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29
교랑의경 629화
“예전에 나는······.”
정교랑을 바라보던 주복이 굳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바보라는 이유로 너를 괴롭혔어. 그러니까 네가 미워해야 할 사람은 나야. 너 자신이 바보라는 걸 원망해서는 안 된다고. 상처받고, 괴롭힘을 당하고,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탓할 게 아니라, 그렇다는 이유로 너를 괴롭힌 그 사람들을 원망해. 이 세상에 괴롭힘 받아 마땅한 사람은 없으니까.”
입꼬리를 올리며 웃던 정교랑이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주복의 옷자락을 손으로 살짝 끌었다.
“앉아요.”
주복은 다리가 후들거려 자리에 주저앉다시피 털썩 앉았다.
“난 괜찮아요. 단지,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정교랑이 말하자, 주복이 곧바로 물었다.
“그 말?”
정교랑이 마당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교랑은 오래전 정평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당신이 원하는 게 있으면, 당연히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고군분투한다고 해서,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노력도 했고 애도 썼는데 왜 그렇게 됐냐고요?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은 생각해 봤습니까? 그들도 똑같이 노력했을 텐데, 당신만 성공하고, 남은 실패하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당신에게도 사정이 있겠지만, 그건 남들도 똑같습니다. 어째서 당신한테만 당연할 거라는 기대를 하는 겁니까?”
주복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 그러니까 네 말은, 그놈들이 너와 정사낭을 계략에 빠트린 데에 무슨 타당한 이유라도 있다는 거야?”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당연히 타당하죠. 그들의 이번 목표는 아주 명확했어요. 진안 군왕을 죽여야만 했고, 꼭 이 계획을 성공시켜야만 했죠. 그러려면 가장 큰 변수를 제거해야 했는데, 그 변수가 바로 나였어요. 그리고 나를 막으려면 오라버니가 필요했죠. 그래서 그들은 오라버니를 납치했고, 날 막았어요. 잘 짜인 계획이 참 순조롭게 진행되었네요.”
정말 미쳤군!
주복이 다시 분을 못 이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좋아. 그럼 내가 지금 진씨 가문에 찾아가서 진호에게 큰절을 올릴게. 진호 그놈이 잘 짜둔 바둑판에 탄복한다고, 그놈이 정사낭을 죽인 일에 아주 탄복한다고!”
주복이 억지로 마지막 한마디를 이 사이로 내뱉었다.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사람이 죽인 게 아니에요.”
정교랑의 말에 주복이 흠칫 놀랐다.
– 난 몰라!
– 내가 모른다고 하면, 믿어주긴 할 거야?
– 내가 진작 알았다면, 정사낭을 납치하기까지 한 걸 알았다면, 난 절대로······.
– 주육, 자네는 알잖나. 그랬다면, 난 절대로······.
주복의 귓가에 진호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정말로 그자를 믿어?”
주복이 이를 부득 갈면서 물었다.
“믿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자리에 앉은 주복이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답답한 듯 고개를 숙였다.
“남이 무슨 말을 하든 다 믿는다고? 네가? 내가 널 모를 줄 알고?”
주복이 소리쳤다.
정교랑은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답답해하는 주복을 쳐다보면서 미소 지었다. 정교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복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번 일은 진호도 분명히 알고 있었어. 네게 연꽃 구경을 가자고 했던 그 순간부터, 너를 속이기 시작했던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다 결정된 셈이라고.”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정교랑은 주복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홀로 생각에 잠겼다.
맞아요. 그 순간부터였죠. 그 순간 이후로 닥쳐올 일이, 이런 일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정말 인생무상이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봐.”
주복이 말했다.
“우선 오라버니부터 안장한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오라버니의 부모님께 제대로 된 설명이라도 해 드려야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강주로 돌아가려고?”
정교랑은 주복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강주로 돌아간다라······.
정사낭 사건과 관련이 있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죽었다. 덕승루의 주인장은 이 일로 관부에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게 됐고, 기생 어미 막씨는 먼 곳에 노역으로 보내졌다. 두 사람은 이 일과 실질적으로 관련이 없는데도 큰 대가를 치르게 되었고, 정사낭 사건은 결국 기녀들의 질투로 빚어진 일로 흐지부지 끝났다.
