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53
교랑의경 553화
해 질 무렵, 진십삼은 취기가 오른 채 집에 돌아왔다.
“자네, 어딜 갔던 거야?”
주육낭이 소리쳤다.
“자네가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진십삼이 의아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주육낭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진십삼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그 여인이 선물한 그림 좀 보여 줘.”
주육낭은 진십삼을 끌고 가다시피 하며 서재를 향해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을 보러 온 거야?”
주육낭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던 진십삼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래. 그런데 왜 잠가 둔 거야? 안 그랬으면 내가 훔쳐 가려고 했는데.”
주육낭이 언짢다는 듯이 말하자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가 훔쳐 갈까 봐 잠가 뒀지.”
진십삼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주육낭이 진십삼을 서재 앞까지 끌고 오자, 진십삼은 걸음을 멈추고 몹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미리 말하지만, 이 그림은 한 달에 딱 한 번만 보여 줄 수 있어. 괜히 그림 망가져.”
주육낭이 같잖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엄청 귀한 것처럼 말하네. 여차하면 내가 한 장 더 그려 달라고 하면 그만이야.”
“그래, 좋아. 그럼 가서 한 장 그려 달라고 해.”
진십삼이 활짝 웃으며 서재 문을 열고는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향해 장난스럽게 눈썹을 으쓱했다.
“아무나 다 나랑 같은 대접을 받는 줄 알아?”
진십삼이 서재 안으로 들어서자, 서재 안의 등불 하나가 켜졌다.
“잠깐, 잠깐. 일단 술부터 좀 가져와 봐. 술 없이 무슨 꽃을 감상한다고.”
주육낭이 말했다.
“이봐,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꽃에 취할 수도 있다고.”
진십삼이 웃으면서 시녀들에게 등불을 밝히라고 말했다.
서재 안의 등불이 하나씩 차례로 밝혀졌다. 은은한 불빛 아래, 진십삼의 시야에 모란이 차츰 들어오기 시작했다.
진십삼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눈앞에서 천천히 펼쳐지는 화폭을 감상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언제 보아도 기분 좋은 그림이란 말이지. 이건 날 위한, 나만의 모란이야.
진십삼의 눈앞에 모란 한 송이가 천천히 피어났다.
모란이 피어나?
진십삼이 멈칫하고 놀랐다.
위씨 저택에 있는 모란은 천 겹의 붉은 꽃잎이 감싸고 있다던데(魏家華者, 千葉肉紅華, 重重層層 – 구양수歐陽修 ), 정 낭자가 나한테 그려준 모란이 그 품종이었나?
등불이 점점 밝아지면서, 진십삼의 눈앞에 보이는 모란이 조금씩 피어났다. 그리고 붉은 모란 위로 날갯짓을 하던 나비 한 마리가 모란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모란을 낮에 본 사람들은 강렬한 색상을 띤 꽃에 미인이 따라 준 술에 취하듯 홀리고, 밤에 본 사람들은 옷가지를 흠뻑 적시는 짙은 꽃향기에 취한다(國色朝酣洒, 天香夜染色 – 이정봉李正封).
방 안의 모든 등불이 켜지자, 진십삼은 그제야 자신의 앞에서 화폭을 들고 서 있는 주육낭을 발견했다.
“내 거야.”
주육낭이 입이 귀에 걸린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네는 아무나 다 나랑 같은 대접을 받는 줄 알아?”
진십삼이 흠칫 놀랐다가,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주육낭을 보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식, 나를 끌고 오면서 연기한 게, 다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였어?”
진십삼이 주육낭의 어깨에 주먹을 한 방 날리고는 자신의 뒤에 펼쳐진 화폭을 가리키며 말했다.
“됐고. 내 모란이 더 유일무이해.”
“내 거야말로 유일무이하거든? 내 모란 한 송이가 네 거 백 송이를 이긴다.”
주육낭이 지지 않겠다는 투로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진십삼은 주육낭을 쳐다보다가 그가 든 화폭으로 시선을 옮기고 미소를 지었다.
“틀렸어. 그 여인이 유일무이한 거야.”
그 여인이야말로 유일무이하지.
주육낭도 자신의 손에 들린 화폭을 내려다보았다.
맞아, 그 여인이야말로 유일무이해.
