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04
교랑의경 604화
태후가 보낸 내시의 말을 들은 황후는 무표정으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궁에 남아 있어야 한다면, 태후마마께 소녀의 집에 서신 한 통만 보내 달라는 청을 올려도 될까요?”
정교랑이 먼저 입을 열자, 내시들이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혹시 정 낭자께서 더 필요하거나, 집에서 가져다드릴 물건이 있으실지요?”
내시 중 한 명이 세심하게 물었다.
“바깥의 물건을 어찌 감히 궁에 들이겠습니까. 소녀는 괜찮습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공.”
재미있는 여인일세.
제국 부인이 추측했던 것처럼 난리를 피우지도 않고, 조용하고 담담하게 명령에 따르다니. 아무리 신선의 제자라고 해도 황실이 무서운 건 매한가지인가 보군.
내시가 속으로 혀를 차고는 다른 내시들을 데리고 물러갔다.
황후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괜히 낭자만 곤란하게 만들었네. 본궁은 도저히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황후가 황제의 침전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폐하가 없으면, 본궁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 되네. 본궁은 진심으로 폐하께서 쾌차하시길 바라는 마음에, 무모한 일인 줄을 알면서도 낭자에게 전갈을 보냈어. 정 낭자가 직접 폐하의 상태를 봐줬으면 해서. 그리고, 사실 본궁은 낭자가 본궁의 청을 수락해 입궁할 줄 몰랐다네.”
황후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본궁이 낭자를 보는 건 오늘로 두 번째지만, 전혀 낯설지가 않아. 그 아이가 본궁을 자주 보러온 덕에 낭자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
황후는 진안 군왕의 환한 웃음과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 마마, 그 여인이 웃을 줄도 알더라고요.
황후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신나게 떠들어대던 진안 군왕이 눈앞에 어렴풋하게 그려졌다. ‘그 여인’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반짝이는 진안 군왕의 눈동자가 황후의 기억에 아로새겨졌다.
– 마마, 그 여인이 얼마나 대단하냐면요.
– 진짜 못 하는 게 없더라니까요? 다 할 줄 알아요.
– 그 여인이 정말로 좋은 사람이더라고요. 세상에 어쩜 그렇게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죠?
황후가 걸음을 옮기자, 눈앞과 귓가에 떠오르던 진안 군왕의 모습과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 아이를 통해서 꽤 오랫동안 낭자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 본궁이 낭자를 직접 본 적은 손에 꼽지만, 낭자가 똑똑하고, 선량하고, 용감하고, 배짱 있는 여인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
황후가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낭자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그 누구도 낭자를 협박해서 그 일을 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 낭자는 이번에 입궐할 때도, 아마 들어오기는 쉽지만, 나가기는 힘들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테지.
사실 본궁의 부름을 거절했더라도, 낭자는 조정의 신하도 아니고, 의원도 아니니 도리에는 어긋나지 않아. 누군가가 차후에 그것을 빌미로 트집을 잡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야.
뭐, 그 이유를 근거로 삼아 어떤 사람들은 낭자를 더욱 싫어하겠지만, 딱히 손해 볼 것도 없을 테고. 누군가의 미움을 사는 건, 낭자가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일이니까.”
한창 말을 하던 황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을 텐데도 궁에 들어온 이유가 뭐지?”
창백한 얼굴의 황후가 호기심을 숨기지 않자,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마마께서 소녀에게 입궁하여 진료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폐하의 풍질은 고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더냐.”
황후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지금 와서 신선의 비방을 얻어 풍질을 고칠 수 있게 됐다고 하면, 분명 황제에게 거짓을 고했다는 이유로 목이 달아날 텐데.
“폐하의 풍질은 소녀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하지만 소녀는 황후마마께서 앓고 계신 죽을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황후마마께서 앓고 계신 죽을병!
정교랑을 바라보던 황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정 낭자, 역시 배짱이 두둑한 여인이로구나.”
황후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서신을 전달하러 온 내시가 떠나자, 범강림의 안색은 잿빛이 되었다.
“역시.”
“여보, 시누이에게 별일은 없겠죠?”
