 게다가 남의 집까지 드나들다니요.”
이부인이 말했다.
“노야,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
하긴 그렇지.
“그럼 집 안에 있는 시녀가 아닌가?”
이노야가 말했다. 집 안이 아니면 어디지? 이노야 부부는 얼떨떨했다.
“아씨, 아씨 말씀이 맞았어요. 그 어르신은 보통 분이 아니더라고요.”
몸종은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서둘러 이야기했다.
“오늘 거기서 노야를 만났지 뭐예요.”
몸종은 찬바람이 들어오는 걸 감지하고 얼른 가서 문부터 닫았다. 정교랑은 책을 내려놓고 몸종을 보며 대꾸했다.
“그래?”
“노야께서 그 어르신 댁 문 앞에서 아주 공손하시더라고요.”
몸종은 흥분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 어르신이 노야한테 말해서 우릴 도로 데려가라고 하면 노야도 틀림없이 따르실 거예요.”
“도로 데려가?”
정교랑이 몸종을 보며 말했다.
“간신히 빠져나와 이런 자유를 얻었는데, 거기 돌아가서 뭐 해.”
“아씨.”
몸종은 긴장하며 무릎걸음으로 바짝 다가가 정교랑의 무릎을 주물렀다.
“우리가 지금은 여기 산다지만, 아씨는 도교에 귀의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시잖아요.”
정교랑의 입가에 웃음이 드러났다.
“인생살이 자체가 전부 수행이야. 어딘가에 구속되지 않을 거야.”
정교랑이 몸종의 손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넌 마음 편히 먹고, 그런 일 생각하지 마. 우선 그 여도사들한테 가서 네가 과일 말리는 법을 가르쳐 줘. 내일 중추절 달맞이 때 쓸 수 있게.”
몸종은 네 하고 대답했다.
“아씨, 뭐 드시고 싶으세요? 말씀하시면 제가 만들게요. 우리 먹으면서 달맞이해요.”
몸종이 신이 나서 말하자 정교랑도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다.
“여긴 산이 높고 공기가 맑아서, 달맞이하기 좋겠구나. 아마도 집은, 그리 즐겁지 않겠지만.”
정교랑이 문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빽빽한 대나무 숲에서 나는 소리가 더없이 고풍적이었다.
중추절 당일,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정씨 저택 역시 초롱을 달고 오색천으로 집안 곳곳을 장식하며 떠들썩한 분위기로 명절을 맞이했다. 거리에서 등불놀이 구경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은 정씨 가문 노부인과 함께 달맞이를 했다.
달맞이를 마치고 나서는 온 식구가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달구경을 했다. 정육랑은 꽃꽂이를 선보였고, 정오랑과 정육랑은 함께 만든 꽃신을 노부인께 올리기도 했다. 정칠랑은 달맞이 그림을 그려 보여 주는 등 일가는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노부인이 노복들에게 나지막이 이야기하던 그때, 여인들이 앉아 있던 탁자에서 쨍그랑 소리가 났다. 나이가 든 여종 하나가 접시를 깬 것이었다. 보통 이런 일은 대부인까지 나설 필요 없이 집사 부인이 처리하면 됐다. 집사 부인이 가서 목소리를 낮춰 꾸짖자 여종은 얼른 무릎을 꿇고 깨진 조각을 줍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릎을 꿇는 찰나, 품속에서 둥글둥글한 과일 몇 개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세상에, 이 망할 것이 도둑질까지 했네.”
가까이 서 있던 여종이 놀라 소리치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다들 도둑질이라는 단어는 똑똑히 들었다. 노부인이 굳어진 얼굴로 대부인을 힐끔 봤다.
“물건을 훔친 게 아니에요.”
다른 한쪽에 있던 정칠랑이 소리쳤다.
“이 사람은 내 시중을 드는 어멈이에요.”
다들 멈칫하는 사이, 노부인은 더욱 일그러진 얼굴로 대부인을 쳐다봤다.
“이젠 저런 자까지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거냐?”
노부인이 물었다.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사람은 그래도 근본이 있는 자들인데, 이런 일을 저지른 걸 보면 집안 꼴이 엉망이라는 뜻이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대부인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아니에요, 조모님.”
정칠랑이 일어나며 소리쳤다.
“물건을 훔친 게 아니에요. 이따 가져가서 먹게 제가 챙기라고 했어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소인의 손버릇이 문제예요. 식탐이 있어 과일을 훔쳤어요. 일곱째 아씨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당황한 여종은 얼른 무릎을 꿇고 쾅쾅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찧으며 잘못을 빌었다. 너무 급히 죄를 시인하는 게 도리어 이상할 정도였다. 노부인은 무거운 얼굴로 대부인을 보며 손에 든 찻잔을 탁자 위로 꽝 내려놓았다. 정적을 뚫고 귀가 찢어질 정도로 무거운 소리가 났다.
