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14
교랑의경 614화
태후가 진소를 황제의 침궁으로 불렀다.
“황후, 잠시 물러나 있게.”
태후가 말했다. 황후는 단정하게 예를 표한 뒤, 별말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진 대인, 폐하를 한 번 보시구려.”
태후가 황제의 침상 옆에 걸터앉아 황제를 바라보았다. 진소도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두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침상에 누워 있는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황상이 후손에 대해 얼마나 신경 썼는지는, 그대도 잘 알고 있겠지.”
태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요. 폐하께서는 대가 끊기는 것을 두려워하시며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적도 있었습니다.
“황상은 대가 끊기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향불을 밝혀 줄 사람이 남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소. 황상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피가 섞인 친 혈통이 이 강산을 이어가는 것뿐이지.
진 대인, 저들은 모두 경왕이 황제가 될 수 없다고, 양자 입적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하고 있소. 그런데 이 늙은이는 도무지 모르겠군. 저들이 생각하는 최선이, 누구를 위한 최선이오? 진 대인,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말해 보시구려. 황상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과연 양자 입적을 윤허했겠소?”
당연히 아니지요.
진소가 말없이 침상 위에 누운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매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진소의 모습을 보던 태후는 지금이 가장 중요한 한마디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진 대인, 저들이 종친을 양자로 입적하겠다고는 하나, 그렇다면 훗날 경왕의 자손들은 어쩌란 말이오?”
경왕의 자손?
진소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태후를 쳐다보았다.
“경왕은 선천적인 바보가 아니잖소. 다들 잊은 게지, 경왕이 어렸을 때 얼마나 총명했는지. 평왕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어.”
태후의 눈가에 눈물이 비쳤다.
그랬지요.
진소는 아득히 먼 옛날에 본 것 같던 어린 이황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그때의 귀엽고 영리한 어린 이황자의 모습은 이제 생각나지도 않는구나. 하지만 예의 바르고 폐하와 슬기로운 문답을 나누던 이황자의 모습은 눈앞에 선해.
“경왕은 선천적인 바보가 아니라 다쳐서 바보가 된 것이오. 그런데, 경왕이 낳을 아이들도 바보겠소?”
태후가 이어서 말했다.
“마마, 지금 마마의 말씀은 경왕이······.”
진소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의를 부르자, 고개를 숙인 채 잰걸음으로 들어온 태의가 말했다.
“경왕 전하께서는 올해 열한 살이시며, 신 등이 살펴본 결과 자손을 이어 가실 수 있는 몸이십니다.”
자손을 이어 갈 수 있다니!
진소의 표정이 급변했다.
편전 안에서 고개 숙인 내시를 바라보던 황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손을 이어 갈 수 있다고······.
“일이 예사롭지 않게 돌아가고 있어. 경왕이 아들을 낳을 수도 있다는군.”
“누가 벌써 아들이래? 딸일 수도 있는 거잖나.”
이때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부서졌다. 안에서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누구요!”
안에 있던 학생들이 화가 난 표정으로 문가를 바라보았다.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본 학생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겁에 질렸다.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람은 바로 고 관인이었다. 그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방 안의 학생들을 노려보았다. 고 관인의 곁에 있던 수하들도 학생들을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들 하실까? 나도 그 즐거운 이야기 좀 듣고 싶은데.”
고 관인이 느긋하게 말했다. 학생들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고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경왕을 비웃었으니, 이는 죽을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학생 한 명이 다리를 바들바들 떨면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쓸모없는 놈들!”
고 관인이 냉소를 보이고는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떠났다.
“이쯤 되니, 그 정가 놈이 대단한 것 같기도 해. 짜증 나는 놈이긴 하지만 보통 배짱이 아니었어.”
고 관인이 말했다.
“다 관인께서 아량이 넓으신 덕입니다.”
수하들이 입을 모아 아첨했다. 고 관인이 떠나자, 안에 있던 학생들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왔다.
“어서 가자, 빨리!”
“그나저나, 고 관인이 덕승루까지 오는 걸 보면, 이 일이 어떻게 될지는 이미 정해졌다는 거 아니야?”
