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01
교랑의경 601화
천둥소리가 지나가고, 바람이 잦아들고 비가 멎을 때쯤, 황궁에 있던 태후도 보고를 받았다.
“애가는 그럴 줄 알았다. 평왕은 절대로 천벌을 받은 게 아니야.”
“예, 마마. 허수아비 주위로 네다섯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이 바닥에 엎드렸더니 번개가 딱 허수아비에만 내리꽂혔습니다. 벼락에 맞는 건 단순히 누가 더 높이 있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밝혀졌고, 전하께서 변을 당하신 것 또한 사고라는 게 증명되었습니다.”
내시의 말을 들은 태후가 눈물을 훔쳤다.
“정말 잘됐구나, 참으로 다행이야. 역시 사고였어, 사고.”
태후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멈칫했다.
잘됐어? 다행이라고? 다행이긴, 이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내 손자가 죽은 건 똑같잖아! 어떻게 죽었든 간에, 죽었다는 건 매한가지야!
태후가 통곡하면서 소리쳤다.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일꼬.”
태후가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울부짖자, 주위의 내시들과 궁녀들이 서둘러 태후를 토닥였다.
“마마, 봉체(鳳體: 태후, 황후 등의 몸에 대한 존칭)를 보존하시옵소서. 이제 마마께서 감당하셔야 할 무거운 짐이 많습니다.”
내시들이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황제가 위독하여 나라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보니, 태후는 마음껏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다. 그 생각에 더욱 서러워진 태후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아이고, 가엾은 우리 아가.”
내시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태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마, 이 소식을 황후마마께도 알리는 게 어떠실지요?”
황후?
태후가 울음을 멈추고 물었다.
“황후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시고, 계속 폐하의 곁을 지키고 계십니다.”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태후가 탁자에 기댄 채 잠시 침묵했다. 고능준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태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평왕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이 이 궁 안에 몇이나 있다고. 마음 쓰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알게 될 터이니, 마음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 굳이 가서 알릴 필요 없느니라.”
평왕이 사고로 죽고, 황제가 쓰러지면서 황궁 안 분위기는 침울해졌다.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린 거친 생각들이 황궁 곳곳에 넘실거렸다.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제자리로 돌아갔다.
“귀비는 어떠하더냐?”
태후가 다시 물었다.
“귀비마마께서는 여전하십니다. 약을 드시고 나면 잠드셔서 난동을 부리진 않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평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귀비는 광증이 도졌다. 증세가 심각해진 귀비가 울고불고하며 난리를 치고 쉼 없이 소름 끼치는 말들을 해대는 통에, 태후는 어쩔 수 없이 귀비에게 약을 먹여야 했다.
태후는 늘 밝은 모습으로 자신과 담소를 나누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던 귀비를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지금의 귀비를 생각해 보니, 한탄스럽기 이를 데가 없었다.
모든 게 다 한순간이로구나. 이 무슨 고생인고.
또다시 울컥해진 태후가 눈을 감던 찰나, 문밖의 내시가 소식을 알렸다.
“마마, 제국(齊國)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제국’은 고능준 부인의 봉호다. 지금 고능준의 관직으로는 황제 곁을 지키는 당직을 설 자격이 되지 못해 부인을 대신 보낸 것이었다.
제국 부인은 천자로부터 봉호를 받은 부인이자 외척이기도 하니, 이러한 때에 태후의 병문안을 오는 것은 몹시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조정 중신들은 제국 부인이 고능준을 대신해 입궁한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강경하게 고능준을 막는 것도 곤란하다고 생각되어, 제국 부인의 입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눈감아주기로 했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하러 온 건지 모르겠네. 애가는 울고 싶어도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한다니!
태후가 탁자를 손으로 짚어 자세를 고쳐 앉고는 이를 악물고 침상을 두어 번 내리쳤다.
