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1
교랑의경 61화
시녀는 병풍 앞에 앉아 느릿느릿 머리를 빗는 여인을 가만히 서서 바라봤다. 머릿결이 참으로 풍성했다. 먹처럼 진한 흑발을 묶지 않고 언제나 길게 늘어뜨리다 보니 자리에 앉으면 비단처럼 바닥에 쫙 깔렸다.
방 안의 장식은 많지 않았다. 아씨의 활동 공간은 정방과 침상, 팔걸이 책상 세 곳뿐이어서 딱히 정리할 것도 없었다. 한 권뿐인 책도 이미 가지런히 놓아둔 후였다. 물잔을 씻고 작은 벽돌 화로의 불까지 끈 다음 시녀는 원래의 자리에 도로 앉았다.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원래 몸종 둘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 애들은 사주팔자가 안 좋습니다. 아씨의 요양에 좋지 않아 도로 데려왔어요.”
정씨 가문에서 손 관주를 만났을 때, 손 관주는 그렇게 말했다. 도사에게 사주팔자가 나쁘다는 평을 듣다니, 이제 그 두 몸종을 쓰겠다고 나설 이는 없을 터였다. 시녀는 장씨 가문 출신으로 글을 알았기에 때로는 가벼운 말 한마디도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그 두 몸종은 어쩌다가 이 여도사의 눈 밖에 났을까? 어쨌거나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걱정할 일은 병을 앓는 아씨를 모시는 일이었다. 밖에서 따로 생활하고 있는데 시중을 들 몸종은 자기 하나뿐이라니 일에 치여 죽는 거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곳 생활은 한가해 죽을 맛이었다. 자신은 책을 읽어 주는 것 외에 조금의 쓰임새도 없는 것 같았다. 빗질을 마친 정교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씨, 밥은 제가 지을게요.”
시녀가 얼른 말했다. 정교랑은 시녀를 보고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말했다.
“내가 할게.”
시녀는 자포자기하면서도 불안한 표정으로 따라나섰다. 신신당부를 받은 터라 억지로 묻고 따지며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교랑은 문가로 가더니 시녀에게 물었다. 그 물음은 시녀로서의 자존심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참, 너, 뭐 먹고 싶니?”
“아씨.”
시녀는 얼른 다가갔다.
“이런 건 아랫것이 해야 할 일이에요. 아씨께서 이러시면 소인이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할 게 없으면 소인은 쓸모없는 인간이 되잖아요.”
정교랑이 걸음을 멈췄다.
“그래.”
정교랑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미소를 지었다.
“쓸모없는 인간이 되면 기분이 안 좋아. 그럼 좋아. 네가 해.”
한시름 놓게 된 시녀는 감격하여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드디어 일을 할 수 있구나, 정말 행복해.
날이 환히 밝았을 무렵, 7~8대의 말과 함께 마차 두 대가 강주성 성문 밖에 나타났다. 성문 어귀에서는 일찌감치 남녀 몇 명이 나와 목을 빼며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마차 행렬이 나타나자 이들은 반가워 어쩔 줄 몰랐다.
“조 집사님.”
남녀가 얼른 나가 맞이했다. 맨 앞에 있던 말에 탄 중년 남자가 말을 세웠다.
“자네들이었군.”
중년 남자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사노야, 저희 가문에서 정씨 가문과 혼사를 치를 때 보낸 이들입니다.”
사내는 진소의 아우로 진씨 가문의 넷째, 사노야였다. 진소가 직접 올 수 없게 되자 정중함을 표하기 위해 아우를 직접 보낸 것이었다. 진 사노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초조한 표정으로 성 안을 쳐다봤다.
“그럼 어서 정씨 댁으로 가세나.”
진 사노야는 고개를 돌려 수행원들을 보며 물었다.
“예물은 잘 챙겼지?”
수행하는 시종들이 일제히 네 하고 대답했다.
“잠깐만요.”
조 집사가 막아서자 진 사노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조 집사, 지체할 시간이 없네. 이 태의가 길어야 두 달 버티신다고 했어. 길을 오가는 시간만 해도 한 달이 넘으니, 만에 하나 문제라도 생기면…….”
진 사노야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압니다, 알죠.”
조 집사는 얼른 진 사노야를 달래며 옆에 있는 남녀를 향해 물었다.
“아씨께서 어디 계시는지 아는가?”
