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18
교랑의경 618화
경왕부 안. 내시와 막료들은 속이 타들어 가는 심정으로 진안 군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경왕부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가 다급하게 그를 에워쌌다.
“전하, 왜 이렇게 오래 계시다 오셨습니까?”
막료 한 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마마께서 오찬을 준비하셨다.”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막료들의 얼굴이 일순간 사색이 되었다.
“전하, 말씀드렸잖습니까! 절대로 궁에서 식사하시면 안 된다고요. 어서 이 태의를 불러오너라!”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은 시기가 시기인지라, 뭐든 주의하고 철저히 대비해야 합니다.”
막료들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표정 없는 얼굴로 걸음을 옮기다가, 갑자기 안색이 바뀌면서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전하?”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진안 군왕을 살폈다. 진안 군왕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고 소매 속을 쳐다보았다.
“내가 소매 안으로 차 반 잔을 버렸다.”
진안 군왕이 갈라진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했다.
“내가 소매 안으로 차 반 잔을 버렸어.”
무슨 뜻이지?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로 진안 군왕의 시선을 따라 그의 소매를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의 오른쪽 소매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내가 소매 안으로 차를 반 잔이나 버렸는데!”
진안 군왕이 갑자기 목청을 높여서 외쳤다. 그가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안 군왕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마, 소손이 소매 속으로 차를 반 잔이나 버렸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안 군왕이 입에서 검붉은 피를 뿜어내며 앞으로 푹 쓰러졌다.
“전하!”
“어서 이 태의를 불러라!”
정사낭이 식당에서 나오자, 앞을 지키던 시종 한 명이 조용히 좌우를 살피다가 손짓했다.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말을 끌고 다가왔다.
“문유 아우, 그럼 우리는 이만 가겠네. 아우가 떠날 채비를 마치고 출발할 때 다시 배웅하겠네.”
동료들이 포권의 예를 표하자 정사낭이 서둘러 답례했다.
“노부인의 일에 유감을 표하네.”
동료들이 다정하게 말했다.
정사낭이 휴가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다들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정 대노야와 이노야가 강주에 계신 노모의 병세가 위독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전 서둘러 강주로 돌아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은 정사낭까지 강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노부인의 병세가 차도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정사낭이 다시 한번 감사의 예를 표하고 떠나는 동료들을 배웅했다.
“사공자님도 그만 돌아가시지요.”
시종이 가까이 와서 말했다.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에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나 시종이 재빨리 정사낭의 앞을 막은 덕에 그 사람은 정사낭 가까이로 가지 못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은 시종의 어깨에 부딪혀 아이고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때문에 품에 안고 있던 작은 보따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사공자님, 잠시만요.”
춘령이 겁먹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상대가 춘령이라는 사실을 알아본 정사낭이 깜짝 놀랐다.
“춘령?”
“사공자님, 저, 저, 저는······.”
춘령이 말을 더듬다가, 결국 말 한마디를 다 하지 못한 채 작은 보따리를 시종의 손에 밀어 넣었다.
“이거, 저희 언니가 돌려드리라고 한 거예요.”
춘령이 큰소리로 외치고는 곧장 몸을 돌리고 뛰어갔다.
언니?
“춘령!”
정사낭이 다급하게 춘령을 불렀지만, 춘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이게 뭐지?
정사낭은 시종이 보따리를 푸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사공자님, 비전 증서입니다. 오만 관이에요.”
시종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비전 증서 위에 쓰인 금액을 읽었다.
오만 관!
저희 언니가 돌려드리라고 한 거예요.
정사낭이 인파 속으로 사라져가는 춘령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종의 손에서 비전을 가져왔다.
이게 지금 다 뭐 하는 거야!
“춘령, 기다려라!”
정사낭이 한숨을 쉬고는 말에 올라타는 것도 잊은 채 춘령의 뒤를 쫓아갔다. 시종들이 서둘러 정사낭을 따라갔다.
같은 시각 진호는 정씨 저택의 대문을 두드렸다.
“진 공자님.”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 진호를 본 시녀가 조금 놀란 눈치로 그를 불렀다가 이내 웃으면서 예를 표했다.
