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20
교랑의경 620화
진호가 붓을 쥔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자, 옆에 서 있던 시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진 공자님, 아직 한 획 남았어요.”
“이 한 획이 너무 중요해서 그런지, 붓을 내리기가 무섭네.”
진호가 대꾸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서 진호를 쳐다보았다.
“낭자가 마지막 한 획을 그어 주는 건 어때요?”
진호가 손에 쥔 붓을 정교랑에게 건넸다. 정교랑이 붓을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정교랑!”
주복의 외침과 함께, 붓이 탁자 위로 떨어져 검은 먹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이고, 그림 아까워서 어째!”
시녀가 소리쳤다.
“미안해요. 내가 못 받았네요.”
정교랑이 말하자, 진호가 웃었다.
“제가 잘 못 건네서 그래요.”
진호가 성큼성큼 탁자 쪽으로 걸어오는 주복을 쳐다보고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다 저놈 때문입니다.”
주복은 진호의 말을 무시한 채 정교랑의 손목을 낚아챘다.
“빨리 가자.”
주복이 고개를 홱 돌리고 정교랑을 끌고 가려 했다.
“무슨 일이에요?”
놀란 시녀가 발을 구르면서 외치고는 재빨리 두 사람을 따라갔다. 정교랑은 벌써 주복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탁자 뒤에 앉아 있던 진호도 한숨을 쉬고 정교랑의 뒤를 쫓아갔다.
“정 낭자.”
갑자기 누군가가 그늘 밑에서 걸어 나와 정교랑의 앞을 막았다. 그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쟁반 하나를 받치고 있었고, 쟁반 위에는 고이 접힌 종이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누가 말을 전해 달라고 해서요.”
깜짝 놀란 진호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은 일순간 사색이 되었고, 곧이어 몸까지 미세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진호가 몸 옆으로 늘어트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빌어먹을 놈! 빌어먹을 놈!
“빌어먹을 놈!”
주복이 앞을 막아선 자에게 호통치고는 비키라며 손짓했다.
“썩 꺼져!”
하지만 그 사람은 미동도 없이 서서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정 낭자, 이걸 안 보고 가신다면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주복이 쟁반 위에 놓인 종이를 가져가려고 손을 뻗자, 그 사람이 몸을 피했다.
“안 보신다면, 분명 후회할 겁니다.”
그 사람이 같은 말을 되뇌자, 격노한 주복이 한 손으로 상대의 멱살을 쥐고 들어 올렸다. 주복 때문에 쟁반이 흔들려 얇은 종이가 쟁반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정교랑은 떨어지는 종이를 낚아채 망설임 없이 종이를 펼쳤다.
“아씨?”
정교랑의 표정을 살피던 시녀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물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에 시녀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와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 낭자가 저기 있다!”
“정 낭자!”
두 시위가 정교랑을 향해 달려왔다.
“정 낭자, 전하께서 낭자의 거처에서 낭자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속히 돌아가시지요.”
시위가 숨도 채 고르지 못하고 다급하게 말했다.
전하!
시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녀의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죠?”
정교랑이 시위들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묻긴 뭘 물어, 어서 가자.”
주복이 이를 악물며 조용히 읊조리고는 정교랑의 손목을 더욱 세게 잡았다. 정교랑이 손목을 틀어 주복의 손을 뿌리쳤다. 빈손이 된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놀란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낭자.”
시위가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전하의 몸에 문제가 생겼는데, 이 태의마저도 전하를 구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빨리 저희와 같이 돌아가시지요.”
시녀가 작게 헉 소리를 내고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문제길래 태의도 못 고친다고 하고, 아씨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지?
혹시, 죽을병? 세상에나, 죽을병이 분명해!
어떻게 그럴 수가!
시녀가 서둘러 뛰어가려던 찰나, 여전히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종이를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정교랑이 보였다.
“전하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없어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경악했다.
“낭자!”
두 시위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정교랑의 말에 깜짝 놀란 것은 주복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선이 정교랑이 손에 쥐고 있는 종이로 향하자, 그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굳어 버렸다.