두 사람은 술 한 동이를 금세 비웠다. 편한 자세로 앉아 여전히 입이 귀에 걸린 채 웃고 있는 주육낭을 보고 있자니, 진십삼도 실실 웃음이 나왔다.
“정 낭자가 자네한테 이렇게나 잘해 줄 줄이야.”
“그러게 말이야.”
주육낭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하고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내가 누이한테 잘해 주는 거지.”
진십삼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오늘 고 관인을 만나러 갔었어.”
진십삼이 대뜸 말했다.
고 관인!
주육낭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늦게 집에 왔구나. 사환 말로는 십삼이 지인을 만나러 갔다던데, 그 지인이 바로 고 관인이었군.
진십삼이 이번 일에 대해 고씨 가문에 잘 설명할 방법을 최대한 모색해 보겠다고 했지. 진씨 가문과 고씨 가문은 둘 다 황실의 친척이기도 하고, 특별한 왕래는 없어도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니까.
고 관인이 정교랑을 완전히 용서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쯤은 늦출 수 있겠지.
“자네, 뭐라고 했나? 고씨는 뭐라고 했고?”
주육낭이 물었다.
“나야 솔직히 말했지. 고 관인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고.”
해가 지자, 덕승루의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이 시작되었다. 즐겁게 웃고 떠드는 목소리와 노랫소리가 한데 섞여 덕승루를 감쌌다.
“언니.”
주 낭자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화려하게 단장한 관기 한 명이 웃으면서 주 낭자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춘령이 씩씩대며 관기를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노(路) 아씨, 저희 언니가 쉬고 계시잖아요.”
춘령이 외쳤다. 관기는 춘령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읽으며 앉아 있던 주 낭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니, 벌써 자려고요?”
관기가 물었다.
관기들은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는지라, 대낮에 내의를 입고 밤이 되어야 화려한 단장을 하곤 했다. 하지만 한창 손님을 맞을 시간인 지금도, 주 낭자는 머리를 풀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내의만 입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오늘은 손님을 맞이하지 않고 쉬겠다는 모습이었다.
주 낭자가 응, 하고 대꾸했다.
“언니는 여유롭고 한가해서 참 좋겠어요. 어떻게든 입에 풀칠이라도 하며 살겠다고 아양 떠는 우리와는 다르잖아요.”
관기가 웃으며 말했지만, 주 낭자는 관기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노 아씨, 그럼 빨리 나가세요. 다른 언니들이 왕 관인을 빼앗아 가면 어쩌려고 여기 있어요?”
춘령이 말했다. 관기는 춘령을 잠시 흘겨보고는 계속해서 주 낭자에게 말을 걸었다.
“언니, 제 칠현금이 고장 났는데, 언니는 요즘 칠현금을 쓸 일이 없잖아요. 오늘 좀 빌려도 되죠?”
“기루에 남는 게 칠현금일 텐데, 왜 굳이······.”
주 낭자가 춘령의 투덜거림을 끊고 대답했다.
“가져가.”
주 낭자가 책을 내려놓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관기를 쳐다보았다.
“언니, 언니의 칠현금은 엄청 귀중한 거잖아요.”
춘령이 기분 나쁘다는 기색으로 주 낭자에게 투덜거렸다.
“귀중? 아무리 귀중한 물건도, 제 몫을 다하지 못한 물건은 똑같은 물건일 뿐이야. 동생의 칠현금 솜씨가 뛰어나니, 내 칠현금을 욕되게 하지 않겠지.”
주 낭자가 말했다. 관기는 주 낭자의 대답에 활짝 웃으며 재빨리 칠현금을 품에 안고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언니는 말을 어쩜 그렇게 잘해요? 이러니까 고 관인과 정 관인 모두 언니한테 푹 빠지지.”
관기가 웃으면서 말했다.
“노 아씨, 말재주가 없으면 가만히 좀 있어요. 그럼 손님이 몇 명 더 늘 테니까.”
춘령이 말했다. 관기가 고개를 돌리고 춘령을 흘겨보았다.
“나 참, 몸종 주제에 왜 그렇게 듣기 싫은 말만 골라서 하는지 원.”
“제가 아씨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듣기 좋은 말을 해 줘요?”
춘령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춘령.”
주 낭자가 춘령을 나무라자, 춘령이 입술을 삐쭉이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관기도 춘령을 붙잡고 말싸움을 계속하기는 귀찮았는지, 별다른 말 없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칠현금을 안고 물러났다.