그렇다 한들, 또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손자를 잃고 아들까지 쓰러진 마당에, 이대로 아들이 일군 강산마저 쇠락하게 둘 수는 없느니. 절대로,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
“들라 하라.”
황제의 침궁 문이 열리자, 누군가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 마마.”
내시가 허둥대며 황후를 부르자, 침상 옆에 앉아있던 황후가 고개를 홱 돌렸다. 황후가 눈썹을 치켜뜨며 내시를 흘겨보고는 휘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시가 서둘러 황후 가까이에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마마, 정말로 정 낭자가, 조금 전에 금수원에서 번개를 불러왔다고 합니다.”
내시의 목소리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황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다행이구나.”
같은 소식을 들은 황후와 태후는 분명 같은 말을 뱉었지만, 두 사람이 뱉은 말의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본궁은 정 낭자가 분명 무사할 줄 알았다.”
황후가 이어서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정 낭자는 신선의 제자가 아닙니까.”
내시가 대꾸했다.
“정말로 신선의 제자였다면, 오늘 같은 일을 겪을 필요가 있겠느냐?”
황후가 고개를 젓고는 몸을 돌려 휘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얇은 휘장 너머로 침상에 가만히 누워 있는 남자가 보였다.
건재할 때는 별 소용 없어 보이더니, 쓰러지고 나서야 쓸모가 생겼네.
저렇게 겨우 숨만 붙은 상태로 누워 있으니, 나는 안심하고 저 남자가 죽는 날만 기다리면 되겠지. 이제 보니, 내가 제명에 못 죽을까 봐 불안해했던 나날들이 참······.
“마마.”
다른 내시가 불안에 떨며 침궁 안으로 들어왔다.
“제국 부인께서 또 오셨다고 합니다.”
황후가 고개를 돌리고 내시를 쳐다보았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더냐?”
내시가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황후에게 속삭였다.
이야기를 들은 황후는 잠시 표정 없는 얼굴로 생각에 잠기더니,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웃음에는 비아냥과 같잖음이 잔뜩 서려 있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구나. 결국 또 그자의 손에 넘어가다니.”
바깥에서 뭐라 떠들어대든, 황궁 안에서 얼마나 많은 희비가 교차하든, 정씨 저택은 여전히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이건 저희 노야께서 보내신 명첩입니다.”
“저희 부인께서 아씨의 안부를 물으셨어요.”
두 시종이 선물을 건네며 정교랑을 향한 윗전들의 안부를 전했다.
“시기가 시기인 지라, 댁에 방문하기가 어려워 직접 오시진 못했습니다. 그래도 두 분께서는 늘 낭자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시녀가 감사 인사를 하면서 답례했다.
“진(陳) 상공 내외께서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씨께서는 잘 지내고 계세요.”
진씨 가문의 시종들은 긴말하지 않고 간략하게 예를 표한 뒤 곧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시녀는 지금 같은 시기에 진씨 가문의 사람이 정교랑의 저택에 방문하는 것은 꽤 불편한 일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인을 보내 안부를 묻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짧은 안부 인사 하나만으로도, 내일쯤이면 어사대에 진소를 탄핵하는 상소문이 쌓일 터였다.
진씨 가문의 마차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문 앞을 떠나자, 누군가가 급하게 문 앞으로 달려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진 공자님?”
시녀가 놀란 기색으로 불렀다. 진호가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너희 아씨를 볼 수 있겠느냐?”
시녀가 진호를 쳐다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지금 같은 시기에, 공자님은 무섭지도 않으세요?”
진호가 피식 웃었다.
“나야 아직 관직 임용도 못 받은 신분이잖느냐. 상공 대인도 아닌데, 무서울 게 뭐 있다고.”
진호가 문가에서 걸음을 옮기지 않고 그대로 서서 공손히 말했다.
“낭자에게 내가 왔다고 알려 주게.”
“알리긴 뭘 알려? 십삼, 왜 또 괜히 모양새 잡는 거야?”
