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03
교랑의경 603화
“설마 태후 쪽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주복이 몸을 반쯤 일으키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건 안심해. 태후 쪽 사람들은 아직 너를 건드릴 수 없을 거야. 우선 네가 번개를 불러온 일 때문에 네 명망이 더욱 높아졌고, 지금 그들은 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다. 그러니까, 네가 경성을 떠나기 가장 좋은 시기는 지금이야. 경성을 떠나 섬주로 가게 되면 아무래도 황궁과는 꽤 거리가 있을 테니, 그들이 무슨 짓을 벌이려 한다 해도 네가 경성에 있을 때만큼 쉽지는 않을 거다.”
정교랑이 웃으면서 주복을 쳐다보았다.
“아니에요. 내가 말한 사람은, 그들이 아니에요.”
그, 그럼 혹시 진안 군왕을 말하는 건가?
주복이 이를 부득 갈며 속으로 생각했지만, 차마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아마 내가 물으면, 곧이곧대로 그렇다고 대답하겠지? 난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전혀 듣고 싶지 않다고!
이때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이, 누이.”
범강림은 자리에 있는 주복을 신경 쓰지도 않고 곧바로 정교랑에게 말했다.
“궁에서 전갈이 왔어.”
궁에서?
주복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범강림의 뒤로 두 내시가 회랑 아래에 서 있었다.
“정 낭자, 황후마마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두 내시가 웃으면서 공손하게 예를 올린 뒤, 황궁의 전갈을 건넸다.
황후?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황후였어?
황후의 교지?
시녀가 내시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주복이 한발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
“신의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시기가 시기인지라 신이 먼저 교지를 확인해야겠습니다.”
평왕이 죽고 황제가 위독하니, 황궁의 대소사를 통치할 권력은 자연스레 태후가 도맡게 될 것이고, 그런 태후의 배후에는 고씨 가문이 있었다.
조정이 혼란한 시기에는 허위로 성지를 전달하는 일이 간혹 있기도 했고, 정교랑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어도 연약한 여인 하나에 불과했다. 게다가 황궁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정교랑이 황궁 안으로 들어가 무슨 사고를 당한다 해도 궁 밖의 사람들은 그저 멀뚱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시는 주복이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웃으며 손에 있던 교지를 그에게 건넸다.
주복이 교지를 받아 펼쳐 보니, 황후의 인장과 중서성의 서명날인이 보였다. 황후의 인장은 누군가가 몰래 가져다 쓸 수 있을지 몰라도, 중서문하성의 서명날인은 절대로 가짜일 리 없었다. 지금은 진소가 두 눈에 불을 켜고 중서문하성을 지키며 조정을 감시할 때라, 진소 측 사람이 중서문하성에 상주할 게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진소가 있는 한, 황궁의 태후나 고씨 가문이 함부로 황후를 빌미 삼아 허위 교지를 내려 정교랑을 음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주복이 교지를 접어서 다시 내시에게 건넸다. 교지를 받은 내시가 웃으며 주복을 향해 예를 표하고는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교랑은 벌써 몸을 일으켜 가만히 서 있었다.
“황후마마께서 무슨 일로 절 부르시죠?”
정교랑이 물었다.
“마마께서 낭자를 궁으로 모셔와, 진료를 청하고자 합니다.”
내시의 말을 들은 주복의 표정이 싹 변했다.
“풍질은 고칠 줄 모른다고 했을 텐데요. 이미 그날 말씀을 올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의 누이는 절대로 폐하께 거짓을 고하지 않습니다.”
주복이 곧바로 대답하자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내시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교랑이 앞으로 몇 걸음 내디디고 말했다.
“괜찮아요. 황후마마께서 부르셨으니, 소녀가 다녀와야죠.”
미쳤어?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너 미쳤어? 거길 왜 가!”
주복이 내시의 존재를 무시한 채 고함쳤다.
“오라버니, 마음 편히 가져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오라버니, 마음 편히 가져요.
