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27
교랑의경 627화
“내가 전하께 쓴 침술은 정 낭자를 보고 배운 것이오. 당초 진 노태야의 병세가 위독했을 때, 정 낭자가 썼던 침술을 옆에서 보고 배웠지.”
“그럼 그건 이 태의 스스로 배운 것이지요. 그러니 이 태의가 전하의 목숨을 구한 겁니다. 정 낭자에게만 의지했더라면, 전하께서는 일찍이 돌아가셨을 겁니다.”
막료가 고개를 저으면서 대꾸하자, 이 태의의 표정이 굳어졌다.
“고 선생, 그리 말하는 것도 틀렸다 볼 순 없지만, 정 낭자가 아니었다면, 전하께서는 일찍이 오 년 전에 목숨을 잃으셨을 것이오.”
막료와 내시가 흠칫 놀랐다.
“우리처럼 손재주를 업으로 삼는 사람은 항상 스승을 존경해야 하오. 그러니 침 하나의 가르침도 스승으로 모셔 마땅하지. 고 선생이 정 낭자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니나, 최소한 내 앞에서는 정 낭자 험담을 하지 마시오.”
이 태의가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떠났다.
막료와 내시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 태의는 다 좋은데, 사람이 저렇게까지 겸손해서야 원.”
막료가 고개를 저으며 실소를 터트렸다. 내시가 머뭇거리다가 진안 군왕이 누워 있는 방을 바라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면, 이 태의 말대로 정 낭자를 한번 모셔 오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번에 몸이 정말 많이 상하셨잖습니까.”
막료가 내시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정말 많이 상하셨지. 지금 전하의 몸으로는 조금의 풍파도 견디지 못하실 걸세. 그래서 나는 감히 그런 위험을 무릅쓸 수 없네.”
“정 낭자가 어제 문밖에서 밤새 앉아 있었다지요?”
내시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그렇다더군. 수위들 말로는 우리가 궁에 사람을 보낼 때가 돼서야 자리를 떠났다고······.”
막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안 군왕의 방에서 쿵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들은 내시가 쏜살같이 방 안으로 달려갔다. 막료가 내시를 뒤따라 뛰어 들어갔을 무렵에는, 시녀 두 명이 무릎을 꿇고 진안 군왕을 부축하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휘장 기둥을 붙잡고 몸을 일으키려고 버둥댔다.
“또 구토하시려는 건가?”
내시가 놀라서 사색이 된 얼굴로 물었다.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침상 위에 걸터앉은 진안 군왕이 힘없이 뒤로 쓰러졌다.
“여길, 여길 왔었다고?”
진안 군왕이 물었다.
누굴 말하는 거지?
내시가 멈칫했다.
“정 낭자가, 어제, 여길 왔었다고?”
진안 군왕이 내시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끊어 말하자, 막료가 내시를 흘겨보고는 한발 먼저 나아가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막료가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숨을 몰아쉬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몸 옆으로 늘어뜨린 두 손을 꼭 쥐고 있던 진안 군왕의 얼굴에서 차츰 웃음기가 걷혔다.
“그러게 내가, 내가, 기다리자고 했잖나. 내가, 정 낭자를 기다리지 않아서, 내가, 믿음을 져버린 것이야. 정 낭자가, 화, 화나진 않았겠지?”
진안 군왕이 침을 삼켜 가며 어렵게 말했다.
“전하! 정 낭자가 신뢰가 없는 사람입니다. 전하께서 믿음을 져버리신 게 아닙니다.”
막료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진안 군왕은 웃음을 터트렸다.
“허튼소리. 만약 이 세상에서, 아직,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남아 있다면, 그건 분명히, 정 낭자일 걸세.”
진안 군왕은 숨을 헐떡이느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전하, 정 낭자는 어제 전하의 상태를 보지도 않고 치료를 거절했습니다.”
막료가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면서 말했다.
“그럼, 정 낭자가, 치료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야.”
진안 군왕이 곧바로 반박했다.