문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핀잔에 진호가 고개를 들자, 목소리의 주인공인 주복이 거들먹거리며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왔으면 그냥 들어오면 될 것이지. 가마라도 대령해 안으로 모셔다드리리?”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진호는 주복의 말에 장난스럽게 대꾸하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문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날 이후로, 내가 낭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 그래.”
“진 공자.”
어두운 밤하늘 아래, 여인의 눈빛에서는 놀라움이나 기쁨 같은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진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당신, 입니까?”
하지만 이 말을 내뱉은 순간, 여인의 표정이 일순간 암담해진 것을 보고 진호는 조금 전 자신이 본 여인의 눈빛이 진짜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진호는 늘 정교랑이 자기 앞에서 다른 표정을 짓기를 기대했지만, 그 표정을 그 순간에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교랑의 눈빛에서 살짝 스쳤던 놀라움과 기쁨은 진호의 뇌리에서 한 번, 또 한 번 떠오를 때마다 날카로운 칼이 되어 심장을 찌르는 고통을 안겼다.
아냐, 칼이 된 건 내 말이야. 내 말이 낭자의 마음을 찔렀을 거야.
진호의 주먹 위로 힘줄이 툭 불거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주복이 진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반근한테 듣기로는 네가 그날 궁문 앞에서 저 여인을 기다리고 있다가, 두, 둘이서······.”
“내가 낭자를 의심했어.”
진호가 주복을 쳐다보면서 그의 말을 끊었다. 주복은 멈칫했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난 또,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저 여인을 의심하는 게 네놈 하나도 아니잖아.”
주복이 입술을 삐죽이면서 턱으로 황궁을 가리켰다.
“저 여인을 의심하는 사람이라면, 저곳에만 해도 수두룩할 거다. 의심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내는 게 더 힘들걸? 그리고 나도, 내 아버지도, 그리고 범강림도 속으로는 똑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그래도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러면 안 됐어.”
진호가 대답했다. 주복이 진호를 보면서 웃음을 터트리고는 주먹으로 진호를 밀쳤다.
“그래서 오늘 찾아온 이유가 뭐야. 저 여인이 넓은 아량으로 너를 용서해 주길 바라서? 그렇게 네 마음이 편해지자고?”
주복의 얼굴에서 차츰 웃음기가 걷혔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진십삼, 네가 남들보다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길래 그렇게 말하는 거지? 그리고 왜 네가 남과 다르다고 생각해? 네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뭐고, 그래서 너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데?”
주복의 말이 맞아. 나는 낭자에게 사과하러 온 게 맞나?
아니, 사과할 건 또 뭐야? 이미 할 말 다 해놓고, 굳이 또 찾아오는 건 낭자에게 넓은 아량을 베풀라고 강요하는 것밖에 더 돼?
진호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세게 내리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내가 낭자를 너무 업신여겼어.”
진호가 주복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하고는 곧장 말을 타고 떠났다.
옆에서 가만히 서 있던 시녀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진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주복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 공자님, 가서 아씨께 알, 알려야 할까요? 아마 지금쯤이면 아씨께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셨을 텐데.”
시녀가 안쪽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관둬라. 괜히 저런 한가한 사람들 상대해 줄 필요 없어.”
주복이 몸을 홱 돌리고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어 걸음 걸었을까, 갑자기 주복의 등 뒤에서 급하게 멈추는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주복은 벌써 말에서 내려 성큼성큼 걸어온 진호와 마주쳤다. 진호의 뒤에는 급보를 알리기 위해 말을 타고 온 사환 하나가 있었다.
“공자님, 공자님, 뭐 하시는 겁니까. 노야께서 속히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사환이 다급하게 진호에게 소리쳤다. 진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당을 가로질러 안쪽으로 걸어갔다.
“어이, 어이! 아직 널 볼지 안 볼지 물어보지도 않았단 말이야!”
주복이 소리쳤지만, 진호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