달구경은 일찌감치 끝났고 아이들 역시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지만, 노부인의 마당에는 등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여종들과 몸종들은 공손히 서 있었고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다른 사람 일이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아랫것의 일이다. 좋아하는 과일을 평소에 충분히 먹질 못해 칠랑이 떼를 쓰고 귀찮게 하니까, 그 아랫것이 이참에 챙겨 두려고 한 거야. 누가 그러라고 시킨 일이 아니란 말이다.”
“맞아요, 조모님. 황 어멈이 저한테 이걸 챙겨도 되겠느냐고 물어서 그러라고 했어요. 황 어멈이 훔치려던 게 아니에요. 제가 알아요.”
“다 제가 자식을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어머님, 형님을 나무라지 마세요. 전부 제 잘못이에요.”
노부인의 방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가 싶더니 급기야 대부인이 소리 죽여 울기까지 했다.
“누가 고의로 네게 망신을 준 것이란 말이냐? 고의면 뭐? 네가 먼저 아둔한 짓을 했으니 망신을 줄 기회가 생긴 거야. 따지고 보면 너 스스로 망신을 준 셈인데, 누굴 원망하느냐?”
노부인의 호통이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밖에 있는 여종과 몸종들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사람이 점점 퇴보하기도 한다더니, 네가 그 꼴이구나. 화를 풀 데가 없어서 먹는 음식을 제한해? 생각하는 꼴 하고는. 팔자 좋게 산 지 너무 오래됐나 보구나.”
“창피한 줄을 알아야지. 집안 애들이 음식을 훔치게 해?”
“돌아가서 제대로 반성해라!”
대부인은 방에서 얼굴을 가리고 울며 나왔다. 몸종과 여종들은 고개를 땅속으로 파묻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밝은 달이 휘영청 떴건만 정씨 가문의 마당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좋은 중추절에 이게 웬 난리인지.”
연못 근처에 두 소년이 마주 앉았다. 각자의 옆에 있는 몸종이 술을 따라 주었다.
“한 식구래도 어쩔 수 없지. 윗니, 아랫니도 안 맞을 때가 있는걸.”
정삼낭이 정사낭과 술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두 사람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둘째 숙부님이 곧 부임하시면 숙모님도 따라가시겠죠. 눈앞에 있을 땐 불평하고 원망해도, 따로 떨어져 있으면 각별해지는 법 아닙니까.”
정사낭이 웃으며 말하자 정삼낭도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니 숙부님이 이번엔 내양 자사로 가신다지? 정사품하에서 정사품으로 영전하셨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삼낭은 정사낭을 바라보다가, 정사낭이 자신의 말을 안 듣고 한 곳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걸 눈치챘다. 정사낭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연못 맞은편의 석가산이 보였다.
“또 그 미인 생각이 나?”
정삼낭이 웃으며 물었다. 정사낭이 연못에서 미인을 만났다가 정신이 나갔던 일은 집안에서 공공연한 웃음거리가 됐다. 성격 좋은 정사낭은 얼굴을 붉히지 않고 웃음으로 넘길 뿐이었다.
“미인 얘기를 하니 생각나는 일이 있네요.”
정사낭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춘란을 쳐다봤다.
“도관에 있는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구나. 내일 먹을 걸 챙겨서 갖다 줘라. 그래도 명절인데.”
춘란이 네 하고 대답했다.
“일개 바보가 뭘 어떻게 지내. 계절 지나가는 것도 모를 텐데.”
정삼낭이 웃으며 말했다.
“그 애가 알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우린 알잖아요.”
정사낭이 웃으며 대꾸했다. 정삼낭도 무의식적으로 그 석가산을 힐끔 쳐다봤다.
“돌아가신 숙모님께서 전에 내게 참 잘해 주셨어. 늘 웃는 낯으로 엿을 챙겨 주곤 하셨지. 그 동생이 태어난 후론 다신 그 웃음을 볼 수 없었지만 말이야. 듣자니 돌아가실 때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안 감길 정도였대.”
정삼낭이 말했다. 그 아이가 마음이 걸리셨겠지. 부모의 마음이란. 순간 두 사람은 씁쓸한 마음이 들어 잠시 침묵을 지켰다.
“춘란, 내 몫도 네가 함께 챙겨다 줘라.”
정삼낭의 말에 춘란은 얼른 네 하고 대답했다.
“그 숙모님이 정말 좋은 분이긴 했죠. 그분이 살아 계셨다면, 오늘 같은…….”
정사낭은 적절치 않은 말임을 깨닫고 얼른 말을 삼켰다.
“쇄은을 넉넉히 가져다줘라. 날이 추워지니 채워 넣을 것도 많을 거야.”
헛기침을 하고 난 정사낭이 춘란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춘란은 또다시 네 하고 대답했다.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그 바보의 귀환은 집안 식구들의 마음속에 자국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