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13
교랑의경 613화
“원래 여기 있던 내시들이 모두 궁으로 돌아간지라, 전하께서 서첩을 어디에 두셨는지 저희는 잘 모릅니다.”
내시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탁자 위에 놓여 있을 걸세. 전하께서 항상 책을 읽으실 때마다 모사를 하셨으니.”
진십팔랑이 먼저 탁자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내시들이 서둘러 탁자 위를 뒤적거리다가 진십팔랑이 말한 서첩을 발견하고는 기뻐하며 그녀에게 건넸다.
내시들이 탁자를 뒤적거린 탓에 뿌연 먼지가 곳곳에 날렸다.
“왜 청소를 하지 않는 것이냐? 전하께서는 더러운 것을 가장 싫어하시거늘!”
진십팔랑이 분노 섞인 목소리로 호통쳤다. 화들짝 놀란 내시들이 겁먹은 모습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진십팔랑도 자신이 추태를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급하게 서첩을 챙기고 곧장 서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 낭자, 전하를 생각해 주어 고맙소.”
진십팔랑이 밖으로 걸어 나오자, 일부러 자리를 피해 문가에 서 있던 고능준이 말했다.
이제 평왕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늘.
진십팔랑은 조금 전 자신이 들은 울음소리가 생각나 주춤했다.
“고 대인.”
진십팔랑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우선 다른 논쟁은 잠시 내려놓고, 하루빨리 평왕을 안장하고 시호를 정해야 합니다.”
태자 책봉, 수렴청정, 섭정 등 풍파가 연이어 지나는 동안, 평왕의 봉호는 여전히 정해지지 않았고, 죽은 황자에 관한 그 어떤 애도 의식도 치러지지 않았다.
평왕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 같았다. 우스운 죽음을 맞이했고, 죽은 뒤에도 어떠한 추모조차 없었다. 친왕의 존엄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능준이 엄숙해진 표정으로 진십팔랑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낭자가 그리도 평왕 전하를 생각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오. 평왕 전하께서 비록 돌아가시긴 했으나, 덕분에 한스러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실 듯하오.”
한스럽겠지. 이렇게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것도 모자라, 사람들의 추모를 받지도 못한 채 쓸쓸히 죽어갔는데, 어찌 한스럽지 않을 수가 있으랴.
진십팔랑은 대답 대신 가볍게 답례하고 걸음을 옮겼다.
진십팔랑이 멀어져가는 것을 본 고능준이 고개를 돌려서 서재를 쳐다보았다. 내시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고능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인들이 당장 이곳을 깨끗하게 청소하겠습니다. 더는 이곳을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내시들이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찧으면서 말했다.
고능준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럴 필요 없다. 이미 이승을 떠난 사람이니, 그럴 필요 없어.”
고능준은 서재를 나간 뒤, 평왕부를 떠났다.
“노야, 거처로 모실까요?”
종복이 물었다.
“아니, 궁으로 가자.”
고능준이 말했다. 종복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마부를 재촉하려던 찰나, 고능준이 다시 그를 불렀다.
“아, 그리고 내 명첩을 진 상공에게 가져다주어라. 그자와 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다.”
“마마.”
내시 몇 명이 고개를 숙인 채 침전 안으로 들어오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침상 옆에 앉아 있던 황후를 불렀다.
조당에서 태후에게 삿대질을 당하며 온갖 욕을 들을 때는 반박 한마디 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기만 했던 황후였지만, 태후가 천자의 거처에서 나가라는 말을 했을 때는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며 태후에게 맞섰다.
– 본궁은 폐하께서 책봉한 황후입니다. 본궁이 폐위되지 않는 한, 아무도 본궁에게 황제 폐하의 곁을 떠나라는 명령을 할 수 없습니다.
폐위?