정교랑이 주복의 소매 한쪽을 살짝 잡아끌자, 주복은 부드러운 깃털 한 개가 마음을 간지럽히는 듯한 느낌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는 입을 열어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하려던 말들이 목구멍에 걸려서 입술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내시가 정교랑의 말에 몹시 기뻐하면서 혹여나 정교랑이 다시 안 간다고 말을 번복할까 봐, 서둘러 예를 표하고 정교랑을 마차로 모셨다.
“낭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태후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황후가 중서문하성에 교지를 보내자마자, 태후는 바로 이 일을 알게 되었다.
“마마, 쫓아가서 막을까요?”
내시가 물었다.
“황후가 뭘 하려는 게야?”
태후가 손으로 미간을 짚은 채 물었다.
“황후마마께서는 정 낭자를 모셔와 폐하의 상태를 살피고자 하십니다. 폐하의 호흡이 계속 불안정하나, 태의들은 죄다 속수무책이라고만 한답니다. 당초 진안 군왕이 경왕에게 가져다준 탕약이 심신안정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고 하여, 정 낭자를 모셔와 폐하의 상태를 진단한 뒤 비슷한 탕약을 처방할 수 있을지 묻고자 하신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그래? 그 탕약의 효과가 탁월하다는 건 애가도 들어 봤다만.
“그런 거라면, 데려오라고 해야지.”
태후의 말에 다른 내시가 불안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마마, 아니 되옵니다. 황후께서는 분명 경왕이 입궁한 것을 보고, 마음이 급해져 폐하의 옥체가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
내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내시의 따귀를 후려쳤다.
“당장 이놈을 끌고 가서 쳐 죽여라!”
태후가 호통쳤다.
내시는 겁에 질린 채 무릎을 꿇고 목숨을 애원했지만, 주위의 내시들이 서둘러 그 내시의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한 여인의 목소리가 밖에서 전해져왔다.
“제국 부인, 오셨습니까.”
내시들이 태후궁 안으로 들어오는 여인을 보고 예를 표했다.
“마마, 왜 그러세요?”
제국 부인이 태후에게 물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 태후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주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황상이 하루빨리 쾌차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도 생기다니. 어찌 뚫린 입으로 그런 대역무도한 말을 할 수 있느냔 말이다.”
태후가 손으로 가슴을 내리치면서 한탄했다.
“황상은 나의 아들이니라. 애가가 이 몸으로 낳아 키운 귀한 아들이라고. 누가 애가더러 당장 황상과 목숨을 맞바꾸라고 한다면, 애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리할 것이야. 그런데 감히 애가 앞에서 그딴 말을 지껄여? 꼭 애가가, 황상이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황상의 옥체가 안 좋아지면, 애가는 얼마나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제국 부인이 태후를 따라 굵은 눈물을 뚝뚝 떨궜다.
“마마, 그러니까요. 어미의 마음은 다 똑같죠. 폐하께서 쾌차하실 수만 있다면, 마마께서도 마음 편히 하루하루를 즐기실 텐데, 어디 지금처럼 제대로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하고 마음 졸이며 하루하루를 보내시겠습니까.”
태후가 제국 부인의 손을 맞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부인이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하오나 마마, 궁에서는 아무나 어미가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모두가 저희처럼 폐하께 진심이지도 않을 테고요. 그러니 마마, 꼭 폐하의 침궁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하옵니다.”
태후가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봐라, 황상의 침전에 사람을 더 보내거라.”
아무리 금실 좋은 부부라 해도, 큰 재난 앞에서는 각자 뿔뿔이 흩어지기 일쑤지. 부부가 어디 피를 나눈 모자만큼 가까울쏘냐?
그리고 황후는 애초에 기댈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어. 지금은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다시 황후와 결판을 낼 것이야!
태후가 이를 악물었다. 내시들이 태후의 명령에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태후궁 밖으로 나갔다. 내시들이 모두 나가자, 제국 부인이 직접 차를 우려 태후에게 건넸다.
