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65
교랑의경 565화
아, 예전에는 바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더 이상 바보가 아니야. 태후께서 이 혼담을 넣는 이유가 뭔지는 정 낭자도 빤히 알 터.
정 낭자를 가르친 스승도 필시 교만한 사람이겠지. 요즈음 보이는 뼛속까지 교만한 문인들처럼 말이야. 권력으로 그들을 유혹할 수는 있겠지만, 권력으로 그들을 억누를 수는 없지. 그들에게 굶어 죽는 건 사소한 일이지만, 절개를 잃는 건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거든.
정 낭자는 의형제의 죽음 때문에 천자인 나와 내기까지 불사하는 여인인데, 태후께서 아무리 황권으로 억압한다 한들 권력에 고개를 숙일 리 없지. 그 여인의 눈에 별로 대수롭지도 않을 혼사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그 여인이 이번에는 무슨 방법으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가려나?
호기심이 인 황제는 세 여인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왜 안 되냐고? 그 여인이 싫어하니까!
주 부인이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 그럼 어떻게 말해야 하나? 어떻게 말해야 내 다리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까?
“왜냐면, 교랑은 이미 저희 집 여섯째와 혼담이 오가는 사이기 때문입니다.”
주 부인이 기지를 발휘해 대답했다.
아들아, 미안하다. 도저히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구나.
혼담을 거절하기에 가장 간단하고 그럴싸한 이유는 바로 이미 들어온 혼담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시를 향해 손짓했다. 황제가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귀비의 목소리가 전각 안에서 들려왔다.
“주 부인, 참으로 공교롭네요. 태후마마께서 정 이부인을 보겠다고 하니 정 이부인이 갑자기 다리가 부러지지 않나, 주 부인을 보겠다고 하니 갑자기 정 낭자가 주 부인의 아들과 혼담을 주고받고 있다지 않나. 그런데 왜 두 사람 사이에 혼담이 오간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까요? 설마 주 부인이 말한 그 혼담이, 이제 막 논의되기 시작한 건 아니겠지요?”
주 부인의 몸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네, 맞습니다. 귀비마마, 이 모든 게 그 여인 때문이고, 저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걸 잘 아시는군요.
귀비의 말을 들은 태후가 성난 목소리로 호통쳤다.
“주 부인, 귀비의 말이 정녕 사실인 게냐?”
“아니, 아닙니다. 사실 꽤 오래전부터 이미 혼담이 오갔습니다. 벌써 이 년 전부터 혼담이······.”
주 부인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정씨 가문과 한창 혼수 때문에 서로 앞다퉈 정교랑의 혼사를 논할 때, 주 노야는 진심으로 주육낭과 정교랑의 혼사를 고려했었다.
“그렇다면 그건 이 년 전에 이미 끝난 혼담이 아닌가요? 이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혼사를 치르지 않았다니요. 혼담이 성사되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인가요?”
귀비가 주 부인의 말을 끊고 웃으며 말했다. 주 부인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떡해! 말을 잘못했나 봐! 내가 말을 잘못했나 봐!
이제 끝장났네, 끝장났어! 내 다리! 내 다리!
귀비가 틀린 말을 한 게 아니야.
혼담을 넣은 지 벌써 이 년이 지나도록 혼사가 성사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이 년 전의 그 혼사가 성사됐다고 말하는 건, 제 뺨을 후려치는 꼴이잖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태후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 여인이 교만하기 짝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정말로 이 세상에 너를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냐!
태후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됐네, 주 부인. 그만하게나. 그쪽 혼담이 어찌 됐든 애가는 상관없네. 이미 두 사람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애가가 태후라는 지위를 빌려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게야. 이건 자네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정 낭자를 위한 일이기도 하네. 애가는 고씨와 정씨에게 혼인을 명하기로 마음을 굳혔으니, 자네는 돌아가서 정씨 가문에 말만 전하게. 날씨도 딱 좋은 봄날이니, 두 가문 모두 하루빨리 중매쟁이를 통해 혼사를 치르라고.”
“마마, 아니 되옵니다. 그렇게는 아니 되옵니다. 아이고, 사람 죽겠네!”