“두고 봐. 이 일은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 아니라고.”
“그때 정 낭자의 의형제들이 죽었을 때 기억나? 폐하한테까지 가서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으라고 그 난리를 쳤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무려 사촌 오라비가 죽었으니.”
“어서 서둘러! 이번에는 꼭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지.”
“술동이도 두어 개 더 챙겨 가고, 하인들도 몇 명 더 데리고 가. 술을 뿌린다고 할 때, 아예 그 자리 주변을 에워싸서 받도록.”
온 경성 사람들이 또 한 번 성대한 술판이 벌어지길 기대하며 정사낭의 노제를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정사낭의 노제는 치러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 옆에 무자비(無字碑)가 하나 더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나 조용히 안장했다니!
오매불망 노제를 기대했던 경성 사람들은 실망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너무하네. 자리를 놓칠까 봐 평왕 전하를 안장하는 것도 구경하러 가지 않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평왕이나 보러 갈 걸 그랬어. 아, 이젠 회혜왕이라고 불러야 하나?”
“하긴, 그렇게 쪽팔린 일로 죽었는데,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서 뭐하겠어? 안 그래도 가문의 체면이 말이 아닐 텐데, 아무렇게나 매장하면 그만이지.”
“체면? 체면이 아주 크게 상하긴 했지요.”
진소가 진 노태야에게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정사낭의 죽음은 눈 뜨고 코 베인 격이지. 그런데도 말하지 못하는 고충이니.”
진 노태야가 대꾸했다.
“그럼 이번 일은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는 겁니까?”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여인이 어떤 행동을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아. 손해를 보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은 절대 아닌데.
“그야 물론 아니지.”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바깥을 가리켰다.
“새로 세워진 비석도 무자비가 아니더냐. 이번에는 누가 그 비석을 꾸며 줄지 두고 봐야지.”
진 노태야가 고개를 돌리고 병풍을 바라보았다.
저 병풍에 또 얼마나 많은 동그라미가 더해질지 모르겠군.
“이번 일은 정말로 진(秦)씨 가문에서 계획한 것이더냐?”
진 노태야가 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진소는 아내가 진 시강의 부인에게 이 일에 관해 물었던 게 생각났다.
진 부인은 긴말하지 않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깨끗한 자는 깨끗하다고 대답했다지.
“진씨 가문은 은혜를 원수로 갚을 정도로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 노태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배은망덕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때로는 가는 길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곤 하지.”
진씨 가문은 종친을 양자로 입적하는 일을 극구 반대하는 세력이야. 지금 유림은 두 분파로 갈렸지. 탄핵을 논하고, 양자 입적을 반대한다는 상소문을 올리는 자들, 그리고 장강주와 같은 편에 서서 양자 입적을 지지하는 자들로.
진소는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너는, 어떻게 할지 결정했느냐?”
진 노태야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진소가 고개를 들고 진 노태야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 마마.”
안비의 목소리가 황제의 침궁에 울려 퍼졌다.
“그거 아세요? 혹시 벌써 들으셨나? 큰일 났어요, 큰일!”
황후가 안비를 흘겨보았다.
“자네가 본궁에게 말해 줘야 알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야말로 큰일이 나는 거겠지.”
안비가 다급히 황후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마, 이를 어찌하면 좋죠? 결국 경왕이 태자가 될 상황이잖아요.”
황후가 피식 웃었다.
“뭘 어째? 버텨야지. 저들은 경왕이 아들을 낳기를 기다리는 게야. 저들이 그걸로 버티겠다면, 본궁도 그쯤은 기꺼이 버텨주지.”
같은 시각, 조당 안에서는 경왕이 처음으로 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내시가 큰 소리로 경왕을 태자에 책봉한다는 조서를 읽었다. 내시 몇 명이 경왕을 부축하면서 태자 책봉식을 마친 후, 태후가 경왕을 보좌할 네 명의 대신들을 호명했다.
“그러니 한동안 양위(讓位: 황제의 자리를 물려줌)는 없을 것이오. 경왕이 태자로 책봉되었으니, 훗날 경왕이 낳을 황손이 제위에 오를 것이외다.”
