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83
교랑의경 583화
하늘빛이 밝아질 무렵, 진소가 아침상이 차려진 대청으로 걸어 나왔다.
“정 낭자한테 안 가보시려고요?”
진소 부인이 물었다.
“난 안 가도 될 듯싶소.”
진소가 천천히 밥을 먹으면서 잠시 멈칫하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예단은 잘 신경 써주시오.”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죠.”
진소 부인이 진소에게 어떤 예단을 준비할지 말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사환 하나가 잰걸음으로 들어오더니 진소에게 무언가를 나지막이 전했다. 진소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환은 예를 표하고 곧바로 물러났다.
식사를 마친 진소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예단은 급할 거 없소.”
깜짝 놀란 진소 부인이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을 살짝 떨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정 낭자에게는 별의별 일이 다 생기고, 너무 예상 밖의 일들이 일어나서 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해.
진안 군왕이 정 낭자와의 혼인을 청하고, 폐하와 태후 모두 그 혼사에 동의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제발 이번에는 아무 일 없이 순조롭게 혼사를 치르게 해 달라고 속으로 얼마나 부처님을 찾았는지.
하지만 매번 아무 일 없게 해 달라고 빌더라도, 또 되묻게 돼. 이번에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을까? 정말로?
그러니 이번에도 결국······.
사실 이번에도 결국 무슨 일이 나고 말았다고 차라리 마음을 놓아야 할지, 아니면 이런 생각을 하는 내 입을 한 대 때려야 할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오. 다만, 어제 안비가 황자를 잃었소.”
진소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안비가 황자를 잃었다고?
“잃다니요?”
진소 부인이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황제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안비의 황자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경성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황제가 아끼는 만큼, 태아가 무사할 수 있도록 애지중지 보호했을 텐데, 어쩌다가 잃은 거지?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소. 별로 놀랄 일도 아니오.”
진소가 말했다.
안 그래도 황제는 자식을 보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순산했다 하더라도 무탈하게 자란 아이는 평왕 하나밖에 없었다.
황제에게는 자식을 잃은 것이 중요한 일이었겠지만, 조정 대신들에게는 그다지 큰일이 아니었다. 조정 대신들은 황제가 잃은 자식이 몇 명이 됐든, 황위를 이을 황자는 단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진소 부인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게 정 낭자와는 무슨 상관이죠?”
진소 부인이 묻자,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상관이냐니?”
진소가 반문했다. 진소 부인이 멈칫했다가 이내 웃음을 보였다.
하긴, 그게 정 낭자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가 너무 긴장했나 봐요. 난 또 정 낭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서.”
진소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차를 한 입 마셨다.
“그래도 영향을 받긴 하겠지. 폐하의 심기가 불편하시다 보니, 이 혼사는 미뤄질 수도 있겠소.”
진소 부인은 그건 별일 아니라는 듯 잠시 진소와 담소를 나누었다.
평온한 진 상공의 저택과는 달리, 고능준의 거처는 난리가 났다.
대청 안에 놓여 있던 밥상이 엎어지고, 접시와 음식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벌써 산산조각이 난 찻잔과 그릇들이 바닥에 흐트러져 있었다.
“왜 그걸 이제야 알리는 게야!”
고능준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매섭게 소리쳤다. 그 앞에 있던 사환과 식객이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었다.
“대인, 원래 이 일은 마마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조용히 입을 열던 사환은 그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고능준에게 따귀를 호되게 맞고 말았다. 이마에 핏대가 선 고능준이 바닥에 고꾸라진 사환을 향해 고함을 쳤다.
“원래는 마마와 관련이 없었다고? 그런데 지금 궁에 갇힌 사람이 누구더냐!”
태후궁.
하룻밤이 지났지만, 태후궁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맴돌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짓눌렀다.
두 궁녀가 조심스럽게 태후를 부축하고, 다른 궁녀가 무릎을 꿇은 채 태후에게 죽을 떠먹여 주었다. 그러나 태후는 몇 입 넘기지도 못하고 손을 휘휘 저으며 먹지 않겠다고 했다.
