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4
교랑의경 54화
한편 같은 시각 현묘관에서는 달구경이 한창이었다. 손 관주가 직접 와서 초청하자 정교랑도 흔쾌히 동의하고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와 달맞이 법회에 참석했다. 탁자 위에는 공물이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 차려져 있었고, 손 관주와 제자들도 새 도복으로 갈아입어 몹시 흥이 난 상태였다. 물론 최고의 날이라고 할 순 없었다. 더 좋은 날은 이제부터니까.
그 생각을 하니 손 관주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뒤로 단정히 앉은 정교랑은 멍한 무표정 상태였지만 눈에선 웃음기를 읽을 수 있었다. 밝은 달 아래 현묘관 안에는 7명뿐이었지만 오붓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아씨, 술 드실 수 있으세요?”
손 관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먹죠.”
정교랑의 대답에 손 관주는 기뻐하며 얼른 술을 따랐다.
“그런데, 여기 술은, 안 먹어요.”
이어진 정교랑의 말에 술잔을 든 손 관주의 손만 머쓱해졌다. 이곳의 박주를 정씨 가문의 명주와 비교할 순 없겠지. 언짢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사람이 주제 파악을 잘하면 기분 나쁠 일도 없는 법이다. 대신 손 관주는 과일과 쌀떡을 정성스레 올렸다.
다른 쪽에 앉아 있는 여도사들은 그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선은 관주가 그토록 정성을 다하며 조심하는 게 놀라웠고, 말로만 듣던 저 바보의 행동거지도 놀라웠다. 정씨 가문 바보 낭자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본 건 처음었는데, 좀 뻣뻣하고 표정이 부자연스러운 것 외에는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아씨가 말도 알아들어요?”
궁금증을 못 참은 도동이 몸종에게 물었다. 몸종은 실소를 터뜨리며 대답했다.
“우리 아씨의 병은 벌써 나았어.”
바보로 태어난 사람의 병이 낫기도 하나? 그게 가능해? 다들 의아해하며 진지한 눈길로 그 조용한 여인을 쳐다봤다. 바보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정상인과는 좀 달라 보였다. 이를테면 말을 아주 적게 하고 목소리가 메마르고 딱딱했으며 자리에 앉은 후 오랫동안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몸종이 정교랑을 부축해 일어서자 손 관주도 얼른 따라 일어섰고, 관주가 일어서자 나머지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이것들을.”
정교랑이 앞에 놓인 간식과 말린 과일을 보며 말을 이었다.
“도관 앞에서 행인들에게 나눠 줘요.”
이렇게 많이? 현묘관은 끼니도 제대로 챙기기 힘든 도관이었다. 신도가 많아 법회 한 번 열면 재물을 두둑이 챙기는 커다란 사찰이나 도관과는 달랐다. 이 정도 양이면 현묘관에서 한 달은 족히 먹을 텐데, 이걸 그냥 나눠 주라고? 그건 너무 낭비잖아.
“네.”
하지만 손 관주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공손하게 대답하고는 직접 길을 안내해 정교랑을 배웅했다.
이튿날 아침, 보부상 오씨는 아침밥도 거르고 일찌감치 성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현묘산을 지나는 길에 여도사 몇 명이 현묘관 밖으로 나와 서 있는 게 보였다.
소현묘관이 문란한 행실로 명성을 날린지라 대현묘관 여도사들은 거의 바깥출입을 안 했었다. 오늘은 웬일로 저렇게 많이 나와 있지? 게다가 새 도복까지 차려입고. 소현묘관이 벼락에 맞은 일은 풍문으로 알고 있는데, 소현묘관이 없어졌으니 이제 대현묘관이 그 전통을 잇겠다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보부상 오씨는 저도 모르게 흐흐 웃었다. 저속한 생각에 어느덧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라버니, 이거 같이 드세요.”
저쪽에서 도동이 상냥하게 인사하며 기름종이에 싼 물건을 들고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뜻이지? 길을 가던 다른 행인들도 인사를 받았지만 왠지 다들 꺼리는 눈치였다.
“우리 현묘관 중추절 법회 공물입니다. 보시하는 거예요.”
손 관주가 예를 표하며 말하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보고만 있을 뿐 섣불리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보부상 오씨는 탁자 위에 놓인 말린 과일과 간식들을 보자 또다시 배가 고파졌다. 맛은 없겠지만, 먹는다고 죽진 않겠지.