고능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소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앞으로 십여 년간, 수고해 주실 진 대인께 미리 감사드립니다.”
진소가 코웃음을 치고는 답례했다.
“당치도 않소이다. 본관의 노고가 고 대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고능준은 진소의 말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이 미소 지었다.
“저는 장강주 선생의 낯짝이 그리도 두꺼울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조정에 남아 있을 생각을 하다니. 원래 성격대로라면 벌써 화를 내면서 사직서를 던지고 나갔을 텐데요.”
고능준이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그 마음은 고 대인이 더욱 잘 알지 않소?”
진소가 냉소를 짓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고 대인, 이제 모든 일이 정리되었는데, 언제쯤 떠날 생각이오?”
고능준이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태자 전하께서 혼례를 치르는 것까지는 보고 가야지요.”
고능준은 감탄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어찌 됐든, 태후마마의 손자가 처음으로 치르는 혼사가 될 테니까요. 폐하께서 깨어나 경왕의 혼사를 직접 두 눈으로 보실 수 있다면, 참으로 기뻐하실 텐데.”
기뻐한다고? 태평성대를 이어가던 멀쩡한 조정이 이 지경으로 전락했는데 퍽이나 기뻐하시겠다. 이 일은 훗날 역사서에 얼마나 큰 웃음거리로 남을지.
그렇다 한들, 뭘 더 어쩔 수 있겠나? 정말로 종친을 양자로 입적하여 제위에 올린다면, 지금보다 더 혼란스러운 시국을 초래할지도 모르는데.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야.
태자가 후대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게지. 하루빨리 혼사를 치르고, 내년 즈음에 예전의 경왕을 닮은 총명하고 정상적인 황손을 낳는다면, 경왕도 제 몫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지.
진소가 집으로 돌아오자, 마차 한 대가 대문 앞을 떠났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내다보았다.
“노야?”
문지기가 조심스럽게 진소를 불렀다. 진소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십팔랑이 왔다 갔소?”
진소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쯤 떠난다고 하던가?”
진소가 또 물었다. 지난번 진소와의 논쟁 이후로, 진십팔랑은 한동안 진씨 저택에 발걸음을 끊은 터였다.
“요 며칠 사이에 간대요.”
진소 부인이 한숨을 쉬고 진소를 바라보았다.
“노야, 아무리 그래도 십팔랑은 아직 어리잖아요. 아비가 되어서 어린 딸자식이랑 그렇게 다퉈야겠어요?”
“내가 다투고자 하는 게 아니라, 십팔랑 스스로 내려놓지 못해서 그런 거요.”
진소가 대꾸했다. 진소 부인이 미소를 짓고는 진소 앞으로 옷 보따리 하나를 내밀었다.
“누가 부녀지간 아니랄까 봐, 고집 센 거까지 똑같네요. 둘 다 마음이 누그러졌으면서 누구 하나 먼저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않으니 원. 이거 봐요. 십팔랑이 지은 당신 옷이에요.”
진소는 옷 보따리를 보며 웃음을 숨기지 못하다가, 이내 민망한 듯 표정을 가다듬었다.
“내가 입을 옷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뭘.”
진소가 투덜대자 진소 부인은 못 말린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가서 한 번 입어 봐요, 몸에 맞는지.”
시선을 거둔 진십팔랑이 마차의 휘장을 내렸다.
“아씨, 다시 돌아가는 건 어떠세요? 깜빡한 물건이 있다고 하시면 되잖아요.”
여종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씨께서 노야의 얼굴도 뵐 겸.
진십팔랑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떠나는 날 뵙게 될 텐데 뭘. 요 며칠 조정에 대거 인사이동이 있기도 했고, 태자가 책봉된 지도 얼마 안 되었으니 한창 바쁘실 거야. 아버지께서도 피곤하실 테니 푹 쉬시게 해 드려야지.”
여종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진십팔랑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다시 마차 휘장을 들어 올렸다.
“평왕부 앞으로 지나가자.”
마부가 알겠다고 한 뒤 방향을 돌렸다.
회혜왕이 안장되고 평왕부의 편액이 철거된 후, 지금은 관부에서 나와 남은 물건을 정리하고 관리 중이었다.