학생들이 수군거리면서 얼른 자리를 피했다.
“언니, 제가 악보 챙기는 걸 깜빡했어요.”
춘령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춘령, 왜 그렇게 덤벙대.”
다른 시녀가 핀잔을 주었다.
“다녀와.”
앞서 걸어가던 주 낭자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춘령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재빨리 왔던 방향으로 뛰어갔다.
주 낭자가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때, 등 뒤에서 춘령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년이 눈깔이 삐었나! 어딜 보고 다니는 거야!”
수하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춘령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그러더니 뺨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발길질까지 하려고 발을 들었다.
춘령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연신 사죄하면서도, 수하의 발길질을 피할 배짱이 없어 겁에 질린 얼굴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관인, 부디 관용을 베푸시지요.”
주 낭자가 외쳤다. 성가시다는 듯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고 관인이 고개를 돌려보자,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주 낭자가 보였다.
시종의 발길질에 얻어맞은 춘령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고 관인.”
가까이 온 주 낭자가 춘령의 옆에 서서 몸을 낮추고 예를 올렸다.
“소인이 대신 사죄드릴게요.”
고 관인이 주 낭자를 쳐다보다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웃었다.
“주 낭자였군요. 어이쿠, 제가 감히 주 낭자의 사죄를 받을 수 있습니까. 도리어 제가 낭자에게 사죄해야지요. 그러니 부디 낭자의 은인께 좋게좋게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벼락에 맞아 죽을까 봐 두렵거든요.”
주 낭자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별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고십사,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진호가 문가에 서서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예상치도 못한 사람을 덕승루에서 마주치자, 고 관인이 의아한 얼굴로 대꾸했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진십삼, 자네도 여기 있었는가?”
고 관인이 진호의 등 뒤를 흘깃 엿봤다. 젊은 사내 일고여덟 명이 별실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자, 고 관인은 흥미로운 듯 눈썹을 꿈틀대며 물었다.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그리들 재밌게 하는가?”
진호가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와서 좀 들어보겠나?”
고 관인이 잠시 진호를 바라보다가 헤헤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진십삼, 나는 자네가 아둔한 사람이 아닐 거라 생각했네.”
별실 문이 닫히고, 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
춘령은 바닥에서 일어나면서 한쪽 손으로 조금 전에 맞은 어깨를 움켜쥐었다. 춘령이 고통으로 낮은 신음을 내자, 넋을 놓고 있던 주 낭자가 정신을 차렸다.
“조심 좀 하지?”
다른 시녀가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투덜댔다.
“그, 급해서 그랬어.”
춘령이 울먹였다.
“괜찮아. 다음부턴 조심해.”
주 낭자가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춘령이 서둘러 주 낭자의 뒤를 따라가며 조용히 말했다.
“아씨, 진 공자님이 아씨를 위해서 나서주셨어요. 고 관인이 아씨한테 뭐라고 하지 못하도록요.”
진 공자님은······.
주 낭자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진 공자님은 나를 위해서 나선 게 아니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마.”
진 공자님은 은인 얘기, 벼락 얘기가 나오고 나서야 안에서 나왔으니까.
정 낭자가 그토록 힘들게 세상 사람들 앞에서 사람이 번개를 불러오는 일을 증명한 건, 단지 평왕이 천벌 받아 죽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야. 실은 사람이 번개를 불러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증명한 거고, 자신이 마음대로 누군가를 벼락 맞혀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거야.
그런데 고 관인이 정 낭자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자신에게 벼락을 내려 죽일 수 있다는 듯이 말하니까, 진 공자님은 정 낭자의 험담을 듣다 못해 달려 나오신 거지.
진 공자님은 그 여인을 위해서 나선 거고, 진 공자님은 그 여인을 지켜주려고 하는 거야.
내가 아니라.
주 낭자가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웃었다.
진 공자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
“진안 군왕이 아직도 봉지로 나가겠다고 자청하지 않았다더군. 몇몇 황족들은 성 밖에 영험하다고 소문난 도관과 사찰에 찾아가서 폐하의 건강을 위한 향불을 올리고 있다던데 말이야.”
