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8
교랑의경 58화
“그게 하나고, 또 하나가 있어요. 반근에게 고마워해야겠네요.”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 또다시 멍해졌던 손 관주는 그날 반근이 공물과 말린 과일을 한 바구니 가져갔던 일을 떠올렸다. 성 안에 있는 그 어르신께 갖다 드린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어르신은 비범한 신분 같았다. 선물을 받고 나서 반근의 체면을 챙겨 주고자 현묘관의 이름을 널리 알린 건가?
“하여간 똑똑한 사람들은 그렇다니까요. 그냥 주면 먹지를 못하고, 기어이 뭐라도 해야 마음을 놓죠.”
정교랑은 손에 든 나뭇가지로 꽃을 그리며 말했다. 손발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니 기분이 정말 좋네. 얼마 안 가 말도 편히 할 수 있겠지. 정교랑이 또다시 손을 바꾸어 몇 글자를 적는 모습을 보며 손 관주는 이내 깨달았다. 담담한 모습으로 눈앞에 앉아 있는 이 소녀의 마음속에 일고 있는 거대하고 맹렬한 기세는 잠재우기 힘들다는 것을.
반근에게 고마워하고 그 어르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면, 최종적으로 고맙단 인사를 받을 사람은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름을 크게 알리고 싶은지 조금 알리고 싶은지 물었다. 이름을 알리고 싶냐고 물은 게 아니었다. 이름을 알리는 정도는 아주 손쉬운 일이라는 듯이. 그러더니 과연 눈 깜짝할 새에 정말 이름을 널리 알리지 않았는가.
“아씨께 감사드립니다.”
손 관주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정교랑은 딱히 대꾸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며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내려놓았다.
“아씨, 그럼 음식을 다 썼으니 더 만들어야겠죠?”
손 관주가 무언가 생각난 듯 급히 물었다.
“도사님, 또 잊으셨네요. 여긴 도관이지 음식 장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정교랑이 손 관주를 보며 말했다. 손 관주는 끓어오르던 흥분을 가라앉혔다.
“물건은 흔치 않을수록 귀한 법입니다. 귀한 물건은 정교해야 중한 법이고요.”
정교랑은 그 말을 남기고 방 쪽으로 걸어갔다. 손 관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오랫동안 수행을 헛했군요.”
“그건 아닙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도사님은 당사자라 그렇습니다.”
손 관주는 부끄러운 마음을 담아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 정교랑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후에야 산에서 내려왔다. 올 때와 비교하자면 발걸음에 한결 여유가 있고 표정도 담담했다.
정교랑과 손 관주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후 정자 근처에는 도동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방금 사부와 저 바보 교랑 아씨가 무슨 얘길 한 거지? 둘이 얘기가 잘 통하는 것 같은데? 난 왜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
“사실 내가 바보였던 건가?”
도동이 중얼거렸다.
산 아래 도관에 모여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문 안으로 들어서는 관주를 쳐다봤다. 경건한 표정에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높이 뜬 가을 해의 햇빛이 손 관주의 몸으로 쏟아지자 눈이 부셨다. 이 낡은 도관마저 영험한 기운에 휩싸인 듯 보였다. 현묘관이 과연 다르긴 다르군.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와 같은 생각이 스쳤다.
나귀 마차에 탄 장 노태야는 떠들썩한 현묘관에서 시선을 거두고 마차 옆에 선 몸종을 쳐다봤다. 몸종은 슬픈 표정을 애써 억누르느라 몸까지 떨리고 있었다.
“반근, 우리와 함께 경성으로 가는 게 싫으냐?”
장 노태야의 물음에 몸종은 깜짝 놀란 듯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요. 노태야, 소인은 가고 싶어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 노태야는 껄껄 웃었다.
“그 말을 믿으면, 내가 바보게? 군자는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 가거라.”
