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02
교랑의경 602화
정교랑은 회랑 아래에 서서 황씨와 몸종이 마당에서 소보아를 데리고 노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럽게 진호가 들이닥치자, 황씨는 재빨리 사람들을 데리고 안으로 자리를 비켜 주려고 했다.
“올케, 그러지 않아도 돼요. 여기서 놀고 있어요. 우리가 들어가서 이야기 나눌게요.”
정교랑이 황씨에게 말하고는 진호를 향해 안으로 들라는 손짓을 했다. 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딱 한 마디만 하고 가면 되거든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를 띠고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낭자를 다시 보게 됐을 때 어떤 모습일지 몇 번이고 상상해 봤지만, 딱히 평소와 다를 게 없네.
내가 내려놓을 수 있다면, 낭자도 내려놓을 수 있고, 내가 따지지 않는다면, 낭자 또한 따지지 않아. 군자와 교우하는 게 이리도 쉬운 것이었다니.
진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다가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
“태후가 경왕을 궁으로 데려갔습니다.”
진호의 뒤를 따라오던 주복이 놀란 표정으로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경왕!
정교랑이 아, 하고는 마당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호가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가자, 마당에서 풍차를 손에 쥔 채 황씨와 시녀들과 꼬리잡기 놀이를 하면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소보아가 보였다.
한없이 약한 어린아이는 덥고 추운 것도 구분하지 못하고, 슬픔과 기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가장 천진난만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경왕부 안은 몹시 소란스러웠다. 끊임없이 밖으로 옮겨지는 크고 작은 상자들이 마차 한 대를 금방 채웠다.
“전하, 이런 것들은 챙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품계 높은 내시가 웃으면서 진안 군왕에게 말했지만, 진안 군왕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다 경왕이 쓰던 것들이네. 마음대로 바꿨다가는 경왕이 난리를 칠 것이야.”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보자, 내시 몇 명이 경왕을 어르고 달래면서 간신히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경왕은 놀고 있던 차에 갑자기 끌려 나온 것이 몹시 불만인지 이리저리 팔을 흔들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육가아, 우리 궁에 들어가서 함께 마마를 뵙자. 거기 가서 계속 놀면 돼. 이 형님이 같이 놀아 줄게.”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경왕의 손을 잡고 다독였다. 그러나 진안 군왕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경왕은 여전히 심통 가득한 얼굴로 옹알이를 하면서 그의 손을 뿌리쳤다.
품계가 높아 보이는 내시가 웃으면서 경왕을 마차에 태웠다. 진안 군왕이 경왕을 따라 마차에 올라타려던 찰나, 내시가 갑자기 진안 군왕의 앞을 조심스럽게 가로막았다.
“전하, 직접 바래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인들이 경왕 전하를 잘 모시고 가겠습니다.”
내시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진안 군왕이 멈칫하고는 내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내시가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태후마마께서는 경왕 전하를 모시고 입궁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종친이 지금 같은 시기에 태후마마의 전갈 없이 입궁하기는 어렵사옵니다.”
그렇구나.
진안 군왕이 마차를 짚었던 손을 천천히 내리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황궁의 마차가 서서히 멀어져 갔지만, 진안 군왕은 제자리에 서서 요지부동이었다. 경왕부 근처에서 이 장면을 몰래 지켜보던 눈길들이 진안 군왕에게 집중되었다.
“전하,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진안 군왕 곁에 있던 내시가 조용히 속삭였다. 진안 군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리고 천천히 왕부 안으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자, 마당에 서 있던 진안 군왕은 또 넋이 나간 모습으로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왕부의 절반이 텅 빈 느낌이구나.”
진안 군왕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실상은 겨우 사람 일곱이 없어진 것뿐인데.
진안 군왕이 대부분의 시간을 경왕과 함께 보내며 그를 보살핀 덕에, 경왕의 시중을 드는 내시는 여섯 명뿐이었다. 그 여섯 명의 내시들은 경왕과 함께 자연스레 궁으로 돌아갔다.
내시가 진안 군왕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전하, 지금도 좋지 않습니까.”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도 나쁘지 않지.”
사실, 오늘만을 기다려오지 않았는가.
“아직 적응이 안 돼서.”
진안 군왕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경왕과 함께 보낸 시간은 족히 십여 년은 되었고, 특히 최근 삼 년 동안은 더욱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삼 년 동안 경왕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로 자랐고, 진안 군왕은 그런 경왕의 곁을 지키며 유모처럼 그를 살뜰히 챙기고 보살폈다.