혼이 달아날 정도로 깜짝 놀란 주 부인은 태후 안전인 것도 망각한 채 고성을 질렀다.
저 여인네는 어찌 저리도 결례를 보이는 것이야! 그 무례한 여인의 가족이 틀림없구나!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오른 태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그만 물러가게!”
“마마, 아니 되옵니다. 소인은 감히 이 혼사를 받들 수 없사옵니다!”
주 부인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귀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감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저러는지 원.”
“당장 내쫓거라! 어서!”
태후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치자, 주위에 있던 내시들이 서둘러 주 부인에게 몰려가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여 문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수선하게 문밖으로 몰려나가는 사람들을 보던 황제가 어두운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폐하,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내시가 조용히 물었다. 황제는 고개를 젓고는 태후궁을 떠났다.
내시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황급히 손짓하고는 서둘러 황제의 뒤를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할아버지, 태후마마께서······.”
태후궁 근처에 눈 뜬 장님처럼 서 있던 어린 내시가 늙은 내시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늙은 내시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내시들의 주둥아리와 눈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봐도 된다고 하는 것만 보고, 우리가 말해도 된다는 것들만 말하도록 하여라.”
늙은 내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후궁 안에서 태후가 성난 목소리로 여봐라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렇게 되면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일이 되는 것이야.”
늙은 내시가 덧붙였다.
어린 내시가 안비의 궁에서 황제를 찾아냈다.
안비는 눈에 띄게 배가 불렀다. 안비의 맥을 짚었던 태의들은 모두 안비가 임신한 아이가 황자일 것이라고 거듭 단언했다. 황자를 얻을 거라는 기대에 몹시 기뻤던 황제는 매일같이 안비의 궁에 머물렀다.
원래대로라면 안비는 더 이상 시침(侍寢)할 수 없기에 황제는 안비의 처소에서 밤을 지새울 수 없었다. 태후도 이 일로 황제에게 두어 차례 귀띔했지만, 황제는 여전히 안비와 함께 동침했다.
“짐은 좀 같이 있고 싶어서 그렇소. 나이가 들수록 어린애가 좋아지는구려.”
황제가 말했다. 그러자 반대편에 앉은 안비가 환하게 웃었다.
“폐하, 아직은 너무 어린지라 폐하께서 같이 계셔 주시는 것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일부러 골이 난 듯이 말했다.
“허튼소리, 아무리 어려도 알 건 다 알고 있을 것이야.”
황제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안비의 배를 손끝으로 쿡 찔렀다.
“네 어미가 네 흉을 본 것이다. 절대로 짐이 한 말이 아니니라.”
안비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는 황제의 팔을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폐하께서도 황후마마와 비슷하시네요. 두 분 다 아이들을 좋아하시니.”
황제가 멈칫했다.
황후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들었다만.
황제가 물었다.
“황후가 여기에 자주 오는 것이오?”
“아니요. 태의가 신첩더러 많이 걸어 다니라고 하여서, 걷다 보니 어화원에서 몇 번 황후마마를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마마께서도 태의의 말을 들으시고 자주 걸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신첩은 감히 황후마마 가까이에 가지 못하기도 했고, 황후마마께서도 신첩을 피해 멀찍이 거리를 두고 계셨기 때문에 몇 마디만 주고받았을 뿐이옵니다.”
안비가 대답했다.
“피한다고?”
황제가 묻자 안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마마께서는 아직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시다 보니, 행여나 자신의 병세가 신첩의 복중 아이에게 해가 될까 봐 멀찍이 피하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태의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황후마마께서는 조심하시더라고요.”
황제가 무엇 때문인지 알겠다는 듯이 헛웃음을 보였다.
황궁의 여인들이란······.
“폐하, 그런 게 아니에요.”
황제의 생각을 꿰뚫었는지, 안비가 그의 팔을 흔들면서 말했다.
“황후마마께서는 절대로 그런 이유로 신첩을 피하시는 게 아니에요. 황후마마께서는 단지, 두렵다고 하셨어요.”
“두렵다고?”
황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황후마마께서는 어린아이들이 워낙 약하다 보니, 좋아하는 만큼 두렵다고 하셨습니다.”