남녀는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종으로부터 집에서 사람이 온다는 전갈을 받은 터라, 자신들의 일 처리에 못마땅한 게 있어 내려온 줄 알고 급히 달려온 것인데 대뜸 아씨의 일을 물으니 뜻밖일 수밖에.
그런데 어느 아씨?
대체 어느 아씨기에 집안 제일의 대집사 조 선생이 친히 여기까지 온 거지? 남녀는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교랑 아씨 말일세.”
조 집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교랑 아씨가 누구지? 남녀는 그래도 영문을 모르겠는 눈치였다.
“우리 가문에서 시집간 아씨의 딸, 교랑 아씨 말이네.”
조 집사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사실 불평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교랑 아씨를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조 집사 역시 출발하기 전에 교랑 아씨의 외모며 품행, 이름을 단단히 기억해 두지 않았다면 까맣게 몰랐을 일이었다. 그럼 그 아씨 때문에?!
“성 밖의 현묘산에서 지내십니다.”
그중 한 사내가 말했다. 이곳 강주 출신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장사를 하기도 했고 강주성을 두루 돌아다닌지라 길을 알았다. 사내가 앞장설 채비를 하자 조 집사는 모두에게 성으로 들어가지 말고 말 머리를 돌리라고 했다.
“조 집사, 지금 뭐 하는 겐가?”
진 사노야가 물었다. 시간이 없다니까 어딜 간다는 거야.
“교랑 아씨께서 성 밖 현묘산에 지내시니 속히 그리로 가 청하시지요.”
조 집사가 말했다. 성 밖이라고?
“그래도 그 부모부터 뵈어야 하지 않나?”
진 사노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건 예에 어긋나는데.
“사노야.”
조 집사는 진 사노야를 쳐다보며 출발 당시 진 공자가 거듭 당부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부모를 먼저 뵈러 가실 경우, 그 아씨는 절대 안 움직일 겁니다.”
뭐라고? 진 사노야는 또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한편 정씨 댁에서는 중문으로 급히 뛰어 들어온 시종이 한 몸종에게 돈을 돌려주고 있었다.
“뭐야? 못 산 거야?”
몸종이 인상을 쓰며 못마땅한 투로 물었다.
“가기 싫으니까 괜히 꾀부린 거지?”
“누나, 그런 거 아냐.”
시종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갔었는데 없대.”
“없다고? 어떻게 없을 수가 있어? 그럼 다시 만들면 되지.”
몸종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누나, 모르는 소리 마. 현묘관 간식이 얼마나 인기인데. 게다가 애초에 수량이 적어서 하루에 내놓는 양이 얼마 되지도 않아. 며칠 전부터 예약했다가 가져간다니까.”
시종이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갑자기 사려고 하면 어디서도 못 구해.”
“그렇게 인기라고?”
몸종은 뜻밖이라고 생각하며 하는 수 없이 돈을 돌려받았다.
“뭐? 못 샀다고?”
정육랑이 쌍육을 한쪽으로 밀어 놓으며 말들을 엎어 버렸다.
“육랑, 무슨 짓이야. 내가 이기고 있었는데.”
맞은편에 앉은 정칠랑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이따 다시 놀면 되지. 중요한 일 얘기하잖아.”
정육랑이 말했다.
“너 다음 달에 꽃꽂이 모임 하기 싫어?”
남들 앞에 나서서 뽐낼 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정칠랑은 곧 잠잠해졌다.
“며칠 전에 동 낭자한테 얘기를 들었는데 현묘관에서 간식을 아주 잘 만든대. 그래서 좀 사다가 먹어 보려고 했거든. 진짜 맛있으면 더 사다가 꽃꽂이 모임에 내놓으려고.”
정육랑의 말에 정사랑과 정오랑, 정칠랑 등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육랑은 생각이 깊다니까.”
정사랑의 칭찬에 정육랑은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못 샀다는 거야?”
정육랑이 고개를 돌려 몸종에게 따져 물었다. 몸종은 시종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다.
“어리석긴.”
정육랑이 인상을 쓰며 호통을 쳤다.
“그건 남들 사정이지. 우리가 누구야? 다시 가서 전해. 우리는 정씨 가문 사람이라고.”
몸종은 얼른 네 하고 대답한 후 황급히 뛰어나갔다.
“그러게 말이야. 현묘관은 우리 집에서 공양하는 돈으로 먹고사는 거잖아.”
정칠랑도 말을 보탰다. 사실 공양한다기보다는 정씨 가문의 작은 도관 하나를 대신 관리해 주는 것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의미는 같았다. 어쨌거나 관계가 있으니까. 정육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문을 나서던 시종은 급히 나가다가 누군가와 부딪칠 뻔했다.