“언니.”
춘령이 주 낭자를 부르며 가까이 다가왔다.
“너도 그만 물러가렴. 난 책을 조금만 더 보다가 잘게.”
주 낭자의 말에 춘령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나 밖으로 나갔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지자, 주 낭자는 천천히 책을 펼쳤다.
지금처럼 여유롭게, 아무런 목적 없이 책을 읽은 건 너무도 오래전 일이네. 어렸을 적에 아버지께서 직접 책을 펼쳐 들고 나를 가르치셨던 기억이 나.
사내는 공로와 명성을 위해 책을 읽는다지만, 여인들이 책을 읽는 건 자기 자신을 위해서야. 하지만 열심히 읽어 보기도 전에 아버지께서는 억울한 누명을 쓰셨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지.
교방사에 들어온 후로 읽은 책과 여기서 익힌 칠현금 혹은 다른 기예들, 그 모든 건 나 나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사내들의 환심을 얻기 위한 거였어.
아니야,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 사내들의 환심을 얻는 건,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잖아?
정적이 흐르는 방 안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적막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노 아씨, 저희 언니께서는 주무신다고······.”
춘령이 관기를 막아서는 말이 들려왔지만, 곧바로 관기의 호통이 들려왔다.
“지금 자긴 뭘 자. 언니가 잠이 오게 생겼니?”
관기가 문을 벌컥 열고 술 냄새를 풍기며 주 낭자 앞으로 다가왔다.
“언니, 큰일 났어요.”
노 낭자의 다급한 모습에 주 낭자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좀 전에 왕 관인이 그러는데, 누가 고 관인을 찾아가 화괴 다툼을 했던 이유가 다 언니 때문이라고 했대요.”
노 낭자의 말에 주 낭자는 피식 웃었다.
“원래 내 탓이 맞는걸.”
“아니, 그게 아니라······.”
노 낭자는 마음이 급했는지, 주 낭자의 말을 끊더니 조심스럽게 문밖을 내다보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진십삼 공자님이 고 관인을 찾아가 모든 일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언니였다고, 정 공자님을 이용해 고 관인을 떨쳐내려던 언니의 계략이었다고 했대요. 정 공자님은 언니랑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인데 억울하게 언니의 덫에 걸려들었다면서, 언니가 일부러 정 공자님을 이 일에 끌어들여 두 가문의 분쟁을 부추겼다고 했대요.”
노 낭자의 입에서 진십삼이라는 세 글자가 나오자마자, 주 낭자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노 낭자의 말들에 주 낭자는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노 낭자의 입 모양으로 보아서는 계속해서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주 낭자는 그저 귓가가 시끄럽다고 느낄 뿐,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언니, 몸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이번에 엄청난 가문 두 곳의 미움을 한 번에 산 거잖아요.”
“난 아직 접대 중이어서 이만 일어날게요. 손님들 아직 안 갔는데,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일부러 몰래 온 거예요.”
“언니, 언니.”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꽉 쥐고 앞뒤로 흔드는 느낌에, 주 낭자는 정신을 차렸다. 주 낭자가 아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흔들고 있던 춘령을 쳐다보았다.
“언니, 괜찮아요?”
춘령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주 낭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분이, 내가 한 짓이라고 했다고.”
주 낭자가 중얼거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언니, 언니,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진 관인께 말씀드리러 갈게요.”
춘령이 주 낭자보다 더 많은 눈물을 떨구며 울먹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춘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곧 주 낭자의 손에 붙잡혔다.
“가서 뭐라고 말할 건데! 그분의 말씀이 옳아. 다 내 잘못이야.”
주 낭자가 소리쳤다.
“언니! 언니, 아니에요. 언니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어떻게 진 관인이 언니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왜 진 관인이 정 낭자를 위해 언니를 모함하냐고요! 진 관인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춘령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정 낭자를 위해서······.
주 낭자가 힘없이 웃었다.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맞아. 고 관인을 찾아가서 그렇게 말하는 게 옳지. 사람은 원래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을 보살피고, 어떻게든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하고 지켜 주고 싶어 하잖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 낭자를 위해 언니를 해치는 건 말도 안 되죠! 언니는 일편단심 그분만 생각하는데, 그분을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언니가 왜······.”
“입 다물어!”
주 낭자가 소리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