막료는 눈만 부릅뜰 뿐, 진안 군왕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내시는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녀가 건넨 손수건으로 진안 군왕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잠깐의 시도와 짧은 몇 마디만 했을 뿐인데, 진안 군왕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어제, 왜 정 낭자를, 안으로 들이지 않았는가?”
진안 군왕이 물었다.
“적군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었던 때인지라, 정 낭자를 섣불리 안으로 들일 수 없었습니다. 어제는 정말 상황이 너무 위험하고 긴박했습니다.”
막료가 대답했다.
그 여인이 어제 문밖에서 밤새 앉아 있었다고?
그 여인이 어제 문밖에서 밤새······.
“정 낭자를, 만나야겠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전하, 지금 이런 시기에 어찌!”
막료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진안 군왕은 막료를 쳐다보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정 낭자를 만나야겠다.”
“뭐지?”
정씨 저택 앞에 도착한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저택 대문에 붙어 있는 하얀 종이를 바라보았다. 선홍색 도부(桃符: 악귀를 쫓는 복숭아나무 부적) 또한 가려져 있었다.
상중인가?
“나를 찾아왔다고요?”
방에서 걸어 나온 여인이 회랑 아래에 서서 물었다. 문가에 서 있던 남자가 서둘러 예를 표하고는 조용히 말했다.
“소생은 진안 군왕 전하의 사람입니다.”
남자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는 차마 회랑 아래 선 여인을 똑바로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 옆에 서 있던 시녀를 곁눈질로 흘깃 쳐다보았다.
눈이 새빨갛게 부었고,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하군. 정말로 상을 치르는 중인가?
경왕부 사람들은 경계 태세를 취하며 밤을 꼬박 지새웠고, 조정 중신들과 금군 병사들의 동태를 살피느라 잔뜩 긴장해 있던 터라 다른 소식은 일절 접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죠?”
정교랑이 물었다. 남자가 잡생각을 떨치고 다시 한번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전하께서 낭자를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집에 상이 있습니다. 집안 어른이 계시지 않아 직접 상을 치러야 해서, 지금은 따로 손님을 만나기 힘들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남자가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정씨 가문에 또 일이 생겼다.
소식은 이미 어제부터 퍼져나가기 시작한 터라, 오늘은 다리 위에서 차를 파는 노점의 점원마저도 그 일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었다.
“주 낭자가 품에서 비수를 팍 꺼내고는 비장하게 한마디 하더이다. ‘당신이 내 마음을 저버린다면, 소인이 당신의 그 마음을 파내 버리고 말겠어요.’”
점원은 한 손으로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난초 모양을 만들고, 국자가 들린 다른 한 손으로 허공을 휘휘 저으며 연극에 심취해 고개를 흔들었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 중 하나가 점원의 말을 끊었다.
“어이, 어이. 그게 아니잖소. 정 공자를 죽인 건 주 낭자의 시녀라던데? 정 공자가 주 낭자를 강제로 겁······.”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오만 관이나 내놓은 정 공자가, 강제로? 오만 관이면 덕승루에 있는 모든 기녀와 하룻밤을 보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데, 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당시 별실 안에는 주 낭자와 정사낭, 그리고 그들의 시중을 드는 시녀와 사환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정씨 가문의 시위들이 바로 문밖에 서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하고요.”
“차에 약을 탔다더군. 정사낭을 죽인 건 주 낭자의 시녀인 춘령이고. 아, 춘령도 강주 사람이라고 하던데?”
“그럼 그 시녀는 무슨 이유로 정사낭을 죽인 거요?”
소문을 들은 막료와 수하들이 한마디씩 거들던 사이, 한 막료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수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주 낭자는 어제 감옥에서 허리띠로 목을 매달아 자결했고, 춘령은 정 낭자가 현장에서 목을 꺾어 죽였어요. 당시 정 낭자는 별실에 도착하자마자 춘령에게 딱 한마디를 물었다고 하는데.”
“네가 한 짓이냐?”
