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7
교랑의경 57화
번화한 동쪽 시장은 보부상이 장사하기 쉬운 곳이 아니었다. 골목골목을 누비며 큰 소리로 호객 행위를 해야 그나마 입에 풀칠할 수 있었다. 보부상 오씨는 짐을 내려놓고 소매로 땀을 닦으며 잠시 쉬었다. 보부상 오씨가 취급하는 물건에는 연지분이며 장난감, 과일 절임, 바늘과 실 등 없는 게 없었다.
어느 집 문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 팔아야겠군, 보부상 오씨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땡땡이 장난감을 흔들어 소리를 냈다.
“이봐요, 여기요.”
부인 두 명이 아이의 손을 잡고 손짓하며 불렀다. 부인은 진열대 위의 물건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아이를 달래려고 애썼다. 서너 살쯤 된 아이 역시 진열대를 붙잡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과일 절임 먹을래?”
부인이 과일 절임 봉지들을 뒤적이며 물었다.
“앗, 이건 뭐지? 처음 보는 건데.”
“거기 글자 쓰여 있잖아. 뭐라고 쓰여 있어?”
다른 부인이 바짝 다가오며 물었다. 힐끗 보던 보부상 오씨는 어제 현묘관에서 받은 공물인 걸 깨닫고 흠칫 놀랐다. 저게 뭐랬지? 중추절이라 뭐가 둥글다고 한 것 같은데.
“월병입니다. 현묘관의 공물이에요. 거기 여도사 말이 중추절을 맞이하여 단란하게 모이자는 의미로 만들었대요. 보세요, 달처럼 둥글잖아요.”
부인이 물건을 들고 꼼꼼히 쳐다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아이가 홱 잡아채 기름종이를 뜯었다.
“꽃이다, 꽃.”
아이가 손에 든 월병을 보며 소리치고는 한입 깨물어 먹었다.
“어머, 바로 먹으면 어떡해.”
부인이 놀라 소리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입을 댄 물건을 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하는 수 없이 돈을 꺼냈다.
“얼마예요?”
“아주머니, 이건 돈을 받을 수 없어요. 도관에서 보시한 건데 어떻게 돈을 받아요. 같이 복을 나눈 셈 칩시다.”
보부상 오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두 부인은 그 자리에서 실 몇 개를 골라 계산을 끝냈다. 여인들은 작은 거 하나만 챙겨 줘도 좋아한다니까. 기분이 좋아진 보부상 오씨는 멜대를 들고 딸랑이 장난감을 흔들어 소리치며 자리를 떴다. 맞은편에서 뚱뚱한 노인이 너털너털 걸어왔다. 아이가 소리쳐 부르는 모습이 멀리서도 보였다.
“할아버지.”
뚱뚱한 노인은 이쪽으로 달려오던 아이를 성큼성큼 걸어가 안아 주었다. 아이의 손에 있던 월병이 사내의 얼굴에 닿았다.
“이게 뭐냐?”
노인이 웃으며 물었다.
“달이에요.”
아이가 방금 들은 말을 전하자 노인은 놀란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이가 노인의 입에 월병을 갖다 댔다.
“엄청 맛있어요.”
노인은 입을 벌려 한입 베어 먹더니 순간 눈빛을 반짝였다.
“엇?”
월병을 삼킨 노인은 아쉬운지 월병을 한입 더 베어 먹었다.
“훌륭하구나, 훌륭해.”
골목에 또다시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내 달 다 먹었잖아요.”
“착하지, 할아비가 더 사줄게. 보부상, 이봐요. 거기 서라고…….”
마당에 들어서자 한데 모여 조잘조잘 떠드는 몸종들의 모습이 정사낭의 눈에 들어왔다. 정사낭이 심기가 불편한 듯 발을 몇 번 구르자, 몸종들이 얼른 흩어졌다.
“공자님,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춘란이 얼른 정사낭의 겉옷을 받으며 말했다.
“이따 손님이 오실 거다.”
정사낭의 말에 춘란은 네 하고 대답하며 물었다.
“차로 준비할까요, 술로 준비할까요?”
“차.”
정사낭이 방으로 들어가자 춘란이 따라 들어갔다.
“공자님.”
잠시 망설이던 춘란이 결국 입을 열었다.
“현묘관 몸종이 또 바뀌었어요.”
정사낭은 응 하고 대꾸한 것 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교랑 아씨 쪽에 반근 대신 갔던 그 몸종도 떠났거든요.”