“마마, 어제 점심때부터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사옵니다. 뭐라도 좀 드셔야 하옵니다.”
궁녀들이 울면서 태후를 달랬다.
“못 넘기겠다. 지금 어떻게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느냐.”
태후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궁녀들이 태후를 달래는 동안, 황후가 태후궁 안으로 들어왔다.
“황상은?”
태후가 황후의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
“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어제 통 침수에 못 드시긴 하였으나, 밤새 신첩과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기분도 많이 나아지셨고요. 조금 전에는 안비를 보러 그리로 가셨습니다.”
황후가 궁녀가 손에 쥐고 있던 태후의 죽을 건네받았다.
“그래, 가야지, 가 봐야지. 어제 황상이 그렇게 떠나고 나서, 안비가 울며 죽겠다고 난리를 치는데, 그 속이 말이 아니었을 게다. 황제가 갔으니 다행이구나. 갔으니 다행이야. 애가는 황제가 그리 무정한 사람이 아닐 줄 알고 있었다.”
태후가 울면서 말했다.
“마마, 폐하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데요. 마마께서 그것을 모를 리 없지 않으십니까. 폐하께서 워낙 마음이 약하시다 보니, 속상해하시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자리를 피하신 게지요.”
황후의 말에 태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역시 황후가 황상을 제일 잘 아는구나.”
태후가 황후를 쳐다보았다.
황후의 미모는 본래 빼어나지 않은 편이었다. 게다가 수년간 사람을 만나지 않고 병상에만 누워 있던지라, 그 모습이 더욱 야위고 수척해 보였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황후의 창백한 얼굴은 더욱 초췌해졌다.
“경영(景榮), 몸이 이제 막 나아지기 시작했을 텐데, 갑자기 이런 일을 겪고 밤까지 지새우면 쓰나. 그 몸으로 어떻게 버티려고.”
태후가 하염없이 울면서 황후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 황후가 미소 띤 얼굴로 죽을 한 숟가락 떠서 조심스럽게 태후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니 마마께서 더욱 기운을 차리셔야 합니다.”
황후가 직접 태후를 위로하니, 태후는 금세 죽을 비우고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정오가 지나고 황제가 태후궁에 도착했을 때는, 태후는 황제를 향해 탁자를 세게 내리칠 정도로 기운을 회복했다.
“누가 감히 그 애를 가둬 두라고 했소! 뭣 하러 그 애를 가뒀느냔 말이오!”
태후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우연히 일어난 사고였소. 그 자리에서 사고를 목격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지금 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 게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황제가 태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누가 자리에 있었느냐? 무엇을 보았지?”
황제가 불쑥 물었다.
전각 안에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두 내시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희가 곁에 있었습니다. 태후마마께서 안비마마를 거처에 잘 모셔다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
황제가 물었다. 겁에 질린 두 내시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태후를 쳐다보았다.
“어서 말하거라!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될······.”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치려던 찰나, 황제가 태후의 말을 끊었다.
“마마, 저들에게 마마께서 듣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저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던 것을 말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황제의 말을 들은 태후는 흠칫 놀랐다가 곧 격노하였다.
“황상, 지금 그 말은 무슨 뜻······.”
태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후가 기침을 하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마마, 폐하!”
두 내시가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들의 외침이 태후의 목소리를 덮었다.
“소인들이 본 바로는, 귀비마마와 안비마마께서 처음엔 대화를 잘 나누시다가, 층계를 내려갈 때 잠시 다툼이 있으셨습니다. 그 뒤 귀비마마께서 안비마마를 살짝 밀치셨는데······.”
태후가 경악하면서 소리쳤다.
“허튼소리! 네 이놈들!”
태후는 황제를 질책하는 것도 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시들을 향해 삿대질했다.
“마마, 소인들이 어찌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소인들이 어찌 감히요.”
내시들이 이마를 바닥에 쿵쿵 찧으며 말했다. 태후는 순간적으로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곧 눈이 뒤집히면서 혼절했다.