“식사는 했어요?”
진호가 회랑 아래로 시선을 둔 채 물었다.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얇은 치마저고리로 팔을 반쯤 가리고, 구름처럼 풍성한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이 묶어 올린 정교랑이 회랑 아래서 고개를 돌렸다. 정교랑의 손에는 새들을 어르며 놀 수 있는 길고 가느다란 풀이 들려 있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대답했다.
“한발 늦었네요.”
진호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손을 들었다.
“그럼 차를 마시러 가자고 하는 건, 아직 늦지 않았죠?”
시녀가 고개를 돌려서 반근을 불렀다.
“반근이 수고할 거 없다.”
진호가 말하고는 정교랑에게 공손하게 초대하는 자세를 취했다.
“낭자와 밖에서 차를 한잔해도 될는지요?”
“이번엔 무슨 꽃을 보러 가는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지난번에 두 사람이 함께 나들이를 나가 벚꽃을 구경했던 일을 떠올린 진호의 눈가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자고로 유월에는 연꽃이 예술이지요.”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옷 갈아입고 올게요.”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정교랑이 옷을 갈아입으러 안으로 들어가자, 반근이 시녀를 향해 손짓했다.
“언니, 오늘 점포에 나갈 거야?”
반근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시녀가 반근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왜? 늑장 부리고 싶어?”
“아니. 그게 아니라, 조금만 더 서두르면 아씨의 혼례복이 완성돼서 그래.”
반근이 충혈된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시녀가 반근의 붉어진 눈을 보고는 속상한 마음에 반근의 이마를 손끝으로 콕 찔렀다.
“내가 말했지. 급할 거 없다고. 당분간은 혼사를 치를 수 없다니까.”
반근은 듣기 싫은 말을 들었다는 투로 발을 구르면서 입술을 삐쭉였다.
“언니! 아무튼, 나는 일단 아씨의 혼례복을 다 만들어 놔야겠어.”
시녀가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가 봐, 가 봐. 내가 아씨랑 같이 다녀올게.”
정교랑이 옷을 다 갈아입고 진호와 함께 문을 나서려고 할 때, 찬합을 든 반근이 쫓아왔다.
“이 간식들 지금 막 만든 거예요. 나들이하며 먹기에도 좋을 거고요.”
진호가 웃었다.
“꽃놀이하는 곳에는 없는 게 없을 텐데.”
“거기에 우리 아씨께서 직접 만든 간식도 있대요? 진 공자님은 안 드시고 싶은가 봐요?”
반근이 질 수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나중에 또 먹으면 되지.”
진호가 여유롭게 말했다.
“나중에는 못 드실 수도 있잖아요.”
반근이 웃으면서 어린 시녀에게 찬합을 안겨 줬다.
나중에는 못 드실 수도 있잖아요.
반근이 가볍게 던진 농담에 진호의 웃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자, 자, 그만 갈까요?”
시녀가 말했다. 드디어 걸음을 떼나 싶었는데, 진호가 갑자기 어린 시녀의 품에서 찬합을 빼앗아 반근에게 돌려주었다.
“어?”
반근이 놀라서 소리쳤다.
“이건 저녁에 네 아씨가 돌아온 뒤에 먹자. 내 것도 남겨 줘.”
진호가 웃으면서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진 공자님이 어째 주 공자님처럼 고집이 세진 것 같아.”
반근이 투덜댔다.
“아유, 됐어. 뭐하러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써. 나가서 진 공자님이 사주시는 거 먹지 뭐. 돈 쓰고 싶다고 하시는데, 쓰게 둬야지. 내가 돌아오면서 네 것도 많이 챙겨 올게.”
시녀가 웃으면서 반근을 다독이자, 반근은 그제야 헤헤 웃으면서 정교랑 일행을 배웅했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침상 끝에 걸터앉아 있던 진안 군왕이 허리를 숙이며 또다시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타구를 들고 있던 시녀의 몸에 피가 한가득 튀자, 시녀는 겁에 질린 채 울먹이면서 목청껏 태의를 불렀다.