태후는 당장이라도 황후를 폐위시켜 버리고 싶었지만, 말 한마디로 쉽게 황후를 폐위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태후는 즉시 조정 대신들을 불러 이 안건을 논의하도록 했지만, 전갈을 받은 대신 다섯 명 중 세 명이 입궁을 거절했고, 나머지 두 명은 지금 급선무는 태자 책봉이 우선이라고 했다.
조정 대신들은 자신들이 후궁 여인들의 암투에 관여할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오늘 태후는 조당에서 체통도 지키지 않은 채 황후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인 터였다.
여인이 홧김에 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쓰나. 그리고 홧김에 한 말이 아니라고 해도, 태후는 평소 감정 기복이 심하고, 다분히 편파적인 결정을 내리곤 하지. 그러니 태후가 홧김에 한 말을 가지고 우리까지 덩달아 설친다면, 황실과 조정이 온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를 자처하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그런 대신들의 반응에 태후는 화가 나서 펄쩍 뛰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당장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마마, 태후마마께서 또 조회를 열겠다고 하셨습니다.”
내시의 말에 황후는 가볍게 웃고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가서 한 번 들어나 보거라. 이번엔 또 무슨 이야기를 할지.”
일련의 일을 겪으며 황후는 다시 후궁을 장악할 권력의 일부를 되찾게 되었다. 내시가 알겠다며 물러가자, 침상 옆에서 황제의 손을 닦고 있던 안비가 고개를 들었다.
“마마, 태후께서 마마를 폐위시키겠다고 대신들을 협박하면 어떡하죠?”
안비가 물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셔서 폐위에 동의하지 않는 한,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황후가 혼수상태인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안비도 황후의 시선을 따라 황제를 바라보았다.
“마마, 폐하께서 깨어나셔서 우리가 한 일을 아신다면, 마마께서는 필시 폐위되실 거예요.”
안비가 황후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황후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일은 없을 게다.”
깜짝 놀란 안비가 고개를 돌렸다.
“마마, 마마의 뜻은 그럼······.”
안비가 목소리를 낮추고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황후가 기가 찬다는 듯이 소리쳤다.
“본궁이 먼저 죽더라도, 네가 어떻게 죽을지는 알고도 남겠다!”
황후가 고함쳤다. 그러자 안비는 흠칫 놀랐다가 곧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마마, 신첩은 어떻게 죽습니까?”
“멍청해서 죽는 게지!”
“하지만 마마, 신첩은 정말 몰라서 그래요. 태의들이 폐하의 병세가 더 악화되지는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악화되지 않을 거라고 했지, 언제 깨어나신다고 했느냐. 만에 하나 폐하께서 깨어날 수 있었더라면, 정 낭자는 절대 입궁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당에 도착한 조정 대신들은 태후가 태자 책봉을 언급하지 않고, 평왕에게 시호를 추서하자는 이야기만 꺼내자 조금 놀란 눈치였다.
물론 일부 대신들이 태자 책봉을 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리기는 했지만, 의외로 태후는 화를 내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가족을 잃은 평범한 노파처럼 슬픔을 감내하는 표정과 말투로 오늘은 태자 책봉을 논하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애가의 황손이오. 사람이 죽은 게 우선이어야 하지 않겠소? 다른 일은 애가가 장손을 먼저 안장한 뒤에 다시 논하는 게 어떻겠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봤을 때 그 누구라 해도 차마 상심한 조모를 붙잡고 정사를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 조회에서는 더 이상 다른 논의들을 진행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대신들은 태후의 뜻대로 평왕의 시호를 결정했다.
본디 평왕이 벼락을 맞아 죽은 게 천벌이냐 아니냐를 두고 조정 대신들 간에 의견 차이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정교랑이 번개를 불러오는 것을 보여준 덕에 평왕이 천벌을 받았다고 말하는 시호가 모두 기각되었기에, 이제 조정 대신들은 평왕의 시호에 대한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평왕의 시호는 회혜(懷惠)로 정해졌고, 사흘간 조회를 중단하며 평왕의 죽음을 추모하기로 했다.