“전하, 이제 적응하셔야지요. 지금 이 순간부터 경왕은 더 이상 어린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하셔야 할 일이 아이를 세심하게 보살피는 유모의 역할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궁녀와 내시들이 알아서 잘할 것이고, 전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은 더 큰, 그리고 더 중요한 일입니다. 전하께서 경왕에게 하셨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얼른 적응해야지. 육가아가 경왕이 됐던 그때처럼. 아무도 육가아가 그런 모습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적응해야만 했던 것처럼.
이제야 좀 적응됐다 싶었던 경왕이 어느새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되더라도, 나는 그 모습에 다시 적응해야만 한다.
경왕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그 아이는 항상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육가아니까.
“육가아, 형님이 네게 천하를 쥐여준다고 했었지.”
진안 군왕이 천천히 손을 앞으로 내밀고 주먹을 쥐었다.
“이건 너의 천하니라. 드디어 천하를 네 손에 쥐게 되었으니, 이 형님이 꼭 너의 천하를 지켜 주마.”
“태후가 경왕을 궁으로 다시 들였다고? 설마 경왕을 제위에 올리려는 건가?”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는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나 세수를 하고 죽을 한 그릇 먹은 뒤, 입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인,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비난받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어찌 됐든 경왕은 폐하의 유일한 혈통이니까요.”
막료가 말했다.
“하지만 경왕은 바보가 아닌가!”
진소가 손에 쥐고 있던 빈 그릇을 탁자 위로 던졌다.
“그럼 나중에 시호(諡號: 사람이 죽은 뒤 생전의 업적, 행동 및 품성에 의해 정해지는 호)를 혜(惠)로 해야 할까, 안(安)으로 해야 할까?”막료가 멈칫하고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안(安)으로 하지 않겠습니까?”
막료는 과거에 지능이 낮으나 제위에 올랐던 진안제(晋安帝)와 진혜제(晋惠帝) 중에 진안제가 더 바보라고 생각하여 대답했다. 진안제는 덥고 추운 것도 구분할 줄 모르고, 입이 있으나 말을 할 줄 모르니, 그런 점들이 더욱 경왕과 비슷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진소가 기가 찬다는 듯이 막료를 흘겨보았다.
“자네는 지금 그런 농담이 재밌다고 생각하는가?”
진소가 소매를 홱 털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료가 민망한 듯 웃으면서 서둘러 진소의 뒤를 쫓아갔다.
“대인, 재밌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이런 농담을 실행에 옮기려는 사람이 있으니 드리는 말입니다. 대인, 이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작은 일이 아니지.
황궁의 마차가 경왕부 앞에 멈춰 선 그 순간부터, 소식은 경성 전역에 퍼졌고 덕분에 경성이 발칵 뒤집혔어.
정교랑이 번개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긴 했지만, 그건 백성들에게 보여 주는 눈요깃거리에 불과했다. 조정 관리들에게 지금 이 순간 가장 긴박하고 중요한 문제는 앞으로의 국정 운영이었다.
황제의 병이 위중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유일한 황위 계승자였던 평왕까지 갑작스레 변을 당한 상황이었다. 옥좌는 단 하루도 비워 둘 수 없는 법, 군주가 누가 될 것인가에 따라 향후 왕조가 결정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앞길이 결정됐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바보가 어떻게 황제를 해?”
“뭐가 말도 안 돼? 바보가 왜 황제를 못 해? 전례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어허, 전례 얘기는 꺼내지도 마쇼. 그 시기에 나라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거요?”
“다들 알지, 다들 알아. 그런데 오늘날의 태자소부(太子少傅: 태자의 스승) 위관(衛瓘)이 누가 될지가 관건이지. 바보에게 넘어갈 옥좌가 아깝다는 말을, 술김에라도 할 수 있을 위인이 누굴지.”
“고능준은 태후가 수렴청정하기만을 바라겠군.”
주복이 말했다.
경성에 무슨 소식이 퍼지든 간에, 언제나 그랬듯 정씨 저택은 고요했다. 진호는 태후가 경왕을 데려갔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곧장 정씨 저택을 떠났다.
진호의 입장에서는 정교랑에게 이 사실을 알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 조당이 혼란에 빠지기도 했고, 황제가 위독한 데다 평왕까지 없어진 마당에 중신들의 관계도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진(秦)씨 가문은 진소만큼 중임을 맡고 있는 것도 아니고, 고능준의 가문을 능가할 정도로 세력이 막강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꽤 명망 있는 황족이었다. 따라서 진씨 가문의 일거수일투족은 조정 대신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정교랑은 아주 미묘한 위치에 있었다. 정교랑이 번개를 불러온 일은 평왕이 사고로 죽은 것이며, 천벌을 받아 죽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정 관리들은 정교랑이 번개를 불러온 이유가, 자신이 평왕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태후에게 증명해 보인 것에 불과함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을 증명했다고 뭐가 달라질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정교랑을 향한 의심의 씨앗이 심어졌다. 지금 당장은 평왕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대놓고 정교랑을 꺾으려 하진 않겠지만, 평왕이 황릉에 안장되고 태후의 수렴청정이 안정기에 접어들면 고능준이 뿌려둔 작은 의심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싹을 틔우고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나무가 될 터였다.