춘란은 한번 입을 열자 멈출 수 없는 듯 이어 말했다.
“알고 보니 어제 노야께서 그 애를 부른 게 그 일 때문이었어요. 장 노태야 댁으로 보냈대요. 그 애가 만든 간식이 입에 맞으시다며…….”
정사낭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사람이 또 바뀌었다고? 누가 또 데려간 거야? 바보 교랑의 몸종들은 거기 남아나질 못하는 건가, 탐내는 사람이 많은 건가?
“공자님, 장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언니, 이 간식들론 부족할 것 같은데.”
한 몸종이 접시에 놓인 간식들을 보며 말했다.
“여기도 몇 개 있어.”
다른 몸종이 다른 탁자에 있던 기름종이에 싼 과일 절임 몇 개를 들며 말했다.
“이건 어디서 난 거야?”
몸종이 받으며 물었다.
“아, 여기 글씨가 있구나.”
“다 됐니?”
춘란이 들어오며 재촉했다.
“장 공자 오셨어.”
두 몸종은 지체하지 않고 얼른 간식을 챙겨 춘란을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공자끼리 담소를 나눌 때에는 몸종들이 곁을 지킬 필요가 없었다. 춘란 같은 측근 시녀도 문밖에 서서 대기해야 했다. 방 안에서는 시와 그림을 논하는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두 공자는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아쉬운 듯 자리를 파했다.
“아, 참. 사낭, 자네 집 간식이 맛있군. 우리 집 열셋째 주게 좀 챙겨 갈 수 있겠나. 그 애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거든.”
문을 나서려던 장 공자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래, 그래.”
정사낭이 웃으며 물었다.
“어떤 걸 원하는데?”
“저 기름종이에 싼 복숭아.”
장 공자가 손을 뻗어 가리키며 대답했다. 정사낭이 몸종에게 가져오라는 명을 내렸다. 잠시 후 몸종들이 당황하며 돌아왔다.
“공자님, 이건 집에서 한 게 아니에요.”
그중 하나가 대답했다. 장 공자는 뜻밖이라는 눈치였고 정사낭은 난감해했다.
“그럼 어디서 샀는지 거기 가서 사 오면 되지 않느냐.”
정사낭이 말했다.
“아닐세, 아니야. 어디서 샀는지 말해 주면 내가 가서 사겠네.”
장 공자가 얼른 웃으며 말했다. 몸종들은 서로 눈짓을 하고 춘란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춘란 언니가 가져온 거예요.”
춘란은 멈칫했다.
“아, 그게…….”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대답했다.
“현묘관 간식 말씀이세요?”
“현묘관?”
장 공자가 다시 한번 물었다.
같은 시각 성 안에서도 여러 사람이 같은 이름을 입에 올렸다.
“현묘관.”
그들은 손에 든 기름종이에 쓰인 꽃무늬 글자와 앞에 있는 집사를 차례로 보며 말했다.
“이게 장 노태야께서 특별히 보내신 중추절 선물이라고?”
현묘관 여도사들의 일상은 예전과 다름없으나 또 많이 달라지기도 했다. 산 위의 태평궁에 있던 몸종이 떠났기 때문이었다.
“사부님께서 앞으론 태평궁에서 지내시겠대. 사매와 둘째 사저도 그쪽 일을 도우러 갔어. 영혜, 향불 좀 봐.”
“사저,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우리 둘이면 충분해. 어차피 사람도 별로 안 오고.”
여도사 영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산문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도사님, 도사님.”
누군가가 크게 소리치며 들어왔다. 얘기를 꺼내자마자 사람이 오다니. 두 여도사는 표정을 가다듬고 얼른 나가 맞이했다.
“여기서 월병을 만들었다지요?”
도관을 찾은 노인이 물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서 몇 명이 더 몰려왔다.
“도사님, 중추절 공물이 남았습니까?”
“도사님, 치성을 드려도 될까요?”
“도사님, 여기 식사나 간식 공양 있습니까?”
왁자지껄 수다스럽게 떠들며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두 여도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누구의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갑자기 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 두 사람으론 도관이 부족하겠는데!
떠들썩한 산 아래의 도관과 달리 산 위의 태평궁은 여전했다. 부엌에서 두 몸종이 무언가를 만드는 냄새와 조잘조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동이 걸어와 고개를 빼고 방 안을 들여다봤다. 병풍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씨, 아씨.”
