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67
교랑의경 567화
“누가 그 여인과 다툴 배짱이 있었던 게냐? 어떤 방식으로 화괴 다툼을 하였느냐? 누가 더 배짱이 두둑한가? 아니면, 누가 더 돈이 많은가?”
시종이 진안 군왕의 말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마지막에 결국 미인을 얻은 자는, 물론 정 낭자겠지?”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묻자,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만 관에 한 달이랍니다. 그 일로 경성이 아주 발칵 뒤집혔어요.”
진안 군왕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태후께서 고 관인과 정 낭자에게 혼인을 명하셨다고 합니다.”
시종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진안 군왕의 웃음소리가 돌연 멈췄다.
밤사이 봄비가 그치지 않고 내렸다. 동이 틀 무렵이 되자, 방 안에 켜 둔 등불이 점차 어두워졌다.
“낭자에게 정혼자가 생기면 내가 잘 알아봐 주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고십사 그놈은, 낭자와 인연을 맺기에는······.”
진안 군왕이 종이 위에 쓰인 글씨를 읽어 내려가다가,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붓을 탁 내려놓았다.
“쓸데없는 소리투성이잖아!”
진안 군왕이 종이를 마구잡이로 구겨 던져버렸다. 탁자 주위에는 구겨진 종이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언제 딱 한 번이라도 정 낭자의 의지였던 적이 있나! 무슨 일이든, 항상 정 낭자가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물어볼 틈도 없이 일어났어. 죄다 다른 이들이 원해서 일어난 일들이지!”
진안 군왕이 이를 부득 갈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위로랍시고 하는 말들이 이토록 쓸데없고 우스울 줄이야.”
깊게 심호흡을 한 진안 군왕이 곧장 문밖으로 향했다. 문가에 서 있던 시종들이 서둘러 진안 군왕을 향해 예를 올렸다.
“여봐라. 가서 유 대인에게 알리거라. 본왕이 지금 당장 석당(石唐)을 만나러 가겠노라고.”
진안 군왕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석당은 이번 무평 민란의 우두머리 중 두 사람을 뜻했다. 석당은 본디 두산(竇山)의 산적들인데, 혼란을 틈타 이번 민란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부에서 최선을 다해 가뭄을 구제하고, 진안 군왕까지 천자를 대신하여 무평으로 와 민란을 평정하니, 민란을 일으켰던 사람 대부분이 투항한 상황이었다. 투항하지 않은 자들은 두산으로 올라가 피신했다. 두산은 산세가 워낙 험한 곳인지라, 석당 패거리는 이를 무기 삼아 계속해서 투항을 미뤄왔다. 관부는 하는 수 없이 시간을 두고 지켜보고 있었지만, 끝끝내 순순히 항복하지 않는 그들은 무척이나 껄끄러운 존재였다.
며칠 전에 석당 패거리가 투항하겠다는 소식을 전해 와 긴장감이 다소 누그러진 상태였지만, 산적들과 합의를 보러 가는 사람을 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그들과 어떤 식으로 합의를 봐야 할지도 결정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갑자기 진안 군왕이 직접 산적들과 대면하겠다고 하니, 모두가 놀랄 수밖에.
“전하, 절대로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것인가? 석당 일당이 오늘은 담판하자고 했다가, 내일은 또 싫다고 하고, 담판하러 오는 사람이 누구는 됐고, 누구는 안 되느니 하며 까탈스럽게 굴지 않느냐. 그들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관부가 못 미더워서겠지. 그러니 본왕이 직접 가겠다는 게다. 이 정도면 그들에게 충분한 성의를 보이는 거니까.”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전하, 하지만 너무 무모한 행동이십니다. 두산 산적들은 워낙 잔인하고 교활해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시종이 다급하게 말했다.
“산적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 한다고? 산적이 두렵다고 해서, 이대로 질질 끌기만 하겠다는 것이냐?”
진안 군왕이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본왕은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다.”