다실(茶室)로 들어선 진소의 눈에 방 안에서 먼저 차를 마시고 있던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조정이 혼란에 빠졌으니, 대인과 인사치레는 생략하겠소이다.”
고능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폐하의 총애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진 대인인 만큼, 그 은덕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굴뚝같겠지요. 하지만, 이 사람 또한 그렇습니다.”
진소가 실소를 터트리고는 아무런 대꾸 없이 자리에 앉았다.
“나는 선황의 부탁을 받았단 말이외다!”
고능준이 갑자기 눈썹을 치켜세우고 소리쳤다.
“그래서 조정을 고 대인의 집으로 삼아 쥐락펴락했던 겁니까?”
진소가 똑같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쳤다. 두 사람은 인상을 쓴 채 그렇게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 일을 논하려고 오늘 대인을 찾아온 건 아닙니다.”
먼저 정적을 깬 고능준이 진소 앞으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엇이오?”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폐하의 대가 끊기는 것은 못 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두 사람이 싸울 때가 아니지요. 나는 사직을 청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갈 것이외다.
여기 명단에 적힌 사람들은 다 내 사람들이니, 이들을 지방으로 좌천시키십시오. 그리고 다른 유능한 인재를 뽑아서 제위에 오른 경왕을 보필하시지요.”
진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소는 종이를 펼치고 놀라움과 분노가 담긴 표정으로 그 위에 쓰인 이름들을 훑어보았다.
고능준이 몰래 심어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게다가 나와 가깝고, 쭉 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자들까지 포함되어 있어!
“다들 경왕을 제위에 올리면 백성들이 고난에 허덕이고 나라가 망할 거라고 말하더이다. 그러나 보십시오.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의분에 가득 찬 것처럼 말하는 관리들은 사실 제 이득을 따지는 것일 뿐이지요.
실상 천자를 생각하고, 천자를 위한 일을 하는 사람이 나와 대인 외에 또 누가 있겠소이까? 그러니 우리 둘이서 마음을 허투루 쓰지 않고 힘을 합친다면, 어떻게 진혜제, 진안제 때와 같은 난세가 찾아오겠습니까? 어떻게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수 있겠습니까?
천하의 모든 일과 사람은 다 비슷하다고는 하나, 어떻게 모든 일의 결과가 다 똑같겠습니까? 아니, 같은 사람에게 같은 일을 하라고 해도, 결과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고능준은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 선택이 더 낫네, 저 선택이 더 별로네를 따지기 전에, 사실 옳고 그른 선택이란 이 세상에 없다는 것부터 알아야지요. 일단 그 자리에 걸맞는 사람을 앉히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그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겁니다. 강직한 신하가 될지, 권력을 남용하는 간신이 될지, 충의를 다하여 태평성대를 이어갈지, 아니면 난세를 불러올지는, 다 사람 하기 나름이지 않습니까.
백성을 대신해 목소리를 낸다고요? 그럴 리가, 우리 같은 관리들은 백성의 마음을 이용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지요. 다들 저마다의 신념과 정의가 있거늘,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백성이라, 이제야 백성을 논한다고요? 저들은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 따위를 두려워하는 게 아닙니다. 다들 이 판국에서 떨어질 콩고물을 바라거나, 좋은 자리 하나 꿰차려는 생각들뿐이지요.”
고능준의 말이 끝나자, 진소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건 고 대인의 생각일 뿐이오.”
고능준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게 바로 제 생각이지요. 그리고, 나는 우리 고씨 가문이 영원히 황실의 외척이길 바랍니다! 진 대인, 그럼 먼저 일어나겠소이다.”
고능준은 망설임 없이 일어나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다실 안이 조용해지자, 진소는 손에 쥔 명단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종이를 고이 접어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윽고 집에 도착한 진소는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기도 전에 또 궁에서 온 전갈을 받아야 했다. 진소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전갈을 받들고 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