누구지?
“낭자, 아직 전하의 증상을 보지도 않았잖습니까!”
시위가 말했다.
“볼 필요 없어요. 전하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없습니다. 다른 의원을 찾아봐요.”
이때, 뒤늦게 뛰어 들어온 반근이 정교랑의 말을 듣고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반근 또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사람을 잘못 본 건가? 우리 아씨 맞나?
아씨,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죠?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게냐!”
방 안에 있던 이 태의가 좌불안석하며 밖을 두리번거렸다. 태의의 등 뒤로 다시 한번 낮은 신음이 들려오고, 내시가 비명을 질렀다.
“태의, 태의!”
이 태의가 재빨리 몸을 돌려보자, 가마 위에 누워 있던 진안 군왕이 또 피를 토하고 있었다. 환해 보였던 방 안은 순식간에 진안 군왕의 안색과 비슷한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이 태의가 진안 군왕에게 달려들듯 다가가 금침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의 앞섶을 풀어 헤치고 왼쪽 가슴 주위에 침을 놓았다.
“태의, 전하의 몸까지 까매지기 시작했습니다.”
내시가 소리쳤다.
“나도 알고 있네!”
이 태의가 외치고는 진안 군왕의 가슴을 훑어보았다.
나도 잘 알고 있다고. 군왕이 작고 여린 어린아이일 때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본 적이 있어! 그때의 야위고 왜소했던 몸이 이제는 탄탄하고 튼실해졌는데, 왜 달라진 게 없지? 왜 또다시 검게 변했냐고!
예전과 똑같아.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결국 사람은 정해진 숙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야.
“정 낭자는 아직인가!”
이 태의가 고개를 홱 돌리고 처절한 소리로 외쳤다.
“왔습니다. 왔습니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시끄러운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문가로 달려 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시위 둘뿐이었다. 간절히 기다리던 정교랑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인의 걸음이 느려 뒤늦게 도착하는 건가?
이 태의가 시위들을 밀치고 뒤를 내다보았다.
“대인, 정 낭자가 고치지 않겠다고 합니다.”
시위 한 명이 주저앉다시피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울먹이면서 말했다. 방 안의 사람들은 당혹스러움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무슨 헛소린가! 정 낭자가 전하를 고치지 않겠다고 할 리가 없잖아!”
고개를 돌린 이 태의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대인, 정 낭자가 정말로 고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명의를 부르라면서요!”
다른 시위가 소리쳤다. 내시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가 바닥에 엎드린 시위의 목덜미를 잡고 이를 부득 갈면서 말했다.
“정 낭자가 고치지 않는다고 했다고? 어떻게든 정 낭자를 데려왔었어야지!”
시위가 고개를 들고 내시를 쳐다보았다.
“그러려고 했지만, 못 데려왔습니다.”
내시는 그제야 시위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먹으로 맞은 듯한 새파란 피멍이 군데군데 보였다.
“오지도 않을뿐더러, 너희를 때리기까지 했어?”
중얼거리던 내시의 동공이 떨려왔다.
“정 낭자는 진씨 가문 공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시위가 덧붙여서 말했다.
진씨 가문 공자, 진씨 가문이라면······.
그래서 집에 없었구나, 그래서 갑자기 연꽃을 보러 간 거였고, 그래서······.
“난 못 믿겠다! 정 낭자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내가 직접 가서 찾아오겠다. 내가 직접!”
이 태의가 갑자기 목청을 높이고 소리치면서 문가를 향해 걸어가려 했다. 한 막료가 재빨리 이 태의를 덥석 붙잡았다.
“이사신(李四申)! 전하께서 더는 기다리실 수 없소! 정 낭자가 고치지 못한다면, 대인이 고쳐야 하오!”
이 태의가 고개를 저었다.
“난 못 하오. 그때도 제대로 고치지 못했어. 그때도 내 손으로 전하를 제대로 고치지 못했다고! 지금은 더더욱 고칠 수가 없어!”
