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6
교랑의경 56화
저녁 무렵, 손 관주는 도동을 데리고 급히 태평궁으로 향했다.
“뭐라고? 반근 낭자가 아직도 안 돌아와?”
손 관주의 물음에 문을 지키던 여도사는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날이 어두워지는데, 왜 아직도 안 올까요?”
“성에 있는 그 노인 댁에 월병을 가져다드리러 간다지 않았어? 진작 올 때가 됐는데.”
손 관주는 초조해하며 손을 비볐다.
“네가 사저들과 함께 성으로 마중을 나가라.”
여도사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손 관주는 도동을 데리고 정교랑의 마당으로 들어갔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회랑 아래에 선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든 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씨.”
손 관주가 얼른 예를 표했다.
“반근 낭자가 장을 보러 멀리 나갔나 봅니다. 아직도 안 돌아왔네요.”
정교랑은 시선을 거두고 손 관주를 바라봤다.
“아닙니다. 오늘 밤엔, 안 돌아올 거예요.”
멈칫했던 손 관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씨께선 어디 갔는지 알고 계셨군요. 괜히 놀랐네요.”
손 관주가 도동에게 사저들을 도로 불러오라고 명하며 말했다. 정교랑은 대꾸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봤다. 손 관주는 이곳에 올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정교랑의 모습을 보곤 했는데,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씨, 뭘 보세요?”
손 관주도 따라서 쳐다보며 물었다. 서쪽 하늘로 석양이 지면서 가을 노을이 짙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을 봅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하늘이 뭐 볼 게 있다고요?”
손 관주가 물었다.
“별거 없죠.”
정교랑이 시선을 거두며 대답했다.
“그런데 예전엔, 보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예전엔? 손 관주는 어리둥절하여 다시 정교랑을 쳐다봤지만 정교랑은 이미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바보가 아닌 건 확실한데 어딘지 모르게 기이하단 말이야. 보통 사람과 달라. 손 관주는 얼른 따라 들어갔다.
“아씨, 반근 낭자가 없는데 뭘 드시겠어요? 제자들을 시켜 만들겠습니다.”
“그래요.”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을 짚고 방석 위로 앉으며 대답했다.
“연근 버섯 백합 고기찜, 칠보 야채죽, 마 호병을 먹어야겠어요.”
뭐, 뭐, 뭐? 손 관주는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먹는 건가? 아리송하게 들리는 이름들이 선계의 음악처럼 마음을 어지럽혔다. 세상에, 이 아씨는 평소에 뭘 먹고 사는 거야.
“아씨, 아씨.”
손 관주는 난처해하며 정교랑을 다급하게 부르고는 벌써 자리에 앉은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저는, 할 줄 모르는데요.”
“모른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손 관주를 쳐다봤다.
“배우면 되죠. 먹고 입고 자는 것 중에 먹는 게 가장 앞에 오잖아요. 그만큼 가장 간단하고 쉬운 일이죠.”
먹고 입고 자는 것에 그런 의미가 있었나? 손 관주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날이 밝을 무렵, 현묘관에서 여도사 둘이 급히 나왔다.
“내가 거기 남는다니까 사부님은 마음이 안 놓인다며 기어이 본인이 남으시겠대.”
“반근 낭자는 대체 어딜 간 거야. 말도 없이.”
“그러게 말이야. 반근 낭자야 가든 오든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그 낭자는 바보잖아. 그렇게 내팽개치고 가 버리면 어떡해. 말도 한마디 안 하고.”
“어젯밤에 식사 준비하느라 아주 죽을 뻔했어. 고기랑 채소를 하도 다져서 아직도 팔이 쑤신다니까.”
“넌 다지기만 했지. 난 호병 만드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다고.”
“근데 맛있긴 진짜 맛있더라. 역시 부잣집 사람은 먹을 줄 안다니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얼른 가자. 아침엔 또 무슨 이상한 게 먹고 싶다고 할지 모르겠네.”
두 여도사가 대화를 나누며 산으로 올라가려는데 앞쪽에 사람들이 보였다.
“진짜 재수도 없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사람을 바꿔?”
“에이, 이번엔 재수 없어서가 아니지. 청매는 대운이 트인 거야.”
“그래. 청매는 재수가 좋지, 재수 없는 건 우리고. 바보의 시중을 들러 오게 됐으니.”
“에이, 따지고 보면 그 청매가 이 바보 낭자를 모시다가 좋은 기회를 만난 거잖아. 여기 오는 게 그리 재수 없는 일만은 아니야.”
일행 중 여자 둘이 웃으며 소곤거렸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일행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봤다.
“시주님.”