“이게 아씨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요! 아씨께서 그 사람들을 해친 것도 아니고, 아씨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인데, 어째서 아씨를······.”
반근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관련이 없어?”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고 반근에게 반문했다.
“평왕은 죄를 뉘우치다가 벼락에 맞았다. 평왕이 무릎을 꿇고 죄를 뉘우치게 된 이유는 귀비가 누군가의 모함에 빠졌기 때문이지. 잘 생각해 봐. 태후 입장에서는 귀비를 모함에 빠트린 사람이 안비일 거야. 그럼 안비는 무엇을 빌미로 귀비를 모함할 수 있었을까? 그야 당연히 안비가 당시 회임하고 있던 황자가 아니겠어? 그런데 안비가 어떻게 회임을 했지? 그건 바로 진안 군왕이 보낸 간식을 먹고 나서부터야.”
주복의 말을 들은 시녀와 반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 공자님도 말씀을 꽤 잘하시네요.”
시녀의 말에 주복이 눈썹을 치켜뜨고 시녀를 흘겨보았다.
“그, 그래도 아씨와는 관련이 없는걸요?”
반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주복이 콧방귀를 뀌고는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안 군왕의 간식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간식?
그날 진안 군왕이 경왕부에서 연회를 열어 아씨를 초대했고, 아씨께서는 칠현금으로 액막이를 해 주셨지. 그리고 진안 군왕은 아씨께서 알려 준 대로 간식을 새로 만들어 입궁하며 폐하께 그 간식을 드렸고, 폐하께선 또 그걸 안비에게······.
“아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그게 어떻게 우리 아씨 때문이라는 거예요? 순 억지잖아요!”
반근은 씩씩대며 눈을 부릅떴지만 주복은 콧방귀를 뀌었다.
“너희 여인네들은 그런 억지 잘 부리지 않느냐. 연달아 손자와 아들까지 잃게 된, 검은 머리카락 한 올 나지 않는 백발의 노파는 오죽할까? 태후는 언제나 그 위상이 드높고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어서 황제조차도 태후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다. 그런 여인이 이런 충격을 받고도 도리나 이치를 운운할 수 있을 것 같더냐?”
하긴, 한꺼번에 아들과 손자를 잃어 비통함과 분노에 휩싸인 노부인이라면, 절대로 도리나 이치 같은 걸 안중에 두지 않을 거야. 게다가 고씨 가문까지 합세해서 태후가 억지를 부리도록 부추기고 있으니.
“평왕만 없어지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태후가 있을 줄이야.”
시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평왕이 살아 있었을 때도, 아씨께서 혼사를 거절해 체면을 구기고 창피를 당했다는 이유로 태후는 화가 났다지만, 그 정도의 분노는 아씨께서 경성을 떠나신다면 끝날 일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아씨가 경성 밖으로 내쫓기는 정도에 그치지 않을 거야. 지금 태후에게 아씨의 존재는, 같은 하늘 아래서 숨쉬기조차 싫을 정도일 테지.
정말 끝도 없구나. 산 넘어 산이네.
방 안의 분위기가 점차 가라앉았다.
“아버지께서는 벌써 짐 정리를 하고 계신다. 사직서도 이미 작성해 두셨고.”
주복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어갔다.
“나도 곧 서북으로 돌아가야 해서, 아버지와 가족들을 섬주로 바래다줄 생각이야. 그러니까 교랑, 나와 같이 가자.”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진안 군왕과 혼사를 치를 생각은 그만 접어 둬.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됐잖아. 태후가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거야.”
주복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아니요. 혼사는 사소한 일이에요.”
정교랑이 문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을 덧붙였다.
“다만, 아직 내가 떠나는 걸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
작가의 말:
진혜제(晋惠帝) 사마충(司馬衷)과 진안제(晋患帝) 사마덕종(司馬德宗) 두 황제는 모두 지능이 낮으나 제위에 올랐던 황제들입니다.
진혜제 사마충은 진무제(晋武帝)의 정실 둘째 아들입니다. 적장자가 죽고 나서 자연스럽게 사마충이 태자에 책봉되었는데, 지능이 낮고 바보라는 이유로, 태자의 스승인 위관(衛瓘)은 술기운을 빌려 옥좌를 손으로 치면서 귀중한 옥좌가 아깝다는 말을 했습니다. 위관은 취하지 않았지만, 황제에게 사마충이 태자로 책봉되면 안 되고, 나아가 제위를 이어받으면 더더욱 안 된다는 충언을 한 일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