밖에서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진안 군왕은 구토를 얼마 하지도 못하고 온몸에 힘이 빠져서 엎드린 자세로 축 늘어졌다. 내시가 서둘러 진안 군왕을 부축하여 그의 몸을 뒤집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진안 군왕의 얼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안 군왕의 얼굴은 검푸른 색으로 변해 있었다.
“해독할 수 있다면서요! 괜찮아질 거라면서, 왜 전하께서는 아직도 피를 토하시는 겁니까! 왜 안색이 검푸른 빛을 띠냔 말입니다!”
내시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이 태의를 향해 소리쳤다. 이 태의의 몸이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고 진안 군왕의 맥을 짚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 태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때, 침상에 누워있던 진안 군왕이 또 격렬하게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진안 군왕의 온몸으로 피가 튀자, 방 안의 시녀들이 울음을 터트리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 태의, 도대체 할 수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어서 전하를 살려내란 말입니다! 어서 전하를 살려내라고!”
내시가 미친 사람처럼 이 태의의 멱살을 잡고 그를 흔들었다. 이 태의가 서둘러 약 상자를 열고 금침을 꺼내 들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할 수 있냐고? 치료해낼 수 있냐고?
모르겠어. 약을 쓰고, 침을 놨는데도, 왜 아직도 안 되는 거지?
“할 수 없소!”
이 태의가 금침을 내팽개치고 진안 군왕의 어깨를 잡았다.
“전하의 몸에는 옛날부터 쌓였던 여독이 남아 있어서, 반 잔만 마셨다 하더라도 독이 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오! 난 못 해. 난 전하를 살려낼 수 없소!”
내시가 이 태의를 옆으로 밀치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어서 정 낭자를 모셔오너라.”
정 낭자.
미동 하나 없었던 진안 군왕이 갑자기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던 이 태의의 팔을 붙잡았다.
“전하!”
깜짝 놀라서 진안 군왕을 쳐다본 내시가 눈물을 머금고 그를 애타게 불렀다.
“전하.”
진안 군왕이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이 태의.”
진안 군왕이 손을 허공에 올리자, 이 태의가 서둘러 그의 손을 맞잡았다.
“전하, 전하. 지금 정 낭자를 모시러 갔습니다.”
이 태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 낭자를 데려오지 마십시오. 정말, 정말 이 태의가 나, 나를 살려줄 수는 없는 겁니까? 정, 정 낭자에게는 원칙이 있습니다.”
진안 군왕이 안간힘을 쓰면서 한 글자씩 내뱉었다.
원칙?
이 태의가 흠칫 놀랐다.
“병을 고쳐 준 사람과는 혼인을 맺지 않는······.”
진안 군왕이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이 태의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지금 그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이 태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없다. 정 낭자를 모셔 올 게 아니라, 당장 전하를 그리로 모셔라!”
반근이 손에 쥔 바늘과 실을 내려놓고 눈을 비볐다.
“반근 언니, 물 좀 마셔요.”
어린 시녀가 서둘러 반근에게 물을 건네자,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잔을 받았다.
이때,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밖에서 전해져 왔다.
“무슨 일이지?”
반근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반근이 고개를 돌리고 밖을 내다보자, 인상이 흉악한 사람들 무리가 살벌한 모습으로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 낭자, 정 낭자, 사람 좀 살려 주십시오!”
반근이 깜짝 놀라서 손을 떨었다. 물잔에 들어있던 물이 반근의 앞에 놓여있던 혼례복에 쏟아졌다.
“어서 정 낭자를 모셔와!”
한 시위가 고함을 치면서 황씨의 옷을 잡아당겼다.
“정말로 집에 안 계세요. 정말이에요.”
황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당에 있던 몸종들과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반근이 황급히 뛰어나와서 소리쳤다.
“아씨께서는 출타하셨어요.”
“반근 낭자.”
내시 한 명이 반근을 불렀다. 반근이 그 내시를 쳐다보고 놀라며 내시의 뒤에 있던 가마로 시선을 옮겼다.
저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