“고맙소, 고맙소이다.”
보부상 오씨가 큰 소리로 인사하며 가장 먼저 손을 뻗었다.
여도사들의 물건을 받으러 가는 사람이 나오자 주변에서 소란이 일었다.
“오씨, 그러다 사족을 못 쓰게 되면 어쩌려고.”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의미심장한 뜻을 담아 소리치자 사람들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여도사들은 민망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손 관주만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악인이 사라지고 없으니 악명이 오래 갈 리 없지.
“겁 안 납니다.”
보부상 오씨가 웃으며 앞으로 다가갔다. 이미 걸음을 내디뎠는데 물러날 순 없지.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잖아.
“가져가세요.”
손 관주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웃음을 머금고 간식 몇 개를 직접 건넸다. 작고 둥그렇게 구운 과자 위에 꽃무늬까지 새겨져 있었다. 두껍고 실한 게 처음 보는 과자였다. 보부상 오씨는 저도 모르게 궁금증이 일어 물었다.
“도사님, 이게 뭡니까?”
“월병이에요.”
손 관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8월 15일이 중추절이잖아요. 달처럼 둥근 이 월병엔 상서로움이 깃들어 있죠.”
한 사람이 받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모여들어 받아 갔다. 시종을 데리고 걸어오던 춘란은 현묘관 앞이 사람들로 붐비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에 물건을 받아 손에 든 기름종이 포장을 살펴봤다.
“이거 과일 절임이니?”
“네, 낭자. 우리 현묘관에서 공양하는 과일 절임이에요. 중추절이라 복을 나눠 주는 거예요.”
춘란의 물음에 도동이 제법 깍듯하게 예를 갖춰 대답했다. 이 작은 도관에 좋은 물건이 있겠어, 그냥 복이나 바라는 거겠지. 춘란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기름종이로 싼 물건을 시종이 들고 있는 대광주리에 던져 넣었다.
“소현묘관은 저쪽으로 가는 거니?”
춘란이 물었다.
“낭자, 소현묘관은 이제 소현묘관이라고 안 불러요. 태평궁이라고 부르죠.”
도동이 정정해 주며 춘란을 살폈다. 참배하러 온 사람 같지는 않은데…….
“태평궁?”
춘란은 의아한 눈치였다.
“이름을 이상하게도 지었네.”
“안 이상해요, 태평하란 뜻을 담은 거예요.”
도동이 얼른 대답했다. 춘란은 입을 삐죽이고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산으로 길을 재촉했다.
“누굴 찾아오셨는데요? 반근 언니는 외출했어요.”
도동의 말에 춘란은 걸음을 멈추고 도동을 쳐다봤다.
“이렇게 일찍? 그, 아씨는 안 돌봐도 돼?”
춘란이 놀라서 묻자 도동은 직접 앞장서서 걸어가 산문을 열어 주었다. 이쪽에서 문을 지키고 있던 여도사 역시 문이 열리며 낯선 사람이 보이자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반근 언니를 찾아왔대요.”
길을 안내하던 도동이 얼른 말했다.
“반근 언니는 아침 일찍 성에 나갔는데요.”
여도사가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난 정씨 댁 사람인데 먹을 거랑 돈을 가져왔어요. 그럼 일단 둘이 받아 둬요.”
춘란의 말에 여도사와 도동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사부님이 아씨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나이가 더 많은 여도사가 뒤쪽의 마당 문을 조심스레 보며 말했다. 마당 안은 고요했다.
“이건 방해가 아니에요. 아씨 댁에서 온 사람이잖아요. 일단 말은 전해야죠.”
도동이 말하면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문안에서 여인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동은 신이 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병풍 앞에 단정히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인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봤다. 안으로 들어가던 도동은 그 눈길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아씨, 댁에서, 사람이 왔어요. 물건을 가져왔대요.”
도동은 일부러 속도를 늦춰 천천히 말했다. 이 정도면 바보라도 알아들었겠지?
같은 시각, 강주성으로 나온 몸종은 노태야의 댁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몸종이 이름을 대자 문지기는 반갑게 문을 열어 주었다.
“이걸 월병이라고 한다고?”
노태야가 몸종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네, 어르신. 드셔 보세요. 어제 만든 거예요. 관주님이 법회도 여셨어요.”
몸종도 웃으며 대답했다.