본왕은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다. 당장 경성으로 돌아가야겠단 말이다.
“황당하군!”
편한 옷을 입은 채 단잠을 자다 깬 고능준이 시종을 향해 호통쳤다. 그러더니 화를 참지 못하고 손에 쥔 서신을 탁자 위로 세게 내리쳤다.
먼 길을 다급하게 달려온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이야!”
고능준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고능준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내가 경성을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정 낭자가 내 며느리가 된다는 말이야?
이거 참!
지금 화를 낸다고 해서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일이 초래할 결과야. 결과를 추측하려면, 이 일의 시발점부터 제대로 알아야 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먹지 말고 자초지종을 얘기해 보아라.”
고능준이 굳은 얼굴로 명령했다. 시종이 알겠다고 한 뒤, 이번 일에 대해 소상히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 모두 그 관기의 계략에 빠졌다는 게냐?”
고능준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모(毛) 수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도 자세히 알아보았는데, 정말로 배후 같은 건 없었고, 순전히 고 관인을 피하기 위한 관기의 계략이었습니다.”
시종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고능준이 방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이번 일을 찬찬히 곱씹었다.
“폐하께서도 반대하지 않으시고?”
고능준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께서 폐하께 여쭤보셨는데, 폐하께서는 그들의 혼사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셨답니다.”
고능준이 냉소를 지었다.
“정말로 관여하지 않으신다면,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겠구나.”
“대인, 많이 안 좋은 일일까요?”
시종이 긴장한 기색으로 묻자 고능준이 콧방귀를 뀌고는 성난 얼굴로 말했다.
“좋은 일일 때는 내 생각이 나지 않고, 나쁜 일일 때만 내가 죽지도 않고 살아 있다는 게 생각나더냐.”
시종은 고개만 숙일 뿐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실상 황제가 이번 혼사를 반대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이번 혼사에 대해 아예 관심도 두지 않고 묻지도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황제가 이번 일을 아예 나 몰라라 하니, 그제야 모 수재가 고능준에게 소식을 알린 것이었다.
무려 정 낭자야. 다른 여인도 아니고. 무려 신선의 비방을 얻은 여인이라고.
일이 예상한 대로, 정상적으로 흘러가지 않을 땐, 분명히 이상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야.
시종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모 수재의 어두운 표정과 잔뜩 화가 난 고능준의 반응을 보자 마음이 더욱 불안해졌다. 시종은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고능준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이번 일은 각자 계산하는 바가 있겠군. 그럼 우리 고씨 가문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고능준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잘만 계산하면,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 없겠어.”
정 낭자 같은 여인이 우리 가문에 들어오는 게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 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 낭자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 가문에 들어오게 되느냐는 거야.
이런 경우는 생각조차 못 했는데, 운명의 굴레가 일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이 이번 일의 이점을 생각해 봐야겠어.
안 좋은 점이야 뭐,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실컷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둘 수는 없느니.
시종이 기쁜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짐을 챙기거라. 경성으로 돌아가야겠다.”
고능준의 말에 시종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외직에 있는 관리들은 부임지를 마음대로 떠날 수는 없다. 특히나 황제의 부름도 없이 경성으로 가는 것은 더욱 금기시된 일이었다. 심지어 관리의 고향이 경성이라고 해도, 부임지를 떠나 경성으로 갈 수는 없었다.
“노부인의 건강이 요즘 안 좋다고 했지?”
고능준이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원칙을 피해갈 방법이 하나 있다면, 바로 충효를 핑계로 대는 일이었다.
시종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심장은 더욱 빨리 뛰기 시작했다.
나쁜 일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시지 않았나? 그런데 왜 노야께서는 탄핵을 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경성으로 가시겠다는 거지?
“노야, 이번 일, 정말로 나쁜 일이 아닙니까?”
시종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고능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고말고.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 내가 직접 가서 정 낭자를 한 번 봐야겠다. 다만······.”
말을 멈춘 고능준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창밖의 시커먼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왠지 조금 불안하구나.”