두 여도사가 예를 표했다. 일행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두 여도사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후 말을 아끼며 천천히 뒤따라 올라갔다.
일행이 태평궁 문 앞에 다다랐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도동은 갑작스레 여러 명이 찾아오자 어리둥절하다가 뒤에 있는 여도사 둘을 발견하고 반갑게 나와 물었다.
“반근 언니는 돌아왔어요?”
“아직도 안 돌아왔어?”
도동의 물음에 여도사들이 오히려 반문했다. 그 말을 들은 일행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반근이라고?”
일행 중 집사처럼 보이는 사내가 세 사람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 애는 이제 안 옵니다.”
마당에 있는 두 몸종은 못마땅한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바짝 달라붙어 투덜거렸다.
“이 애들이 새로 온 몸종이에요.”
관사가 앞에 있는 손 관주를 보며 말했다. 손 관주와 뒤에 있는 제자들은 놀란 표정이었다.
“그럼 반근 낭자는요?”
손 관주가 물었다.
“노야께서 장 노태야 댁으로 보내셨어요.”
집사가 영광이라는 투로 대답했다. 집안 노비라는 게 본디 언제든 쉽게 팔 수 있는 물건 같은 존재이니 팔아 버리거나 선물로 준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손 관주는 잠자코 있으면서도 내심 두려움에 떨였다.
“장 노태야에 대해선 다들 아시죠? 반근 말로는 여기서 알게 된 인연이라던데. 그 애 음식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니 대운이 텄지 뭡니까. 그리 높은 곳으로 옮겨 가게 되다니.”
집사의 말이 이어졌다. 잠시 영문을 몰라 하던 손 관주와 제자들이 퍼뜩 깨달았다.
“그 배고픈 병에 걸린 어르신!”
“정말 잘됐네요. 그 어르신이 반근 언니를 데려가겠다고 했나 봐요.”
“내가 뭐랬어. 반근 언니가 드디어 고생에서 벗어났네.”
“반근 언니가 무지 좋아하겠다.”
여도사들은 오랫동안 바라던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지자 기쁜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소곤거리는 한편 그 장 노태야라는 분이 누구인지 묻기도 했다. 일개 몸종에게 그런 대운이 트였으니 정씨 가문 하인들로서는 부러울 따름인지라 여기저기 수소문해 알게 된 내용을 신이 나서 들려줬다. 두 몸종이 장 노태야의 신분에 대해 약간의 과장을 섞어 이야기하자 여도사들은 더욱 환호작약하며 천존께 감사를 올렸지만, 손 관주만은 멍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냥 가 버렸다고? 아씨는 어쩌고?”
손 관주가 중얼거렸다.
“여기 몸종 둘을 보냈잖아요.”
관주의 말을 들은 집사는 성가신 듯 대꾸하고 옷을 털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난 이만 가야겠네요. 그럼 도사님께서 애 좀 써 주세요.”
손 관주가 얼른 막아섰다.
“이런 일은 아씨께 직접 말씀을 올려야죠. 어쨌든 난 정씨 가문 사람이 아니잖아요.”
아씨와 그 몸종은 누가 봐도 사이가 좋았다. 아씨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일을 떠맡을 순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아씨의 심기를 건드릴 순 없지. 집사는 실소를 터뜨렸다. 일개 바보한테 그걸 말하라니, 알아듣기나 하나?
“알아듣습니다. 알아들으세요. 어서 따라오십시오.”
손 관주는 안쪽으로 앞장서 걸어가며 재촉했다. 집사는 하는 수 없이 두 몸종을 데리고 따라 들어갔다. 마당 안쪽으로 들어가자 수수한 옷을 입고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소녀가 보였다. 긴 머리를 허리까지 드리우고 손에는 나뭇가지를 든 채 땅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아씨.”
손 관주가 공손히 불렀다. 이 사람이 바로 그 바보 교랑 아씨? 관사와 두 몸종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정교랑을 살폈다. 부르는 소리를 들은 그 아씨가 고개를 들었다.
“아씨, 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아뢸 게 있대요.”
손 관주가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뒤쪽에서 오래도록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손 관주가 고개를 돌렸다. 집사와 두 몸종은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안타까워라. 저리 고운 외모를 갖고 바보로 태어났다니. 안타까워하는 집사에게 손 관주가 재촉을 했다.
“아씨, 노야와 부인께서 새로 보내신 몸종들입니다.”
정신을 차린 집사가 가엾다는 듯한 말투로 두 몸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교랑은 집사를 보며 말없이 있었다. 이 바보가 전에 있던 몸종의 이름을 반근이라고 불렀지. 지능이 달려서 그 이름이 제일 익숙한가 보네. 그러니 맨 처음의 몸종이 떠난 후 새로 온 몸종에게도 반근이라는 이름을 붙여 줬겠지. 집사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반근입니다. 이 아이들 둘 다 반근이에요.”