안비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어갔다.
“더 많은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신첩은 알 것 같았어요. 황후마마께서 신첩의 배를 볼 때면, 기쁨이 드러나는 동시에 잔뜩 긴장하시는 기색 또한 역력하시거든요. 그 모습에 신첩이 얼마나 속상했는지······.”
황제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황후는 두 아이를 낳았는데,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소. 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다른 하나는 태어난 지 사흘을 못 넘기고 죽었지. 나중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어 육가아를 데려다 키우게 되었는데, 결국······.”
황제가 천천히 말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결국, 예전의 그 육가아마저도······. 한 여인이 연달아 몇 번씩이나 그런 충격을 받았으니······.
황제가 짧게 한숨을 토했다.
“황후가 진심으로 아이를 좋아하기는 하지.”
황제가 말했다. 안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제의 팔을 안은 채 아양을 떨며 불안 섞인 표정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태의가 안비 모자가 몹시 건강하다고 말하였으니.”
황제는 안비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안비의 등을 쓸어내리며 다독였다. 두 사람이 한창 애틋한 시간을 보내던 그때, 태후의 말을 전하러 온 어린 내시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린 내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의 혼사가 아닌가. 태후께서 뜻하시는 바가 있다면, 그리하시면 되느니라. 짐이 그런 일까지 관여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
어린 내시가 곧바로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물러났다.
안비가 조금 놀란 눈치로 황제에게 물었다.
“폐하, 정 낭자의 일인데도요?”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정 낭자가 왜? 정 낭자가 혼사를 올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소?”
안비가 장난스럽게 타박하듯 황제의 팔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폐하, 신첩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고 계시잖아요. 이 혼사, 괜찮은 걸까요?”
“괜찮은지 아닌지는 상관없소. 다만, 이 일이 꼭 좋지 않은 일이라 할 순 없지.”
황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희미한 달빛이 떠오르고, 어두운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수놓아졌다.
봄밤인지라 날씨가 아직 서늘하군.
금잔 안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켠 진 노태야는 온몸에 온기가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 황당한 일이 결국 이렇게 될 줄이야.”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말했다. 주 부인이 황궁을 나옴과 동시에, 태후가 고 관인과 정교랑에게 혼인을 명했다는 소식이 경성에 바람처럼 퍼져나갔다.
황실에서 가문 간의 혼인을 주도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황실과 주로 마주치는 인사들은 조정 대신들이다 보니 가문 간의 관계가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었으며, 권문세가의 혼사는 더욱이 애들 장난처럼 가볍게 취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태후는 한가로이 집안일이나 신경 쓰는 아낙이 아니기에, 황실의 혼사가 아닌 한 절대로 쉽게 혼인 이야기를 꺼낼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태후가 친히 먼저 혼사 이야기를 꺼낸 걸 보고, 사람들은 태후가 정말로 진노한 게 틀림없다고 추측했다.
“황당한 일을 미담으로 승화시키겠다? 고 관인의 이번 한 수는 황당해 보이긴 해도, 참으로 묘수구나. 어쩔 땐 일이 꼭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흘러간다니까? 황당한 일이니 황당한 방법으로 대처하는 게지. 물고기는 물고기만의 길이 있고, 새우는 새우만 다니는 길이 있다시피 말이야.”
진 노태야가 이어서 말했다.
“묘수라고요? 정 낭자 입장에서는 묘수가 아닐 텐데요.”
손으로 찻잔을 들어올리기만 할 뿐, 차를 마시지 않은 진소가 대꾸했다.
“주 부인은 울기까지 하며 궁 밖으로 내쫓겼습니다.”
진 노태야가 풉 하고 웃었다.
“주 부인도 참. 태후의 체면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나 보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태후의 체면을 챙겨 주려던 사람은 다리가 부러졌잖습니까.”
진소의 대답에 진 노태야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씨 가문 사람들이라 그런지, 역시 보통내기들이 아니야.”
여전히 찻잔을 쥐고만 있던 진소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러니,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
작가의 말:
‘굶어 죽는 건 사소한 일이지만, 절개를 잃는 건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일’이라는 구절은 송나라 유학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의 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