이 태의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쉼 없이 중얼거리자, 막료가 손을 높이 들고 이 태의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자네가 고치지 못하면, 전하는 자네의 손에 죽는 것이라는 걸 왜 모르나! 어렸을 때처럼, 전하는 자네의 손에 죽는 것이라고!”
막료가 고함을 질렀다.
어렸을 때처럼.
– 태의, 태의, 나 죽기 싫어요.
어린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 태의의 소매를 쥐었다. 그러고는 가엾은 새끼 고양이처럼 이 태의의 품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 나를 살려 줄 수 있어요?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부왕과 어머니께서 나를 데리러 오기로 하셨단 말이에요. 난 기다려야 해요.”
이 태의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좋소이다. 내가 고치겠소. 내가 고치겠다고! 잘못된다 해도 기껏해야 내 목숨 하나 날아가는 것일 테지? 죽는 게 뭐가 무섭다고. 나는 무섭지 않소.”
이 태의가 무언가 결심한 듯 소리쳤다.
소란스러운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 시야로 흐릿하게 들어오는 사람들의 어지러운 뒷모습에 진안 군왕이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건가?”
진안 군왕이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기를 쓰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전하, 그만 돌아가시지요.”
내시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돌아간다고? 왜 돌아가? 정 낭자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왜?
“전하, 더는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내시가 더욱 울먹이는 목소리로 힘겹게 대답했다.
왜 기다리지 않는다는 거야? 왜 더 기다리지 않고?
“아니다. 기다려야 한다. 정 낭자를 기다려야 해. 기다리기로 해놓고, 내가 낭자를 기다리기로 해놓고, 먼저 가 버리면 안 돼.”
진안 군왕이 팔걸이를 움켜쥐고 명령했다.
“가마를 내려라.”
“전하!”
내시가 눈물을 흘리면서 이를 악물고 시위들에게 손짓했다.
“가자.”
가마가 천천히 문밖을 향해 갔다. 흔들리는 가마 때문에 진안 군왕이 팔걸이를 놓치면서, 몸이 힘없이 뒤로 눕혀졌다.
“안 돼.”
진안 군왕이 소리쳤다. 가마가 갑자기 덜컹거리더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가마를 들고 있던 시위들이 깜짝 놀라 앞뒤를 살펴보자, 진안 군왕이 가마 안에서 손을 뻗어 문틀을 붙잡고 있었다.
“전하!”
내시가 더욱 울컥하여 눈물을 쏟으면서 진안 군왕의 팔을 잡았다.
“전하, 손을 놓으십시오.”
안 돼. 기다려야 해. 기다려야만 해! 나는 정 낭자가 오기만을 기다릴 거야.
진안 군왕은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문틀을 꽉 붙잡았다. 그런 그의 손마저 이미 얼굴만큼 거뭇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가자!”
내시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치면서 문틀을 쥐고 있던 진안 군왕의 손을 힘껏 떼어냈다.
몇 번이나 피를 토하고, 거의 죽기 직전일 정도로 몸이 허약해진 진안 군왕이었지만, 문틀을 붙잡고 있는 힘은 가히 괴력에 가까울 정도였다. 쓸 수 있는 마지막 힘까지 끌어모아 문틀을 쥐고 있는 듯, 내시는 좀처럼 문틀에서 진안 군왕의 손을 떼어내지 못했다.
“가자니까!”
내시가 목청을 높이고 울부짖자, 시위들이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문틀을 붙잡던 진안 군왕의 손이 열려 있던 문짝으로 향했다. 문짝이 가마에 부딪히는 쾅 소리와 함께 시위들의 발걸음이 휘청였다.
다른 시위들이 재빨리 다가와 문짝을 반대편으로 치우자, 가마는 다시 안정적으로 나아갔다. 진안 군왕의 손은 여전히 가마 밖으로 나와 있었고, 그의 손에는 문짝에서 손가락으로 파내다시피 뜯어낸 작은 나무 조각이 쥐여 있었다.
기다려야 해. 기다려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