황씨가 가까이 걸어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범강림의 안색이 잿빛이라면, 황씨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범강림의 고향은 산간벽지인 무원산. 과거 그가 품었던 가장 큰 소망은 군량미를 먹을 수 있는 병사가 되는 것이었을 뿐, 오늘처럼 높은 관직을 얻어 어딜 가나 대인 소리를 들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범강림이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당초 태평거의 무뢰배들을 거쳐서, 수십 년을 한 자리에서 장사했던 두칠과 경성의 고위 관리인 유 교리, 탈영의 죄를 판결했던 대인들부터 서북 일대를 책임지던 장수까지, 뒤이어 황실의 종친을 거쳐 이제는 태후라······.
나를 포함한 다른 무원산 형제들이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야. 요즘엔 밤에 자다가 깼을 때도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지금까지 겪은 일들이 도저히 어떻게 된 건지, 나는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범강림이 침을 꿀꺽 삼켰다.
“괜찮을 거요.”
범강림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황씨는 범강림의 말이 못 미더웠는지, 고개를 돌려 주복에게 물었다.
“주씨 오라버니, 시누이는 정말로 무사한 거죠?”
황씨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된 호칭을 부르지 못하고, 서북에서 남을 부를 때 자주 쓰던 호칭으로 주복을 불렀다.
“별일 없을 겁니다.”
주복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황씨는 주복이 적어도 범강림보다는 세상 물정에 더 밝고, 조정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가에 서 있던 시녀가 의아한 얼굴로 반근에게 물었다.
“반근, 왜 안 울어?”
반근이 평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울 일이 뭐 있다고.”
시녀가 장난스럽게 혀를 찼고, 반근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아씨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난 혀 깨물고 자결하면 그만이야. 난 살아서도 아씨의 사람이고, 죽어서도 아씨의 귀신이 될 거야. 나는 살든 죽든, 언제나 아씨 곁을 지킬 테니까.
반근이 입술을 꾹 다물고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황씨를 안심시키고 방으로 들여보낸 범강림은 주복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정말로 무사한 겁니까?”
끝내 불안함을 참지 못한 범강림이 주복에게 물었다. 주복이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무사하다라······.
아마 소식을 들은 아버지께서는 벌써 짐을 싸서 야반도주하셨겠지.
“무사할 거요. 내가 진(秦)씨 가문에 가서 물어보겠소.”
아, 공주부 진씨 가문도 황족이지. 고능준과는 다르게 진씨 가문은 늘 누이와 사이가 좋았으니까.
“그럼 잘 좀 부탁······.”
범강림이 서둘러 공수의 예를 표하자, 갑자기 주복이 그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정교랑은 내 누이요!”
주복이 말에 힘을 실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친누이!”
주복이 말을 끝내고는 곧바로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떴다.
정교랑은 내 누이라고! 내 친누이! 친오라비도 아닌 네가 잘 좀 부탁하기는 개뿔!
말을 타고 빠르게 달려가던 주복이 갑자기 말고삐를 당겨서 말을 멈췄다. 그의 뒤를 바짝 따라오던 사환이 주복을 앞질렀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의아한 얼굴로 주복에게 물었다.
“공자님?”
주복이 고개를 들고 앞을 내다보았다. 거리의 끝에는 진씨 가문의 저택이 있었다.
“지금 이 날씨에 과로신선을 먹으러 가겠다고? 너무 덥지 않겠어?”
“에이, 이럴 땐 또 뜨겁게 먹는 맛이 별미야! 이열치열도 몰라?”
지나가던 두 행인의 수다 속에서 ‘과로신선’이라는 네 글자가 주복의 귀에 콕 박혔다. 주복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시선으로 두 사람을 쫓았고, 점점 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과로신선.
– 그자가 협박한다고 겁을 먹은 게냐?
– 정말 그놈들이 하는 게 형편없어서 특별히 가르쳐 준 거냐고!
– 그렇다니까요. 그 사람들이 만든 건, 정말 형편없었어요. 음식이 아까워서, 가르쳐 준 거예요. 사람들과 함께 즐겨야, 진짜 맛있잖아요.
그 여인은 단 한 번도 남의 협박을 두려워한 적이 없어. 누군가가 그 여인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해도 그 여인은 전혀 개의치 않겠지만, 절대로 그 여인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돼.
만에 하나 그 여인을 건드렸다가는, 긴말할 것 없이 대뜸 활시위부터 당기고 화살을 쏠 테니까.