“젠장, 뭘 이렇게 서둘러.”
시종이 씩씩거리며 투덜거렸다.
“서두른 사람이 누군데.”
상대 역시 지지 않고 받아쳤다. 시종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소년을 똑바로 쳐다봤다.
“금가아?”
시종은 하찮은 녀석이라는 투로 말했다.
“뭘 이렇게 뛰어다니냐. 넌 이제 이 집 사람도 아니잖아.”
며칠 전 현묘관에서 온 여도사가 도관에 있는 아씨의 심부름을 맡을 시종을 하나 달라고 청했는데 그때 도관으로 옮겨 간 녀석이었다. 소식을 들은 녀석의 누나는 사공자 앞에서 한참을 울며 애원했지만 소용없었고, 그 일은 집안에서 이미 웃음거리가 됐다. 바보의 시중을 들게 됐으니 앞날은 끝장난 거지, 뭐.
“어디서 신경질이야!”
시종은 기가 살아 소리쳤다. 금가아가 흥 콧방귀를 뀐 후 상대하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가는 바람에 시종만 머쓱해졌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차례로 성 밖 현묘산에 도착했다. 시종은 간식을 사러 온 것이었고 금가아는 이곳에서 지내며 심부름을 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둘 다 하인 처지였지만 의미는 달랐다. 시종은 꼴 좋다는 투로 비웃고 이기죽거렸지만 금가아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현묘관 앞을 청소하던 두 여도사가 금가아를 보고 인사했다. 시종은 입을 삐죽였다. 앞으론 나도 저 여도사들과 인사할 텐데, 뭐.
“이봐요, 도사님들. 우리 아씨께서 간식을 사 오라고 하십니다.”
시종이 손을 허리춤에 대고 말하자 두 여도사는 예를 표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다. 시종은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예상했고, 이미 준비한 게 있었다.
“난 정씨 가문 사람입니다. 북정 사람이라고요. 우리 여섯째 아씨께서 이곳 간식을 드시고 싶대요.”
시종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정씨 가문? 두 여도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듯 주저하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이니?”
안에서 나오던 손 관주가 소리를 듣고 물었다. 두 여도사는 한숨 돌렸다는 듯 얼른 뒤돌아 사정을 설명했다.
“서둘러요. 우리 아씨께서 쓰실 거라고요. 드셔 보고 맛있으면 더 많이 사실 겁니다.”
관주를 본 시종은 집을 드나들던 여도사임을 알아보고 말했다. 예의상 말은 살 거라고 했지만 자발적으로 만들어 바칠 게 뻔했다. 돈 얘기 따위는 안 꺼낼 것이다. 손 관주는 잠시 생각에 잠겨 시종을 훑어봤다.
“그랬군요.”
생각에 잠겨 있던 손 관주가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진짜 없어요.”
시종은 멈칫했다. 뭐라고? 시종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손 관주가 이쪽을 지나 산 위로 올라가던 금가아를 보고 소리쳤다.
“금가아, 기다려라. 아씨께 드릴 간식 가져가.”
걸음을 멈춘 금가아가 네 하고 대답했다. 어리둥절해 있던 시종은 한 여도사가 커다란 간식 꾸러미를 금가아에게 건네는 모습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봐요, 없다면서요? 쟤한테 주는 건 뭐예요?”
시종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이건 아씨 드리려고 따로 특별히 만든 거예요. 간식 공양으로 나가는 것과 다르죠.”
손 관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 그럼, 이거로 줘요.”
시종은 금가아의 손에 있는 꾸러미를 낚아채려 하며 말했다.
“여섯째 아씨 먼저 드려야 해요.”
그러자 지금껏 잠자코 있던 금가아가 우쭐한 표정을 짓더니 어깨로 시종을 훅 밀치고는 뛰어갔다. 시종은 열이 받아 발을 굴렀다.
“너 두고 봐.”
그렇게 소리친 시종은 뒤돌아 달려갔다. 산길을 오르던 사람들은 시종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 관주는 찾아오는 인파를 보고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나가서 상냥하게 맞이했겠지만 이제는 보름이 다 되도록 참배객 하나 없던 시절의 그 손묘선(孙妙仙)이 아니었다. 손 관주는 그저 힐끔 쳐다본 후 금가아를 뒤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간식 때문에 찾아온 것이라면 제자들이 알아서 내쫓을 터였다. 득도한 관주는 그런 세속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