권문세가의 자제로 보이는 젊은 관리가 차분하게 말하자, 고 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삼, 역시 자네 쪽이 이야기하기가 편하네.”
고 관인이 웃으면서 진호에게 말했다.
“편하다? 관인은 고 대인과 함께 떠나나? 아니면, 집안 여인들과 먼저 출발하나?”
진호가 고 관인을 힐끔 보며 말하자, 고 관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런 말은 듣기 거북하군.”
진호는 고 관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다들 진혜제, 진안제를 논하면서, 대신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강산에 위기가 찾아올 거라고들 말하는데, 다들 외척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만 보이고, 황족과 종친이 권력을 남용하는 건 보이지 않는가 보군.”
진호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제가 제위에 오른 뒤에는 당시 가장 가까운 종친이었던 계왕(稽王)이 그를 보필했지.”
한 사람이 말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아마 계왕도 뒤에 숨어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야. 할 수만 있다면 아마, 제위까지 탐냈겠지.”
다른 사람이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고 관인이 팔꿈치로 진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야, 다들 지금 누굴 얘기하는 거지?”
진호는 그런 고 관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진안 군왕이 봉지로 나가는 것을 자청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연대 서명을 해서 상소문을 올려야 하네. 그를 봉지로 내보내 달라고.”
진호가 진지하게 말했다. 고 관인이 혼자서 턱을 쓰다듬다가 미소를 지었다.
별실 안의 사람들은 술을 몇 잔 더 기울인 뒤에 자리를 떠났다.
고 관인이 진호를 붙잡고 웃으면서 말했다.
“십삼, 이리 좀 와 보게. 한 번 만나기도 힘든 사람을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는 게 바로 인연이고 하지? 우리 잠시 앉아서 이야기 좀 나누는 건 어떻겠나? 술은 내가 사지.”
“내가 덕승루 술값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해 보이나? 술만 사면 뭐하나, 기녀가 없는데.”
진호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꾸하자 고 관인은 하하 웃으며 상등 별실로 걸음을 옮겼다.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가서 영롱(玲瓏)을 불러오거라. 영롱의 비파 연주로 흥을 돋워야겠다.”
문가에 서 있던 점원이 불안해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기, 그게, 영롱 낭자가 선약이 있어서요.”
젠장, 왜 또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점원이 속으로 욕을 했다.
“그런데 영롱 낭자는 정말로 선약이 있어서 그런 거지, 다른 건 절대······.”
점원이 저도 모르게 말을 덧붙이다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격노한 고 관인에게 뺨을 맞았다.
“내 앞에서 썩 꺼져!”
고 관인이 호통쳤다. 바닥에 고꾸라진 점원이 정신을 못 차린 채 넋을 놓고 있자, 고 관인의 수하 두 명이 그를 양쪽에서 붙잡아 일으켰다.
“다른 게 있는 게 아니라고?”
고 관인이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때리더라도 얼굴을 때리지는 말아야 하고, 욕을 해도 아픈 곳을 건드리지는 말아야 하는 법이다. 다짜고짜 뺨부터 맞은 점원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때의 화괴 다툼 이후로, 고 관인은 평소와 다름없이 덕승루를 찾았다. 이는 그가 그 일을 전혀 개의치 않아 한다는 뜻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가 그 일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라서였다. 하지만 그게 남들이 면전에 대고 그 이야기를 언급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관인, 고 관인,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점원이 금방이라도 바지에 오줌을 쌀 것 같은 표정으로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작은 소란 때문에 주위의 시선이 고 관인의 무리를 향해 꽂혔다. 별실의 몇몇 사람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밖을 살피기도 했다.
“괜한 소란 피우지 말게. 당장 내일이라도 경성을 뜨고 싶어 그러는가?”
진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진호는 고 관인이 당장 내일 경성에서 쫓겨나든 말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멍청한 고 관인이 정말 내일 경성을 뜨게 된다면, 분명히 오늘의 치욕 또한 정 낭자 탓을 하며 정 낭자를 더욱 미워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