장 노태야가 산 위의 태평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몸종은 태평궁을 바라봤다. 불과 한 달 남짓의 시간이었지만 이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도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불태워 버릴 때도 힘을 보탰고 새로 지을 때도 힘을 보탰다. 이곳에서 웃고, 울고, 겁먹고, 두려워하고, 흥분했던 시간들. 지금껏 산 17년보다 한 달 동안 더 많은 경험을 했다. 가벼운 맘으로 오가던 이 길이 지금은 한 걸음 내디디는 것도 이토록 힘든 길이 되다니. 지금 안 올라가면 다시는 못 볼 테고 그럼 아씨께서 얼마나 상심하실까. 그렇다고 올라가자니…….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인생에는 언제나 선택의 순간이 있다. 그래도 단 한 번쯤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눈 딱 감고 결정해도 되지 않을까. 몸종은 산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처음엔 느릿느릿 걷다가 차츰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층계를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갔다. 아씨, 아씨, 아씨.
두 몸종은 겁을 먹고 부엌에서 물러났다. 이 바보는 액운을 불러오기로 유명했으니 괜히 엮였다가는 재수가 없을 터였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여도사들이 시중을 드는 덕분에 두 몸종은 시늉만 해도 됐는데, 지금껏 둘을 본체만체하던 바보 교랑 아씨가 갑자기 부엌으로 들어오더니 밥 지을 준비를 하던 둘을 내쫓는 게 아닌가.
“아휴, 불을 함부로 갖고 놀면 못써요.”
둘 중 한 몸종이 부엌에 있는 소녀를 보며 소리쳤다. 겁도 나고 초조하기도 했다.
“원하는 게 뭔데요. 말하면 우리가 할게요.”
나머지 한 몸종도 거들었다. 정교랑은 몸을 돌리더니 손에 든 부지깽이로 둘을 겨누며 말했다.
“비켜.”
두 몸종은 기겁하며 소리치고 뛰쳐나왔다. 바보는 사람을 때린다고! 헐레벌떡 도망 나오던 둘은 문가에서 누군가와 퍽 하고 부딪쳤다. 두 몸종은 또다시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무슨 일이야? 아씨는? 뭔데 이래?”
몸종도 깜짝 놀라 소리쳤다. 두 몸종은 뛰어온 상대방을 멍하니 쳐다봤다.
“너, 누구야?”
두 몸종이 물었다.
“나 반근이야.”
몸종은 두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가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씨, 아씨, 반근이 돌아왔어요. 반근이 왔다고요.”
정교랑이 부엌 문가에 나타났다. 손에 여전히 부지깽이를 들고 있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반근.”
정교랑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반근을 쳐다보며 말했다.
“돌아왔구나.”
몸종은 눈물이 쏟아져 시야가 흐릿해졌지만, 아씨의 손에 들린 부지깽이는 또렷이 보였다. 부지깽이라니……. 아무도 챙겨 주는 사람이 없어 손수 밥을 지으시나? 몸종은 아예 대성통곡을 하며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정교랑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에라, 모르겠다. 정씨 가문 눈 밖에 나면 그만이지. 부모님이야 고생을 좀 하겠지만 언제는 뭐 고생 안 했나. 이제 그런 거 모르겠고 아씨의 시중이나 들을래.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때리든 욕하든 팔아 버리든 마음대로 하라지. 어쨌든 지금은 여기 있을래.
그 광경을 목격한 두 몸종은 어리둥절했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도동 역시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울지 마, 귀찮게.”
정교랑이 말했다. 몸종은 얼른 손으로 입을 막으며 눈물을 닦았다.
“아씨, 아씨. 뭐 드시고 싶으세요. 제가 할게요.”
몸종이 일어나며 말하자 정교랑이 손에 든 부지깽이로 몸종을 막으며 말했다.
“넌 거기 서서, 보고 있어.”
몸종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정교랑을 바라봤다.
“서서, 날 봐.”
정교랑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웃잖아. 아씨는 웃는 일이 드문데, 기분이 좋단 뜻이네.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은 뒤돌아 부엌으로 들어갔다.
현묘관에서 키운 조롱박은 껍질을 벗기고 씨를 빼낸 다음 잘라 놓았다. 찹쌀 반죽도 딱 알맞게 익었다. 썰어 놓은 조롱박을 달군 기름 솥에 넣자 촤르르 소리가 났다. 부뚜막 다른 한쪽에서는 밥이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와 기름 섞인 연기, 튀김 소리가 부엌에 혼잡하게 뒤섞였다.