전각 내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고 밤낮으로 바빴던 태의국에 또 한 번 소란이 일었다. 태의 몇 명이 서둘러 태후궁으로 향하자, 이제야 안비의 궁에서 돌아온 이 태의가 길을 비켜섰다.
“태후께서는 괜찮으신가?”
“괜찮으시네. 갑작스러운 근심과 걱정에 화병까지 도져 쓰러지셨을 뿐이지.”
“지금 갑자기 화병이 났다고? 조금 늦은 감이 있지 않나?”
“안비의 황자 때문이 아니라, 귀비 때문인 듯하네만.”
태의들이 조용히 수군거렸다. 이 태의가 회랑 아래에 잠시 서 있다가 태의국의 곁채로 걸음을 옮겼다.
이 태의가 문을 열자, 곁채 안에 서 있던 태의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이 태의인 것을 알아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이 대인, 안비마마의 맥상(脈象)은 괜찮으시지요?”
이 태의가 안으로 들어섰다.
“안비마마의 맥상이 어떠한지는 오 대인이 제일 잘 알잖소.”
이 태의가 천천히 말끝을 늘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오 태의가 웃었다.
“그럼 다행입니다. 제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요.”
이 태의는 잠시 오 태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 대인.”
오 태의가 고개를 들고 이 태의를 보면서 웃었다.
“이 대인, 분부하실 일이라도?”
이 태의가 한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숨길 생각조차 없는 거요?”
오 태의가 흠칫 놀랐다가 이 태의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약상자 밖으로 삐져나온 혈흔이 묻은 면포 조각이었다.
오 태의는 웃으면서 면포를 약상자 안으로 마저 쑤셔 넣었다.
“귀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대인. 역시 누군가의 말처럼, 이 대인께서는 우리 사람이시군요.”
이 태의는 오 태의를 쳐다보면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오 태의의 약상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오 태의의 약상자는 다른 태의들이 쓰는 것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유심히 보다 보면 그의 것이 다른 태의들의 것보다 더 넓고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성 오씨 가문에 사산한 태아를 키우는 능력도 있었군.”
이 태의가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오 태의는 이 태의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대답할 뿐이었다.
“보잘것없는 재주일 뿐입니다. 자랑할 게 못 되지요.”
오 태의가 두 손을 한 번 비비고는 약상자를 어깨에 멨다.
“이 대인께서도 쉬셔야지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 태의가 이 태의의 옆을 지나치면서 약상자를 가볍게 두드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직 처리할 게 남아서요.”
“오신(吳訊)!”
이 태의가 갑자기 흥분해서는 자신을 지나쳐 가려던 오 태의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며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그 누군가가, 정말로 이 몸이 이 일을 발설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던가?”
이 일을 발설한다고?
안비가 품고 있었던 것은 애초에 황자가 아니었으며, 진작 죽은 태아였다고.
어제 안비가 낳은, 태아의 형상을 띄었다는 그 사태가, 실은 오 태의와 의녀가 밖에서 구해 온 고깃덩이에 불과했다고, 그리고 그 고깃덩이가 지금 오 태의의 약 상자 안에 있다고.
이 일의 진상을 발설한다?
오 태의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이 태의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이 대인께서 이 일을 발설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이 대인께서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분이잖습니까.”
오 태의가 읊조리듯이 이 대인의 말에 대꾸했다.
이 일을 발설하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될까. 그럼 내가 그자들과 다를 바가 있을까.
이 태의의 손에 서서히 힘이 빠졌다.
오 태의가 웃으면서 공손히 예를 표한 뒤, 걸음을 옮기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대인, 혹시 알고 계십니까? 어쩔 땐 사람을 해칠 줄 모르는 게, 사람을 해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대인, 아직도 약을 먹으면서 살아야 하는 군왕을 생각하고, 이황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태의가 오 태의를 잠시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를 잡았던 손을 툭 하고 떨구었다.
그런 거였어? 사실 나도, 그 아이들을 해친 공범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