시정잡배든 악인이든,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든, 단 한 번 인연이 닿았던 사람이든, 그 여인을 건드렸다가는 필시 주저 없이 그 여인의 화살에 맞겠지.
은혜는 은혜로, 원한은 원한으로 갚는 여인이었어. 잘해 주는 자에게는 물 한 방울의 은혜도 넘치는 샘물로 갚겠지만, 맞서려 들다가는 가차 없이 활을 들어 올릴 테지. 어떤 상황에서도 고개를 숙이거나 자리를 피할 줄 모르는 교만한 여인인데, 어찌 허리를 숙일 수 있을까.
하지만 이번 적수는 태후, 그리고 황실이야. 황실의 권력 아래에서 반기를 드는 자는, 그게 설령 귀신이라 하더라도 자비와 예외가 따르지 않을 것이야.
주복이 고개를 돌려 다시 거리의 끝을 내다보았다.
저 자식의 성은 진씨, 저놈은 공주부 진씨 가문의 열셋째, 진호다. 그 여인이 허리를 숙이지 않겠다고 한다면, 진호는 황실에 허리를 숙이라고 말할까?
주복이 말고삐를 다시 쥐었다.
“공자님?”
사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복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급하게 박차를 가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왜 진씨 가문에 가질 않으시고 거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하시지?
“어머니!”
진호가 목청을 높였다.
“알겠어. 그만 좀 불러.”
진 부인이 못 이기겠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지금 이 어미가 궁에 들어가서 한번 살펴보마.”
“어머니, 일단 가서 정 낭자부터 보세요. 낭자가 제 발로 궁에 들어간 거라면, 궁에서 나오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들어간 겁니다. 일단 낭자의 계획부터 먼저 들어 보세요. 태후부터 찾아가 괜한 말씀 올리지 마시고요.”
진호가 다급하게 당부하자, 진 부인이 걸음을 멈췄다.
“말이 참 많네, 우리 아들. 알겠다, 알겠어. 꼭 정 낭자의 말대로 하마.”
진호가 헤헤 웃었다.
“그럼 어머니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진 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됐다. 나도 내가 원해서 가는 것이야.”
진 부인이 사람들을 데리고 문을 나서자, 진호는 회랑 아래서 홀로 한숨을 쉬었다.
“이따 주복 그 녀석이 오면 장난이나 좀 쳐야겠다.”
진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뜨거운 태양이 하늘 높이 걸리자, 문지기들이 뙤약볕을 피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설마 아직도 소식을 듣지 못한 건가? 아니면, 주씨 가문은 벌써 야반도주했나?”
진호가 혼잣말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도망가더라도, 그 녀석이 도망가지는 않았을 텐데. 그 녀석은 아마 아무 데도 가지 못할걸. 낭자와 함께 정씨 저택에 남아 있겠지.”
진호가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아, 이따가 주복이 와도 장난은 치지 말아야겠다. 괜히 열 받아서 혼절이라도 하면 나만 곤란해져. 난 죽을병에 고친 사람을 살리는 비방도 모르는데.”
정오의 뜨거운 햇볕이 온몸을 찌르듯이 내리쬈다. 사환이 소매로 땀을 닦으면서 물었다.
“공자님, 언제까지 여기에 가만히 서 계실 겁니까? 들어가서 기다리는 것도 똑같지 않습니까?”
진호는 대꾸하지 않고 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똑같지 않아. 그들은 내게 남다른 존재다. 내가 그들을 다르게 생각한다는 걸 그들에게도 알려 주고 싶구나. 그러니 난 여기서 기다릴 거다. 주복 그 자식이 들어오자마자 날 볼 수 있도록.”
진호가 뒤늦게 입을 열자, 사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예전엔 한 번도 이러신 적이 없었는데.
후덥지근한 공기를 몰고 온 오후의 바람이 마당 안을 쓸고 지나갔다. 땡볕에 못 이겨 시들해진 나뭇잎이 나른하게 흔들리던 때에, 문 앞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진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왔구나! 드디어 왔어!
하지만 진호의 환한 웃음은 바로 어색하게 굳어버렸다.
“십삼.”
진 부인이 마차에서 내리며 부채로 햇볕을 가리던 찰나, 자신을 마중 나온 진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곧이어 그녀가 웃으면서 진호에게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아들, 그렇게 급했니? 설마 여기서 쭉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