얼마 안 가 요리 하나와 밥 한 그릇, 찹쌀떡 한 접시가 놓였다. 몸종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가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집중해서 지켜봤다. 정교랑이 음식을 쟁반에 담아 들고 나왔다.
“다 됐다, 밥 먹어도 되겠어.”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걸 어쩐담. 딱 내 몫만 했네. 넌, 그냥 보고 있어야겠다.”
몸종은 눈물을 거두고 웃음을 지었다.
“아씨.”
몸종이 투덜거렸다.
“또 절 놀리시네요.”
방문이 닫히면서 밖에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을 가렸다. 두 몸종은 놀란 마음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아 정신을 못 차린 표정이었다.
“바보가 밥도 할 줄 알아?”
두 몸종이 멍하니 서서 말했다. 도동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사실 관주님이 저 바보 낭자에게 왜 그리 공손한 건지 이해가 안 갔다. 그저 정씨 댁의 돈을 받아서? 아니,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관주님이 그런 이유로 그리 공손했을 린 없어. 이 아씨는, 바보가, 아니었다! 바보가 아니었어!
몸종은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앞에 있는 여인이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벌써 아주 오랫동안 못 봤다는 듯이. 몸종은 자신이 어디 갔었는지 말하지 않았고 정교랑 역시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마주 앉아 있었다.
정교랑은 과연 조금도 남기지 않고 밥그릇을 싹 비운 다음에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몸종이 일어나 밥상을 치우려고 하자 정교랑이 손을 들어 막으며 말했다.
“반근, 앉아서, 날 봐.”
몸종은 멈칫하며 정교랑이 그릇과 젓가락을 쟁반에 담고 일어나 들고 방문을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문밖에 있던 두 몸종은 무섭고 두려운 눈치였다. 자신들이 왜 무섭고 두려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불안이 두 몸종에게 말하고 있었다. 집에 있는 다른 아씨를 대하듯 이 아씨를 대해야 한다고.
“아씨, 저희가, 할게요.”
두 몸종이 손을 뻗으며 쟁반을 받았다. 정교랑이 둘에게 쟁반을 건네자 두 몸종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부엌으로 들고 가 설거지를 했다. 정교랑은 문가에서 고개를 돌려 몸종을 쳐다보며 물었다.
“반근, 똑똑히 봤으니 알겠지?”
몸종은 영문을 모르겠는 눈빛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반근, 난 이제 혼자 스스로 챙길 수 있어. 넌, 걱정 말고 가.”
정교랑이 말했다. 몸종은 순간 왈칵 눈물이 나왔다.
“아씨, 싫어요. 아씨, 저 안 갈래요.”
반근은 무릎을 꿇은 채로 다가와 흐느껴 울었다.
“넌 가야 해.”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보며 흐느꼈다.
“울지 마. 지금은, 내 말대로 해. 내 말대로, 해.”
정교랑이 말했다. 몸종은 순간 비바람이 불던 그날 밤 일을 떠올랐다.
긴말하지 마, 시간이 없어. 곧 바람이 불 거야. 지금은, 내 말대로 해. 넌 생각할 필요 없고 묻지도 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기억했다가, 그대로만 하면 돼. 말이든 행동이든 그 어떤 단계에서도 착오가 있어선 안 돼.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정교랑을 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 내가 말했지. 밥을 하는 건 작은 도(道)고 잔재주일 뿐이라고. 마음을 쓰기만 하면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만들 수 있고, 넌 이제 그걸 배웠어. 그러니까, 넌 가도 돼. 가서 세상을 바꿔.”
몸종은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그 말을 잊지는 않았다. 내 말대로 해, 묻지 말고.
“이건 널 위한 일이고, 날 위한 일이기도 해. 너와 나 모두에게 좋은 일인데, 우리가, 왜 포기를 해?”
정교랑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는 몸종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네 가족을 버리고, 네 목숨을 걸고 날 보러 왔어. 내가, 당연히 갚아야지. 더 좋은 가족과 목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