어딘가에서 허약한 목소리가 천천히 들려왔다.
갑자기 이 대목에서 저런 목소리가 들리니, 수하와 막료들은 깜짝 놀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모두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베개에 몸을 기댄 채 침상 위에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던 진안 군왕이 보였다.
“그 여인이 그리 물어봤지?”
진안 군왕이 말을 덧붙였다.
수하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이자 진안 군왕은 힘없이 미소지었다.
“네. 전하께서 생각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정 낭자의 물음에 그 시녀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정 낭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하가 말끝을 흐리면서 두 손으로 목을 꺾는 시늉을 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누군가를 직접 죽인 적은 없지만, 살면서 한 번 이상은 살인을 목격한 적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정교랑이 춘령의 목을 꺾어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다들 표정이 살짝 굳었다.
여인이 이성을 잃고 칼로 마구 찔렀다면, 거기까진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손으로 사람의 목을 꺾어 죽였다면······.
그건, 피를 보는 것보다 더 참혹한 방식이야.
“그래서 어제 정 낭자가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고 제가 그랬잖습니까.”
한 사내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사내에게 향했다.
“자네가 말했었던가?”
누군가가 물었다.
말했긴 했나?
“어제 보니까, 정 낭자의 옷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습니까.”
사내가 대답했다.
어제 정 낭자는 덕승루에서 곧장 이리로 왔던 건가?
“이번 일이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
진안 군왕이 천천히 말했다.
“그 말씀인즉, 정 낭자가 전하를 치료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누군가가 정사낭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했다는 겁니까?”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너무 공교롭지 않나.”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전하, 세상에 공교로운 일이 어디 한둘입니까? 정사낭이 덕승루에서 겁도 없이 날뛸 때, 정 낭자가 나서서 천금을 썼던 것도 주 낭자의 계략이었지요. 주 낭자에게 당한 게 있으니, 정사낭은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주 낭자를 희롱했을지 누가 압니까? 정사낭을 납치하는 게, 그리 쉬웠겠습니까? 당시 정씨 가문의 시위가 넷이나 현장에 있었답니다. 주씨 가문의 사람과 정 낭자가 덕승루로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문 앞에 서 있던 시위들은 한참 후에야 윗전이 죽은 걸 발견했을 겁니다.”
고 선생이 조소를 보이면서 말을 덧붙였다.
“제가 보기에는 누군가가 정사낭을 납치한 것도 아니고, 당시 정사낭이 덕승루를 떠나지 못할 만한 상황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정사낭 본인이 덕승루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거죠.”
말을 끝낸 고 선생이 시위 한 명을 불렀다. 문밖에서 시위가 들어오자, 고 선생이 말했다.
“그날 네가 본 것과 정 낭자가 대답한 바를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예. 그날 정 낭자는 진씨 가문의 십삼 공자와 꽃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하의 병은 고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전하의 상태는 볼 필요도 없고, 자기는 고칠 수도 없다면서 저희더러 다른 의원을 부르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래도 저희는 어떻게든 정 낭자를 데려오려 했는데, 주씨 가문의 육공자가 갑자기 저희를 때렸습니다.”
시위의 말이 끝나자, 고 선생이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전하, 들으셨는지요? 정 낭자는 그날 진십삼과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 선생이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상소문으로 가득 찬 함이 놓여 있었다.
“저건 태후마마께서 전하께 보내온 상소문 더미입니다. 전부 전하를 탄핵하는 내용이지요. 그리고 저 상소문을 쓰도록 앞장선 자가 바로 진씨 가문 자제이고요.”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을 바라보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아무래도 정 낭자는 진씨 가문을 선택한 듯합니다.”
실내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말없이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진안 군왕을 본 내시가 마른기침을 했다.
“고 선생, 말씀이 많으셨습니다.”
내시가 웃으면서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진안 군왕을 부축했다.
“전하께서 깨어나신 지가 얼마 안 되었잖습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습니다.”
진안 군왕도 지쳤는지, 내시의 손길을 따라 천천히 침상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