“사실 신첩은 폐하께서 깨어나시는 게 두렵기도 합니다.”
제국 부인의 말에 태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마마, 신첩은 폐하께서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걱정이옵니다. 평왕이 폐하의 눈앞에서······.”
제국 부인이 서둘러 말을 덧붙이고 눈물을 보이자 태후가 통곡했다.
“황제가 바로 그 일 때문에 분통이 터져 이 지경이 된 것 아니더냐.”
자기 아들이 눈앞에서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한 아버지보다 고통스러울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폐하께서 후손을 잇기 워낙 힘드셨다 보니, 궁에 있는 아이들을 진귀한 보물 대하듯 아끼시던 게 눈에 선합니다.”
제국 부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자,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이들 중 한 명이라도 열이 나거나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날에는, 아이 걱정에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적도 있었지. 살짝 스치거나 넘어져서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꼭 자기가 다친 것처럼 속상해했어.”
살짝 스치거나 넘어져도 그리 속상해했는데, 멀쩡하던 평왕이 자기 눈앞에서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본 황제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할지.
태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대성통곡했다.
“그래도 지금은 경왕이라도 있으니, 폐하의 혈통이 아예 끊겼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마마, 경왕을 꼭 잘 보살피셔야 합니다.”
제국 부인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경왕 이야기가 나오자, 태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물을 멈췄다.
“경왕은 잘 있느냐?”
태후가 묻자, 궁녀가 서둘러 대답했다.
“아주 잘 계십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뛰어노시다가, 지금은 잠드셨습니다.”
태후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시 한 명이 밖에서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마마께 아뢰옵니다. 정 낭자가 폐하의 진료를 마쳤습니다.”
“뭐라고 하더냐?”
태후가 물었다.
“정 낭자의 말로는 경왕이 마시는 탕약은 경왕의 병에 한한 것이오며, 폐하께는 들지 않는 약이라 하였습니다.”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그 여인, 귀신 농간을 할 때부터 알아봤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으니라고.”
태후가 이를 부득 갈면서 욕을 했다.
“마마, 그 여인을 불러 폐하의 병을 보게 하는 것부터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제국 부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태후가 고개를 돌려 제국 부인을 쳐다보자, 제국 부인이 말을 이었다.
“마마, 잊으셨습니까? 폐하께서 쓰러지시기 전에 정 낭자를 부른 이유는 그 죄를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깨어신다면, 아마 가장 먼저 손볼 사람은 바로 정 낭자지 않겠습니까?”
제국 부인이 태후궁 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태후가 흠칫 놀라고는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애초에 그 여인을 궁에 들인 것부터가 잘못이었어!”
“아닙니다, 마마. 정 낭자가 궁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면, 정 낭자에게 마마를 공격할 빌미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마마께서 폐하를 인자하지 않고 자상하지 않게 대하신다는 빌미요. 하지만 그 여인이 제 발로 궁에 들어온 이상, 이제 마마께서는 그 여인을 궁에 남겨 두실 수 있겠지요.”
제국 부인이 말했다. 태후가 멈칫하고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 재수 없는 것을 궁에 남겨서 뭐에 쓰려고? 황제를 해칠 수도 있는 사람이야.”
“정 낭자는 이미 폐하를 해쳤습니다. 다만 정 낭자가 해쳤다는 증거, 그리고 정 낭자를 벌할 수 있는 증거가 없을 뿐이지요. 이왕 황후가 정 낭자에게 폐하의 병을 봐 달라는 교지를 내렸으니, 정 낭자에게 좀 더 오래 폐하의 병을 봐 달라고 하면 될 일이잖습니까?”
제국 부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만에 하나 정 낭자가 궁에 있는 동안,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런데도 폐하의 병을 살피고 있던 정 낭자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땐 태후가 목청을 높여 그자들을 처단할 수 있을 것이다.
태후가 어두운 표정으로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