도동은 겁을 먹은 듯 소리쳤다. 방 안에서 대답이 들리지 않자 도동은 부엌으로 뛰어가 두 몸종에게 물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회랑 아래에 앉아 있었는데.”
두 몸종이 밖을 힐끔 보며 대답했다.
“어이구, 바보가 뜀박질도 잘하네. 또 어딜 간 거야, 말도 한마디 없이.”
“잘 보고 있었어야죠.”
도동은 절박했다.
“누가 할 소린데. 그럼 너희는 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뭐 했어? 남의 집 음식을 공으로 먹으려고?”
허리춤에 손을 댄 두 몸종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도동은 놀라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얼른 가서 찾아.”
두 몸종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뻗자 도동은 놀라 얼른 뛰어나갔다. 문을 나서다가 하마터면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뒤에서 두 몸종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동은 부끄럽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불안에 떨며 주변을 둘러봤다.
사부님과 사저는 저녁때 아씨 곁을 지켜야 해서 이 시간엔 경전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도동이 잠시 안으로 들어가 향불을 보고 온 사이에 아씨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 바보가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아씨.”
도동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응?”
측문에서 누군가가 대답했다. 도동이 얼른 손을 들어 눈물을 닦자 그제야 걸어오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무늬 없는 비단 겉옷에 붉은 치마 차림으로 흰 버선에 나막신을 신은 채 긴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정교랑이었다.
“아씨.”
도동이 얼른 다가가며 소리쳤다. 정교랑은 도동을 보며 나뭇가지로 그린 꽃을 가리켰다.
“어때?”
정교랑이 물었다.
“아니, 어디 가셨던 거예요?”
도동이 물었다.
“산책.”
정교랑은 곧장 정자 쪽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반근 언니가 있을 땐 둘이서 매일 산에 올라가 산책을 했겠지. 도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산책하는구나.
“아씨, 다음에 나가실 땐 절 부르세요.”
뒤따라가던 도동은 짠한 마음이 들어 큰 소리로 말하다가 곧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절 부르시라고요. 혹여, 늑대라도 만나면, 잡아먹혀요.”
어느새 정자의 돌계단에 앉아 있던 정교랑은 그 말에 도동을 쳐다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정교랑은 손에 쥔 나뭇가지로 땅에 그림을 그렸다.
“아씨, 물 드시겠어요?”
“돌 위는 차가워요. 그만 들어가시죠.”
“아씨, 저기, 배 안 고프세요?”
도동이 수시로 물었지만 정교랑은 대답 없이 손에 든 나뭇가지로 가로획, 세로획, 갈고리, 삐침 등을 그려대는 일에 열중했다.
“아씨, 뭘 그리세요?”
도동이 호기심에 몇 발자국 다가가 고개 숙여 쳐다보며 물었다. 바닥에는 갈고리며 삐침이 이리저리 뒤섞여 글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뭇가지로 세로획과 삐침을 그리자 글자로 보였던 게 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것저것 쓰고 낙서하나 보네. 도동이 고개를 들자 정교랑이 나뭇가지를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바꾸어 계속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보였다. 낙서네, 낙서. 도동은 그렇게 확신했다. 왼손으로 글씨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씨, 아씨.”
앞쪽에서 손 관주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교랑과 도동이 소리 나는 곳을 쳐다봤다. 방 쪽으로 급히 달려가는 손 관주의 모습이 보였다.
“사부님, 여기예요.”
도동이 소리쳤다. 손 관주는 그제야 둘을 발견하고 급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어찌나 허둥대며 걸어오는지 부엌 문가에 서 있던 두 몸종은 그 모습에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난리 나셨네. 잠깐 안 보인다고 저리 허둥대는 꼴 좀 봐.”
한 몸종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바보 교랑 아씨가 없으면 현묘관도 끝장인걸. 저것 좀 봐. 다음 향불을 어디서 태울지도 교랑 아씨한테 물어볼 태세야.”
뜻밖에도 두 몸종의 추측이 적중했다.
“아씨, 이게 무슨 일이죠?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손 관주가 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들어 손 관주를 쳐다보면서도 손에 든 나뭇가지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음식 공양을 청하네요.”
“잊었어요?”
손 관주의 말에 정교랑이 물었다.
손 관주는 그 질문에 멍해져서 소녀의 무뚝뚝한 표정을 쳐다보다 곧 이성을 회복했다.
“그러니까, 그저께, 산 아래에서 행인들에게 공물을 나눠 준 일이요?”
손 관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 일 때문에?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