“많이 드셔야 해요. 그래야 만수무강하고 모든 일이 뜻대로 이뤄지시죠.”
노태야가 껄껄 웃자 옆에 있던 노복도 따라서 웃었다.
“어서요, 노야. 어서 드셔 보세요.”
노복이 재촉하자 노태야는 웃으며 월병을 작은 크기로 잘라 입에 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했다.
“그 마음이 고맙군. 나한테까지 특별히 챙겨다 주고.”
“어제 중추절에 공양할 음식을 많이 만들었어요. 관주님께서 시주님들한테 전부 나눠 주라고 하셨어요.”
몸종은 웃으며 바구니 안에서 기름종이에 싼 각종 간식도 꺼내 놓았다.
“전부 산에 나는 야생과일로 만든 과일 절임이로군.”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몸종은 오래 있지 않고 물건을 내려놓은 다음 웃으며 인사했다. 노복은 몸종이 마당 문을 나가는 걸 확인한 후에야 돌아왔다. 방에 있던 노태야는 벌써 월병 하나를 다 먹은 참이었다.
“훌륭하군, 훌륭해.”
노태야는 연신 감탄을 하더니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구나, 아쉬워.”
노복은 뭐가 아쉽다는 건지 묻지 않고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노태야는 탁자 위에 쌓인 간식들을 보더니 엇, 하며 뭔가를 발견한 듯 손을 뻗어 하나를 집어들었다.
“현묘관.”
노인이 손에 든 종이 포장지를 보며 말했다. 노복도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포장지에는 ‘현묘관’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노태야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만평, 내 명첩을 들고 가서 이 과일 절임을 성 안의 지인들에게 나눠 줘라. 현묘관에서 중추절을 맞아 재를 올렸기에 그 복을 나눠 가지는 의미라고 전하고.”
노복은 놀란 표정이었다 이 과일 절임은 별게 아닐지 몰라도 노태야의 명첩과 함께 보낸다면 그건 보통 의미가 아니었다. 현묘관이 이제 이름을 날리겠군. 노태야가 그 시녀의 체면을 봐서 현묘관을 띄워 주시려나 보네.
“네.”
노복은 허리를 굽히며 대답한 후 얼른 과일 절임을 챙겼다.
몸종은 노태야의 결정을 까맣게 모르는 채로 어느덧 친해진 문지기와 인사를 나눈 후 장씨 고택의 문을 나섰다. 골목으로 막 꺾어질 무렵 옆쪽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누나.”
소리치는 소리에 몸종은 깜짝 놀랐다. 낯이 익은 얼굴이긴 한데, 어디서 봤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누나, 난 정씨 댁 사람인데 누나는?”
시종이 물었다. 이노야는 이부인의 의견을 따라 집안 아랫것을 모조리 불러 장씨 고택에서 손님 대우를 받는 시녀를 찾아내는 대신 시종을 장씨 고댁 근처에 대기시키는 길을 택했고, 마침내 몸종과 마주치게 됐다.
“난 교랑 아씨를 모시는 반근이야.”
몸종은 그 시종이 누군지 그제야 알아보며 대답했다. 그날 이노야를 따라 노태야를 찾아왔던 아이였다. 시종은 이제 떠올랐다는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방에서 시종의 말을 듣던 이노야와 이부인도 퍼뜩 깨달은 눈치였다. 그 아이였구나. 역시 집 안이 아니라 밖에 있었어.
“장 노태야는 어찌 안다더냐?”
이노야가 물었다.
“현묘산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했어요. 그 어르신이 밥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데, 마침 그 아이가 만든 간식들이 그분 입맛에 딱 맞아서 알게 됐대요.”
시종이 대답했다. 간식? 이부인은 멈칫했다. 언젠가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이런 우연이 있나, 왜 그 바보 옆에 있는 애들은 전부 음식 솜씨가 좋지?
“그 계집의 말이 참인 것 같아요? 거짓인 것 같아요?”
이부인의 물음에 이노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노태야는 쉽게 속아넘길 수 있는 분이 아니오. 아마 거짓은 아닐 거요.”
“그 아이의 솜씨가 노태야의 입맛과 맞아떨어진다면, 그 아이를 노태야께 드리죠.”
이부인이 말했다. 좋은 생각인데. 이노야가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명을 내렸다.
“여봐라, 현묘관에 가서 그 계집을 데려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