“불안하시다고요? 왜요?”
시종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는 힘드니, 직감이라고 할 수밖에. 정 낭자와의 혼사는 사소한 일이지만, 자꾸 내가 뭔가를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뭘 잘못하셨는데요?”
시종의 질문에 고능준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내가 경성을 떠난 게 잘못이야. 경성에 남은 인사들을 통해 잘 대비했다고 여겼는데, 결국 사람에 관한 일이다 보니, 말 한마디의 차이, 혹은 간발의 차로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수가 있어. 그래서 그런지, 어떤 일들은 지금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구나.”
고 관인이 덕승루 안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고 관인! 다시는 안 오실 줄 알았어요!”
기생 어미 막씨가 흥분한 어투로 소리쳤다.
퉤! 저 늙은 요부가 누굴 욕하는 거야? 내가 왜 여길 오면 안 되는데? 그 정씨 놈들이 무서워서 여기도 못 올까 봐?
정사낭은 이곳저곳 기웃거리면서 잘만 놀러 다니는데, 나 고십사는 왜 사람을 피하고 숨어다녀야 해?
고 관인은 속으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겉으로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왜 여길 안 오겠나? 덕승루가 얼마나 좋은 곳인데.”
태후가 고 관인과 정교랑에게 혼인을 명했다는 소식은 벌써 온 경성에 소문이 났다. 고 관인의 시원스러운 대답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고 관인을 향해 축하한다는 인사를 쏟아냈다.
고 관인은 더욱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축하해라, 축하해. 이런 미담은 단연 만천하 사람들의 축하를 받아 마땅하지.
“고십사!”
포효에 가까운 목소리에 덕승루 내에 작은 진동이 울린 듯했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모를 젊은 사내가 서슬 퍼런 얼굴로 활을 들고 문가에 서 있었다.
저게 누구지?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했다.
“주육낭!”
문밖에서 누군가가 사내를 향해 소리치자, 그제야 사람들은 사내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주육낭!
뒤늦게 주육낭을 쫓아온 진십삼이 그의 팔을 잡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허튼짓할 생각은 말게! 할 말이 있으면 좋게 얘기하면 되잖나.”
“아내를 빼앗긴 자의 원통함을, 말로 해서 되겠는가!”
주육낭이 고함쳤다.
아내를 빼앗긴 자의 원통함?
덕승루 대청 안의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주육낭은 거의 화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격분한 모습이었다.
“고십사!”
주육낭은 자신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에 대해 더는 말하지 않고, 어리둥절해 있는 사람들에게 굳이 경위를 설명하려는 기색도 없이 진십삼을 뿌리치고 활을 들었다. 주육낭은 정확히 고 관인을 향해 화살을 올리고 활을 겨누었다.
“군자는 죽을지언정 모욕은 당하지 않는 법이오! 그러니 내 손으로 네놈을 죽여 주마!”
깜짝 놀란 진십삼이 주육낭의 어깨를 향해 몸을 날렸다.
진십삼이 몸통을 세게 부딪힌 덕에, 주육낭의 화살은 고 관인을 빗겨 나가 옆에 있던 기둥에 박혔다. 화살이 어찌나 세게 날아갔는지, 기둥에 박힌 화살의 깃털이 격하게 흔들렸다.
화살이 빗나가자 부아가 치밀어 오른 주육낭은 아예 활을 내던지고 허리춤에 있던 단도를 빼 들어 고 관인을 향해 달려갔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대청 안의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살인이야!”
덕승루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이 한데 섞여 한창 어지러운 틈을 타, 진십삼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옆에 있던 높은 층계에 올라가 아수라장이 된 대청 안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황당한 일에는 황당하게 맞서야 한다. 우스운 이야기를 미담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미담 또한 얼마든지 추문으로 바꿀 수 있는 법.
말이란 전부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오지 않던가. 말할 용기가 있는 자,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말하는 자, 그자가 바로 승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