집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정교랑의 입가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좋네.”
이어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
한편 성 안의 장씨 고택 대문 앞에서는 집사가 옆에 있는 몸종을 노려보고 있었다.
“뚝 그쳐.”
집사는 무거운 목소리로 호통을 치며 경고했다.
“좋은 일 망치지 마라. 연로한 네 부모를 생각해야지.”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눈물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문이 열리고 문지기가 경계의 눈빛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정씨 댁에서 왔습니다. 노야께서…….”
집사가 얼른 웃는 낯으로 공손히 말했다. 하지만 문지기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닫아 버렸다.
“아니, 사람을 데려왔어요. 사람을 데려왔다고요. 어르신, 문 닫지 마세요.”
집사는 필사적으로 문을 밀며 몸종에게 소리쳤다.
“냉큼 이리 와.”
몸종은 쭈뼛쭈뼛 앞으로 다가갔다. 몸종을 본 문지기가 곧바로 손을 푸는 바람에 집사는 넘어지다시피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빚쟁이를 보고 피하듯 굴던 문지기가 만개한 국화처럼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반근 낭자, 낭자였군. 무슨 일인가? 마침 낭자 얘기 중이었는데.”
장 노태야는 찻잔을 내려놓고 앞에 선 집사와 몸종을 쳐다봤다.
“노태야께서 여기 홀로 계시는데 마침 이 아이의 솜씨가 입맛에 맞으신다기에 저희 노야께서 노태야를 모시라며 보내셨습니다.”
집사는 공손히 말씀을 올리고 몸종을 힐끔 쳐다봤다.
“소인이 미처 몰랐어요. 노태야께서……. 결례가 많았습니다.”
몸종이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 노태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지. 그리고 결례를 범한 적 없다.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것을.”
장 노태야가 말을 이었다.
“여기 남아 찬모를 하고 싶으냐?”
“사실 소인의 솜씨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자 집사가 헛기침을 했다. 몸종은 고개를 숙이며 몸을 움츠리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계집애가 자기 솜씨가 아니라 아씨가 가르쳐 줬다는 괴상한 말을 늘어놓더니, 여기 와서도 똑같은 말을 하려고 구네. 오기 싫다는 말이랑 뭐가 달라? 장 노태야는 별로 개의치 않고 웃으며 차를 마셨다.
– 인연이 될 일을 원한을 살 일로 만들어 버리면, 내 가만있지 않겠다.
– 이 천지 분간 못하는 것아. 내가 널 헛키웠구나. 우리 가족의 운명이 달린 일이야. 여차하면 우리 다 죽어.
몸종의 귓가에 이노야의 호통과 부모의 우는소리가 메아리쳤다.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소인이, 원하는 일입니다.”
몸종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어둠이 내리자 산어귀에는 인적이 드물어졌다. 아무래도 안 올 모양이었다. 문밖에 나와 있던 손 관주는 몸을 돌리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을 어찌하누, 어찌해.”
손 관주가 혼잣말을 했다.
“사부님, 뭘 보세요? 뭘 그렇게 오래 보시는 거예요?”
도동이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손 관주가 안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구나. 아씨를 뵈러 가야겠다.”
사부님이 지키거나 여도사 둘을 시켜 지키는 통에 종일 사람이 끊인 적 없었는데, 이 저녁에 또 가겠다고? 거긴 몸종도 둘이나 있는데? 도동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사부님을 따라갔다.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새로 온 몸종 둘이 정자에서 조잘조잘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바닥에는 호박씨 부스러기가 한가득 널려 있었다. 한편 부엌에 있는 두 여도사는 쟁반을 들고 있었다.
“내가 하마.”
손 관주가 쟁반을 받으려 하자 여도사들이 말렸다.
“사부님, 저희가 할게요.”
저쪽에서 몸종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할까?”
한 몸종이 웃으며 말하면서도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들이 하게 내버려 둬. 우리 집 덕에 먹고살잖아. 저런 거라도 해야지.”
다른 한 몸종이 웃으며 떠들었다. 손 관주는 못 들은 척하며 방문을 열었다.
“아씨, 흰죽 다 됐어요.”
손 관주의 말에 정교랑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수고가 많네요.”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손 관주가 웃으며 꿇어앉아 그릇과 젓가락을 챙겨 주었다.
“아씨, 드세요.”
정교랑이 손 관주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도사님, 이름이 뭐예요?”
정교랑이 불쑥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